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고대교회의 수뎍생활과 수위권 문제
7-2. 서방교회 수도원의 시작과 성 베네딕도 - 서방교회 수도원 규칙서 집대성
- 몬테카시노 수도원 : 베네딕도 성인이 529년에 창건한 몬테카시노 수도원.
베네딕도회의 모원인 이 곳에 성인과 그의 누이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잠들어 있다.
예로니모는 "나에게 도시는 감옥이고 고독은 낙원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수도승들에게 사막은 고독의 표시이자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절대적인 고독은 절대적인 자유를 낳는 법이다. 세상과의 격리를 의미하는 사막은 거주하는 곳을 떠나는 지리적 사막과 다른 생활 방식, 즉 금욕, 절제, 결혼의 포기와 같은 사회적 사막이 있다. 동방교회에서의 수도생활이 이 두가지 사막의 특징 안에서 철저히 이뤄졌다면 지리적 여건이나 사회적 여건이 달랐던 서방교회는 인위적 고독을 만들어가며 수덕생활을 영위해 갔다.
서방에서의 수도원은 주로 가정에서의 고행수덕생활을 통해 발전했다. 그리고 먼저 발달한 동방의 수도생활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방의 수도생활은 너무 엄격한 것이어서 가정고행수덕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주로 부녀자들이었던 서방에서는 순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성에 의해 서방의 고행수덕생활이 수도원의 형태로 변해갔다.
교외에 별장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긴 로마인들의 생활 풍습 속에 수덕생활이 받아들여지면서 별장생활이 수도원형태로 변해간 것이다. 즉 개인 집이 수도원으로 변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서방교회에서는 도시 한가운데서 '인공적인 사막'을 발견했고 도시 속에서 수도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방의 수도원은 동방의 수도원과 다른 몇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이는 서방교회의 수도원이 빨리 받아들여지고 발전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첫째는 수도원 생활을 후원한 사람들이 로마의 귀족들이라는 점이다. 이미 제국전체가 그리스도교화된 상태에서 귀족들은 정계은퇴 후에 별장에서 지내던 생활을 수도생활과 연결시켰다. 또 실제로 수도원의 창설자들은 대부분 돈많은 평신도들이었다.
둘째는 유명한 주교들이 수도원의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방교회의 특징중 하나인 교회와 수도원 사이의 확고한 관계가 맺어졌고 수도원은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셋째는 초기 수도원의 자의식이었다. 비록 로마제국이 공적으로는 그리스도교화됐지만 대부분의 개종자들은 아직도 미신과 옛 관습에 젖어있던 상태에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수도자들이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그래서 4세기부터는 '회개한다'란 말이 개종만을 의미하지 않고 수도원 입회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의식들은 수도자들에게는 자긍심을, 일반인들에게는 수도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수도원의 입지를 강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수도원 제도는 그 양적 성장과 맞물려 개인주의나 극단적 고행생활과 같은 폐해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5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수도원 규칙서들이며 그중에서도 베네딕도가 쓴 규칙서는 서방교회 전체의 규칙서가 됐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베네딕도에 대해 사실은 역사적으로 고증된 것이 별로 없다. 480년경 누르시아에서 출생해 로마서 공부를 하다 수비아코의 한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한 후 그의 명성을 듣고 제자들이 모여들자 이것이 수도공동체가 됐고 이후 몬테카시노로 옮겨 후대 베네딕도회의 모원이 되는 수도원을 설립했다는 사실 정도와 그에 따르는 전설에 가까운 일화들 뿐이다. 베네딕도회라는 조직도 19세기 말에 생겨난 것이다.
베네딕도의 역사적 중요성은 수비아코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수도승들의 규칙'(Regula Monachorum)에 있는 것이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고대에 생긴 수많은 규칙서들 중의 하나로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당시까지의 수도원 규칙 양식들을 한데 모아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도 규칙서의 탁월함은 시대를 넘어 사회제도와 문명의 연계를 가능하게 해준 중용의 정신에 있었다.
베네딕도는 이론과 이상을 내세우기보다 현실을 감안하여 지극히 실제적인 법규를 정했다. 지나친 엄격성을 피하고 평범한 신자로서 할 수 있는 수도생활 제도를 실시했다. 베네딕도는 세상과의 격리를 위해 광야나 사막의 고독이 없던 유럽에 봉쇄구역을 설정했고 사막의 수도자들이 육체적 요구를 최소화 한 것에 대해 넉넉한 수면과 음식, 의복을 제공하면서 철저한 공동소유를 규정함으로써 청빈의 삶을 구현했다. 이처럼 동방의 수도전통을 손상되지 않게 서방의 조건에 맞게 적응시킨 것이 성인의 위대한 업적이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같은 수도원 안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정주의 의무를 요구했다. 당시 유럽은 아직 게르만족의 이동이 끝나지 않은 시기였고 수도자들도 방랑생활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수도원의 정주생활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 유용성이 대단히 컸고 후에 중세기의 첫 문명화라는 전원정착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정주의 약속으로 베네딕도 공동체는 가정처럼 친밀한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데 베네딕도는 이 공동체의 일과를 공동기도와 거룩한 독서 그리고 노동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조화시켰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베네딕도회의 정신인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모토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베네딕도 규칙서는 영국을 필두로 전 유럽에 전파되는데 특히 칼 대제 시대에는 서방세계 수도원의 유일한 규칙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에 세워진 수도원은 그 지역의 선교활동과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돼 교회의 중심이자 나라를 발전시키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칼 대제는 미개발 지역이나 변방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자들에게 그 지역을 개발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처럼 베네딕도의 규칙은 중세의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서양의 9세기부터 12세기까지를 베네딕도적 세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탈리아 중부를 떠난 적이 없고 두 세개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작은 책 한권을 쓴 것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 폭력과 미신으로 얼룩진 암울한 중세초기의 새 지평을 연 등불이 됐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고픈 신앙 하나로.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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