마음의영성 | 41.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 - Daum 카페
41.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
성 알퐁소 리구오리 지음 / 남용욱 옮김 / 성바오로 출판사1. 작가소개- 지은이 : 성 알퐁소 리구오리(1696-1787) 성 알퐁소 리구오리는 이탈리아 마리아넬라에서 태어났다. 나폴리 귀족의 7형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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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퐁소 리구오리 지음 / 남용욱 옮김 / 성바오로 출판사
1. 작가소개
- 지은이 : 성 알퐁소 리구오리(1696-1787)
성 알퐁소 리구오리는 이탈리아 마리아넬라에서 태어났다. 나폴리 귀족의 7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6세에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아주 유명한 법률가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그는 법률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의 친구여, 우리의 직업은 불화와 위험으로 가득하네. 그 때문에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고, 죽음마저 불행하게 맞이할 위험을 안고 있어.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이 일을 그만둘 거야. 나한테는 맞지 않거든. 왜냐하면 나는 내 영혼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일세.” 특히 27세에 중요한 재판에서 패소한 다음부터 그는 법률계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퐁소 리구오리는 1723년 법률가를 그만두고 성 필립보 네리가 세운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726년 12월 21일 그는 30세의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처음 1년간은 집도 없이 떠돌며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던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그는 청소년들이 직접 운영하는 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기도 모임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기도와 강론, 사회활동, 교육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732년 11월 9일 알퐁소 리구오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루카 4,18)라는 성경 말씀을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고자 구속주회라는 이름의 활동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구속주회의 목적은 도시의 슬럼가 및 빈민가 등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었다. 또한 구속주회는 당시 교회 안에 팽배했던 인간의 자유의지와 성찬례를 부정하였던 얀센주의 이단과 윤리적 엄격주의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알퐁소 리구오리는 자신의 남은 생을 이 새로운 임무에 모두 쏟아 부었다. 그리고 고해소에서 신자들을 배려하여 항상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그들을 위로하였다. 알퐁소 리구오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71세에 알퐁소 리구오리는 류머티즘에 걸렸는데, 목이 구부러져 그의 턱이 가슴을 눌러 상처가 날 정도였다. 1762년 알퐁소 리구오리는 주교 서품을 받고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하지만 그는 고령과 질병을 이유로 교구장직을 사양하려고 하였다. 교구장을 지내는 동안 알퐁소 리구오리는 성체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는 내용의 강론집과 책,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1775년 알퐁소 리구오리는 교구장에서 은퇴하여 이탈리아 파가니에 있는 수도공동체로 돌아가서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며, 기도하다가 1787년 8월 1일에 선종하였다. 그는 1816년 9월 15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950년 4월 2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고해사제들과 윤리 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옮긴이 : 남용욱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성덕의 우수성
완덕은 완전히 하느님의 사랑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p11)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p11)
“사랑의 근본적인 효과는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뜻을 하나가 되게 만든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면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1)
고행, 열심한 기도, 자주하는 영성체, 형제적인 자선행위 등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신심행위는 다만 하느님의 뜻에 맞을 때에 한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p11)
하느님의 뜻과 동떨어져서 자기 뜻을 좇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의미로 하느님의 뜻을 숭배하는 대신 자신의 뜻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2-13)
☞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쫒아 사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뜻에 따라 산다면 신앙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을 손꼽으라 하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p13)
우리 구세주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고 이 세상에 오시고 그것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 (p13)
☞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오셨다.
성 바오로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하느님,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당신은 사람이 바치는 제물은 거절하시고 대신 나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를 바라십니다. 오, 나는 이제 당신의 뜻을 좇겠습니다.”(히브 10,5-7참조) 라고 말했다. (p13)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노라고 자주 강조하셨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38)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숱한 성인들이 끊임없이 응시하고 수덕을 쌓았던 마지막 목표였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완덕에 이르는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p14)
복자 헨리 수소는 늘 입버릇처럼 “우리가 완덕을 목표로 수덕을 실천해 나갈 때 꼭 영성적인 기쁨을 맛보야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완전히 순명해 나가는 사람이 될 때 참다운 완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p14)
아빌라의 데레사는,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모으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높은 완덕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p14)
☞ 일상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완덕의 길이다.
복자 헨리 수소는 늘 강조했다. “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벌레가 될지언정 내 뜻대로 사는 천사가 되지는 않겠다.” (p15)
세라핌 천사들이 가장 기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들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면 아무리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예를 들면 바닷가에서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무너지는 모래성을 평생 쌓는 일이라도 해도 좋고 마당에서 뽑아도 나고 뽑아도 나는 잡초를 평생 뽑는 일이라 해도, 싫다않고 기쁜 마음으로 평생 동안 해나간다는 것이다. (p15-16)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는 한 가지 수덕만 가지고도 성인이 되고 남는다. (p16)
하느님께 자기의 의지를 드리는 사람은 가진 것 모두를 드리는 것이 된다.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는 사람, 단식을 위하여 굶주림을 참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러나 하느님께 자기의 의지를 바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존재 전부를 바친다. (p17)
☞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명마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친다. 이들이 순교자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면 “주님, 저는 비록 가난하지만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당신께 드립니다. 제가 제 의지를 당신께 드린다면 저에게 남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다. (p17)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없다. 즉 하느님, 우리를 몽땅 가지십시오.” (p17)
그렇다. 우리가 이보다 더 귀한 무엇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 저를 차지하십시오. 저는 저의 모든 의지를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의 뜻을 일러 주시기만 하십시오. 제가 그 뜻을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p17)
☞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이면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p18)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뜻이 되게 하는 것이 완덕의 가장 높은 정점이고, 우리는 이 정점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일의 목표가 되고 바람이 되고 묵상이 되고 기도가 되어야 한다. (p18)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에 합치는 일
완덕의 진수는 모든 일에서, 그것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간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이다. (p19)
☞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겨드리는 것.
좋은 일에는 비록 죄인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추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고 고통스러울 때야말로 성인다운 덕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에 우리를 맞출 수 있는 것이다. (p19)
고통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보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저울질할 수 있을 것이다. (p19)
☞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아빌라의 성 요한은 자주 이런 말을 했었다.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지다." (p19)
☞ 십자가의 성 요한을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게 되는 그분의 뜻, 즉 질병, 궁핍, 고독, 가족과 친지의 죽음 등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오는 고통, 예를 들면 멸시, 억울하게 당하는 부당한 처사, 명예의 손상, 재물의 상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핍박 등도 하느님의 뜻에 합쳐야만 한다. (p19-20)
이런 시련을 당할 때 명심할 것은 하느님이 우리가 죄짓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겸손, 가난, 희생은 원하신다는 점이다. 한 가지 확실하고 꼭 믿어야 할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 일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이사 45,7) 그렇다. 모든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p20)
우리는 역경과 고통을 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역경이 반드시 악은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는 역경이 선이 되고 크게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p20)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이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순전히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언제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p22)
☞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선을 이루기 위하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간에, 우리의 선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저는 철저히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늘 평화롭습니다. (p24-25)
완전히 일치되는 삶에서 오는 행복
아라곤 왕국의 임금인 알퐁소 왕에게 어느 날 찾아온 손님이 질문을 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야 간단하지. 누구든지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p27)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행복하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을, 즉 그것이 불행한 일이건 행복한 일이건 간에, 행복 그 자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닥쳐온다 해도 그 마음의 평온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그런 불행을 수렴한다는 행위가 사랑하는 하느님께 기쁨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p27-28)
만일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에게 굴욕이 닥치게 되면 굴욕을 원하는 사람으로 자기를 바꾸고, 가난이 닥치게 되면 그는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 닥쳐와도 그것을 다 수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눈이 오건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가뭄이 들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게 되니, 어디 걱정할 일이 있겠으며 어찌 마음 상할 일이 있겠는가? (p28-29)
☞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듯에 일치하는 방법이다. 나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바꾸면 된다.
세상적인 기쁨은 잠시 우리의 오감을 사로잡지만, 그런 기쁨은 우리를 속이는 기쁨이고 허무한 기쁨일 뿐 아니라 결코 오래 지속되는 기쁨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기쁨은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영혼에 해를 가져오는 방해물이 되어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없게 한다. (p29)
"어리석은 자는 달과 같이 변하나 성스러운 사람은 변하지 않는 해처럼 그 지혜가 계속되리라.“(집회 27, 11참조) 어리석은 자 곧 죄인은 달과 같아서 오늘은 기뻐하고 내일은 울고, 오늘은 양과 같이 순하나 내일은 곰과 같이 사나워진다. 왜 그럴까? 그의 마음의 평화는 그가 만나는 세상일, 즉 때로는 좋은 일, 때로는 궂은일에 달려있기 때문에 수시로 일어나는 세상일에 지배되는 것이다. (p30)
반면에 의인들은 해와 같아서 그 마음은 늘 슬기롭고 평화로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평온한 영혼은 하느님의 뜻에 합쳐 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p30)
☞ 모든 것이 좋으신 하느님의 뜻인데 흔들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성 도로테오는 말한다. “성인들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으므로 계속해서 늘 영혼을 성스럽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p31)
☞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나의 손에 쥐어주시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 뜻에 맞게 힘껏 행하면 된다.
하느님의 뜻에 합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맛본다. 충만한 기쁨은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얻는 데서 오는 기쁨이고 영원한 기쁨은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하는데서 오는 기쁨이다. (p31)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어요.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달게 받는답니다. 하느님이 제게 가장 좋고 이익이 되는 것을 손수 저에게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왜 불행합니까? (p32)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시는 데 있다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을 원망하고 저주해서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하느님을 원망한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무서워하시는 하느님도 아니다. (p35)
그대들은 하느님을 찾아 나서라. 찾아 나서서 그를 발견하라. 그를 발견하거든 바싹 그에게 매달려라. 그리고 그의 뜻에 그대의 뜻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 놓아라. 그리하면 그대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큰 상급을 얻을 것이다. (p36)
☞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은 아무도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 있고 누구나 성스러운 삶을 통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게 하는데 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베드 3,9) (p36)
☞ 하느님의 뜻은 바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보내 주신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는 데 있다. (p37)
우리에게 심한 박해가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멸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p37)
☞ 그것이 비록 쓴 약일지언정 목적은 영혼의 구원에 있지 않은가!
하느님은 우리의 안녕을 지극히 걱정하신다. 오죽해야 그의 외아들을 보내셨으랴!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p38)
주님께서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나를 생각하여라. 그러면 나는 언제나 너를 생각하리라.”하셨다. (p38)
☞ 매일 매순간 주님을 생각하자. 그순간이 하느님이 나를 생각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한다. (p38-39)
어떠한 불행한 일이 우리에게 닥칠 때에는 참을성 있게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기뻐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p39)
우리가 환난을 참을성 있게 견뎌가는 일이 결국은 하느님께 큰 기쁨을 돌려 드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흡족할까? (p39)
자기에게 닥쳐오는 시련을 견뎌 가는 것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합하여 흡족해하지도 않고 부족해하지도 않은 상태로,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이다. (p39)
☞ 참된 복은 나를 하느님께 완전히 맡길 때 온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이 세상에서 평온한 삶을 누리고 싶거든 항상, 그리고 모든 일에서 그대의 뜻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 합치시켜라. (p39)
만일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거든 곧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되새기고, 즉시 “아, 이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라고 말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p40)
☞ 내 마음을 거슬리는 일이 생길 때 잊지말고 기억하자. 모든 것은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이 주시는 일이라고.
"주님, 이는 당신이 하신 일이옵기에 나는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입술을 열지 못했나이다.“ 즉 주님이 하신 일이므로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받을 따름이라는 마음 자세가 되어야 한다. (p40)
끊임없이 하느님을 묵상하며, 자주 성체를 모시며, 자주 성체를 방문하여 조배하며, 그대가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라. (p40)
그대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나의 주님, 저를 당신의 현존 안에 있게 해주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것을 제가 깨닫고 행할 수 있게 해주소서.“라는 기도가 버릇처럼 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녀 데레사가 늘 몸에 익힌 기도였다. 성녀는 하루에 적어도 50번은 자기를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생활을 했다. (p40)
☞ 이 책에서 데레사 성녀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를 말한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틀림없이 구원된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가 평소에 과연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았느냐하는 물음에 양심껏 대답해 볼 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41)
☞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
사람이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닥치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알고 그 뜻에 합치며 살았었다면, 그는 참으로 성인다운 죽음을 맞게 될 것이며 그의 영혼은 구원받을 것이다. (p41)
우리는 다 같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그의 거룩한 뜻에 우리의 뜻을 합치며 살아가자. 하느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가를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한히 선하시고 무한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셨다. 그가 뜻하는 것이 우리에게 결코 해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p41)
성 바실리오가 말한 것처럼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말고 하느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갖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기대하거나 성취하려고 애쓰던 것보다 더 큰 유익을 우리에게 안겨다 주실 것이다. (p41)
☞ 지금도 하느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이를 확신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에 합치는 구체적인 방법
우리는 부정적이거나 원망하는 말을 삼가야 할 것이다. 가령 “제기랄, 못 견디게 더운 날씨군!”, “아! 지독하게 춥군.” 혹은 “정말 비극이운, 비극이야!” 따위의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이러한 말씨는 아예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일어나는 일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원의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p43)
☞ 무엇보다 먼저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자. 예를 들면 배가 고플 때, 목이 마를 때, 가난할 때, 외롭고 버림받았을 때, 명예를 손상 받았을 때, 이런 때에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해야 한다. … “저는 당신께서 뜻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제 뜻으로 삼겠습니다..“(p44-45)
우리는 모름지기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을 막론하고 우리의 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p46)
☞ 우리의 선은 무엇인가? 우리의 ‘구원’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자.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한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모도 아니요, 건장한 체구도 아니요, 뛰어난 재능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 일이다. (p46-47)
☞ 내가 필요한 것은 구원이 되어야 한다. 그 외의 것이 무엇이 필요할까!
모든 방법을 쓰고도 치료할 수 없을 때에는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합치자. 하느님의 뜻에 합치는 것이 건강을 되찾는 것보다 낫다. 담담하게 “주님, 저는 병자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도 않고 건강해지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당신의 뜻을 따르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p47)
하느님은 그대가 이 고통을 겪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고통을 너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고통을 우리 주님의 고통에 합하여라. (p49)
☞ 하느님의 뜻이 고통을 겪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그대는 진정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가 병상에 누워있게 되거든 이 한 마디의 기도를 바쳐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리고 이 기도를 되풀이 바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그렇게 원하라. (p49)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기쁜 마음으로 수렴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성덕은 없다. (p49-50)
"그대가 하느님의 뜻을 찾아 따르려고 한다면 성한 것과 아픈 것이 무슨 상관인가? 성한 것도 하느님의 뜻,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일 바에야.“ (아빌라의 성 요한) (p50)
하느님은 우리가 해내는 일의 성과를 가지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뜻을 버리고 완전히 그의 뜻에 합치는 것을 기뻐하신다. (p50)
☞ 전능하신 하느님에게 인간이 한 일의 성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 프란치스코 드 살도 우리가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 멋지게 일을 해서 빛나는 성과를 봉헌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p50)
하느님은 우리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p52)
병고는 우리 영성생활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병고는 우리의 성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나타내 주는 시험지 노릇을 해주기 때문이다. (p52)
☞ 앞으로 닥치게 될 병고를 잘 받아들이기 위하여 평소에 노력해야 한다.
만일 그대의 영혼이 병고로 말미암아 흔들리는 일 없이 꿋꿋하고 슬퍼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고, 성급히 치료되기를 조바심하며 안절부절못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의사와 그대의 장상에게 일임하고, 조용하고 숙연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이는 분명히 그대의 성덕이 확고한 기반에 서 있다는 증거이다. (p52)
영혼의 황폐
우리가 영성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영적 지도자로부터 연유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p55)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죄는 이 세상에서 보속하든지, 아니면 저 세상에서 보속하든지 좌우지간에 보속을 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가 내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 여기를 잘라내고 저기를 태워버리고 하여 저를 이 세상에서 아끼지는 마시고 대신 저 세상에서 영원히 보존해 주십시오.” (p56)
성녀 데레사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몫은 하느님을 즐기자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거룩한 뜻을 행하는 데에 있다.” “하느님의 진정한 애인들은 영혼이 황폐하고 유혹이 심할 때에 발견된다.” (p57)
☞ 나는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행하고 있는가?
영혼의 황폐 상태야말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다. (p58)
☞ 영혼의 황폐 상태에 빠질 때 더욱 더 하느님께 의지해야 한다.
진정 우리에게 상급을 마련해 두신 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의 기쁨과 행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우리의 노고의 대가로 점수를 얻는 곳이고 하늘나라는 그 점수를 가지고 보상과 행복을 얻는 곳이다. (p59)
☞ 인생은 우리가 w마시 머물다 가는 훈련소에 불과하다.
아빌라의 성 요한은 말했다. “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영혼의 고갈상태와 유혹을 견뎌 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림 없이 기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황홀경보다 얼마나 나은 일인가!” (p59)
영혼의 건조 상태를 하나의 양념이라도 되는 양 받아들이고 그대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합쳐라. (p60)
☞ 양념 없는 밥을 먹기 힘들 듯 어려움 없는 삶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이 아니다.
영혼의 황폐상태가 반드시 책벌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때때로 영혼의 황폐감이 우리의 영성을 한층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고 나를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p61)
☞ 그러기에 마더 데레사도 영혼의 황폐를 호소하였다.
타울라도 말하기를 “영혼의 고갈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감각으로 무엇인가 느껴가며 기도하는 기도보다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p62)
성 보나벤투라와 게르손도 말했다. “묵상할 때 감각적으로 무엇을 느껴야만 제대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감각적인 느낌 없이 기도하는 편이 하느님께 더 큰 봉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런 감각 없이 기도를 지속함으로써 그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낮출 줄 알게 되고 겸손하게 되어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 중에 감각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면 그런 감각이 자칫하면 그 사람을 부풀게 만들고 자기가 성덕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처럼 느낀 나머지 교만해지고 게을러져서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p63)
☞ 기도하기 싫어질 때 그래도 기도하자.
“내가 죽을 때 가장 행복하게 죽는 법은 하느님의 뜻에 가장 온전히 나를 맡기는 것뿐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죽음을 주시더라도 나는 그런 죽음을 바랄 뿐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성녀 제르트루다) (p65)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오로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가장 좋은 방식으로 우리를 죽게 해달라고 염원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이런 기도가 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오 하느님, 저는 한 가지만을 바랍니다. 그것은 제 영혼을 구해 주시라는 것뿐,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주시던 그것은 모두 당신의 뜻에 맡기나이다.” (p66)
죽음이 다가왔을 때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합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세상이란 늘 고통의 연속이 아니고 무엇인가? 늘 유혹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항상 하느님과 떨어지는 위험을 안고 사는 세상이 아닌가? 다윗 임금도 하느님께 호소했다. “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시편 141,9) (p66)
☞ 고통은 구원으로 가는 시험이다. 시험을 치지 않고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아빌라의 성 요한도 말했다. “세상에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위험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많은 의인들은 하느님과 떨어지는 것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떠나기 전에 죽음을 바랐다.”(p66-67)
참으로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 아래 있으면서 훌륭한 죽음을 맞는 것보다 바람직하고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p67)
하늘나라를 열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같이 있기를 열망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많은 성인들은 세상을 뜨기를 갈망했다. 그래야만 저 세상에 가서 사랑하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면서 애인을 만나듯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p67-68)
☞ 나는 단지 마음의 평화를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에 가기 위하여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다. (p69)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다.” (아빌라의 성 요한) (p69)
기도생활에서 초자연적인 선물, 즉 탈흔상태에 들어가는 것, 계시를 받는 일, 무엇을 환상으로 보는 일 등을 기대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 이러한 초자연적 선물은 순수한 하느님 사랑과 참다운 믿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성인들 중에는 이러한 초자연적 선물없이도 완덕에 이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p70-71)
☞ 그런 초자연적인 선물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성덕 중에 우리를 성화시키는 완전한 성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합치는 성덕이다. (p71)
하느님이 우리를 완덕과 영광으로 치켜 올리지 않으신다면 그런 대로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어 그분의 자비를 빌고 자기 영혼의 구원을 허락해 주십사하고 기도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상급은 크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느님은 자기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p71)
☞ 주시면 주시는 대로, 주시지 않으면 주시지 않으신 대로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면 된다.
결론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일, 또는 미래에 닥쳐올 일 등 모든 일을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이러한 정신으로 분별하고 결론지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삼자. (p73)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나에게 허락하시는 환경 속에서,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방식대로 섬겨야 한다는 점이다. (p73)
언제나 어떤 환경 아래에서나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삼자.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귀엽게 보시고 당신 품안에 안아 주신다. (p74)
☞ 내가 처한 환경 안에서, 나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며 살아갈 것.
혹 견디기 힘든 불행이 우리에게 닥쳐온다 하더라도 가령 가족 중 한 사람이 죽는다든지, 재물의 손해를 입는다든지 할 때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그렇습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주님,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당신 보시기에 좋으시니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라고 하자. (p75)
☞ 아멘.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주님께서는 성녀 카타리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녀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언제나 이 대목에 와서 잠시 기도를 멈추고 그 의미를 묵상한 후 하늘에 있는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빌으라고 하셨다. 우리도 성녀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분부를 내 것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자. 그러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인이 될 것이다. (p75)
☞ 이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실천하자. 멈추고, 묵상하고 기도하자.
3. 이책에 대한 간략한 나의 느낌 또는 소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은 75페이지에 불과한 소책자이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감동은 엄청 크다. 성인은 이 책을 평생을 가까이 두고 수없이 되풀이 읽었다. 완덕에 이르는 길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길임은 단순하고도 알기 쉬운 문체로 알려준다.
나도 아주 오랫동안 가까이 두고 되풀이해 읽을 성 싶다.
- 출처: 마음의영성 - Daum 카페 마음지기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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