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주해/교부들의 가르침

교부들의 가르침 (17) 수난기(Passiones)와 순교록(Martyria) / 최원오 신부

Skyblue fiat 2024. 1. 13. 02:58

교부들의 가르침 (17) 수난기(Passiones)와 순교록(Martyria) / 최원오 신부

한편의 드라마처럼 쓴 순교보고서


「순교자 행전」(Acta Martyrum)은 순교자들에 대한 법정 심문과 재판 내용, 사형판결문과 최후진술 등을 기록해 놓은 공문서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베끼다시피 저술한 작품이다. 법정서기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씌어진 「순교자 행전」과는 달리, 신심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수난과 순교 장면들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써 내려간 순교 보고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수난기」(Passiones)와 「순교록」(Martyria)이다. 「수난기」는 글자 그대로 순교자들이 체포되고 감옥에 갇혀 고난 당하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순교록」은 순교자들이 장렬하게 순교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모질고 잔인한 죽음 앞에서도 끝끝내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짧고 딱딱한 법정 기록문 형식으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자들의 최후를 더욱 장엄하고 감동적인 필치로 「수난기」와 「순교록」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에는 저자 개인의 감상이나 느낌들이 자연스레 녹아들었고, 때로는 소설적인 기법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수난기」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감동적인 작품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의 수난기」이다. 이 「수난기」는 젖먹이를 둔 스물 두 살의 신심 깊은 귀부인 페르페투아와, 예비자였지만 굳은 신앙을 지닌 만삭의 몸종 펠리치타스의 수난과 순교 이야기를 전해 준다. 페르페투아의 연로한 아버지는 딸을 배교 시키려고 세 차례나 눈물로 설득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마는데, 아버지와 딸의 가슴아픈 상봉 장면을 「수난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 『며칠 후 우리가 심문 받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내 아버지는 고통으로 초죽음이 되어 내게 달려오셔서, 내 마음을 돌리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딸아, 내 백발을, 네 아비를 제발 불쌍히 여겨 다오. 내가 참으로 네 아비라 불릴 수 있다면, 참으로 꽃다운 네 지금 나이에 이르도록 내 손이 너를 이끌어 왔다면, 내가 너를 네 동기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귀여워해 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발 나를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로 만들지 말아다오. 네 동기들을 좀 생각해 보렴. 네 어미를 좀 생각해 보렴. 네 고모와 네 자식을 생각해 주렴. 너 없이 그 아이가 어찌 살겠니? (…) 정말이지 아버지는 참으로 애틋한 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며 내 손에 입맞추시고 내 발에 엎드리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딸이라 부르지 않고 마님이라 부르셨다. 아버지의 이 고통이 나에게 깊디깊은 아픔을 주었다』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록

 

▲ 순교록은 순교자들의 순교 장소와 날짜를 기록해 놓은 교회의 공식문헌이다.

 


그리스도교의 「순교록」 가운데 최초의 작품은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록」이다. 이 「순교록」에 따르면, 법정에 끌려온 연로한 주교 폴리카르푸스는 배교하기만 하면 당장 풀어주겠다던 달콤한 말에 조금도흔들리지 않았다 : 『여든 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폴리카르푸스는 집정관과 포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 진리를 당당하게 가르쳤고, 마침내 화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사형집행인들이 장작더미 한가운데 폴리카르푸스를 못박으려하자, 그는 이렇게 요청했다 :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시오. 나에게 불을 참을 힘을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이 못으로 나를 고정시키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디어 내는 힘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교록」으로 말미암아 폴리카르푸스는 오늘날까지 우리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성인전」의 탄생

「수난기」와 「순교록」에는 저자의 신학적 의도가 곳곳에 배어 있기도 하고, 때로 과장된 이야기들이 곁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근본적으로 순교자들의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존경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위하여 처음부터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이야기들로 순교자들의 생애와 죽음을 꾸민 책들도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인전」(Legenda)이다. 「성인전」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그리스 로마의 영웅전이나 위인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주로 순교자들의 일대기와 순교행적과 기적을 다루었지만, 4세기초에 박해가 끝나고 더 이상 순교자가 없게 되자, 유명한 수도승들의 「피 없는 순교」를 소재로 삼았다. 많은 「성인전」은 순교자들과 수도승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과 죽음에 천박한 황금을 덧칠함으로써 그분들이 남기신 참된 교훈과 감동을 반감시켰을 뿐 아니라, 성인이란 보통 사람은 감히 꿈꿀 수 없는 별세계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을 널리 퍼뜨리게 되었다.

「순교자 행전」 「수난기」 「순교록」이라는 넓은 밭에는 순교자들이 남겨 놓은 아름다운 보화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 밭에서 쓸데없는 돌멩이는 걷어내고 보석들만 주워담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성인 유해 공경의 폐단을 통탄하시면서, 순교자 묘지 방문을 금하는 강론도 자주 하셨다. 그것은 우리들이 정성 들여 가꾸어야 할 것은 순교자들의 삶과 가르침이지, 그분들의 뼈다귀나 「잔해」(殘骸, reliquiae)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말 번역 :
폴리카르푸스, 「편지와 순교록」, 하성수 역주, 분도출판사 2000.
최원오 신부(부산가톨릭대 교수)

 

가톨릭신문 (catholictim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