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고대교회의 수뎍생활과 수위권 문제
7-1. 수도생활의 시작 - 박해 후 새로운 형태의 순교신심
- 가타리나수도원 : 시나이산의 심장 가타리나수도원 전경.
유스티아누스 황제때 지어진 것으로 여러나라에 점령당했으면서도 점령자들의 보호로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교회사 100대 사건의 줄기를 따라 방랑도 순례도 아닌 길에서 이집트 시나이산에 이르렀다.
수도생활의 요람인 이집트에서도 보존이 가장 잘되어 있다는 가타리나 수도원을 찾아온 길이었다.
1) 시나이산 초입의 가타리나 수도원.
342년경 헬레나성녀가 시나이산을 순례하고 나서 기념경당을 세운 것이 모체가 돼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느낀 첫 인상은 수도원의 역사나 외형적 모습이 아니라 무엇이 수도자들을 이 황량한 사막으로 이끌어 냈느냐 하는 내면적인 것이었다.
수도원은 고행수덕생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복음 선포시기 고신극기를 통해 덕을 쌓는 생활은 비 그리스도교 세계에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고 이러한 수덕생활이 교회 안에 도입돼 하느님을 위해 재산과 자신을 단념하는 금욕생활은 사도시대부터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금욕적 수덕생활을 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첫째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따르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세상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초대교회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적 고행수덕생활이 교회 안에서 고유한 신분을 이루고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3세기말부터이다.
박해시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나라에 살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 때문에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그리스도에게 충실하기 위해 세상의 것들을 스스로 포기한 초세기 교회의 신앙인들은 세상과의 분리 속에서 모두가 정결과 가난, 기도, 고행과 같은 요소들을 실천한 수덕자들이었다. 이처럼 순교정신으로 가득 찼던 초기교회에서는 수도승 생활이나 조직적인 수도생활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수도승 생활의 기원은 순교정신이 생기를 잃어갈 때, 즉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후 일어난다. 말하자면 완전한 사랑의 형태로서 추구했던 순교신심이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맞아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신앙인들이 순교를 영적으로 고행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고행수덕생활은 평생을 통해서 순교하는 것이라 여긴 때문이었다. 특히 4세기부터는 고행수덕생활을 평화시의 '영광스러운 순교'라고 했다.
고행수덕생활이 수도생활로 넘어가는데 대한 또다른 동기는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반동으로서다. 초세기의 박해는 교회의 커다란 외적 위협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복음의 충만함과 함께 그리스도를 뒤따르려는 열의가 충만한 시기였다. 그러나 4세기 교회 상황이 로마제국과 동화되어 본래의 예언적 사명을 잃어버리게 되고 안주하게 되자 순교자들이 맡았던 교회의 예언직을 다시 수행하기 위해 이미 익숙해진 세속으로부터의 이탈, 곧 사막의 고독 속으로 떠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을 반영하듯 카타콤바는 동굴과 은둔소로, 박해시의 고문은 금육과 단식으로, 감옥은 사막으로 대치해 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첫 수도생활의 형태라 할 수 있는 사막의 수도생활은 로마제국과 일치하여 정착된 제도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예언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덕자들의 빼어난 모범은 3세기부터 이집트와 아프리카에서는 공동체를 통솔해야 하는 성직의 임무를 수덕자들에게 맡기게 하는 원인이 됐고 이는 서방교회에서 결혼한 성직자에서 절제를 지키는 성직자로 다음엔 독신성직제도로 옮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결국 성직자들에게 원천적으로 수도자적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역사적 가르침이다.
수도생활은 처음에 혼자서하는 은수생활로 시작되어 공동체 수도생활로 발전했다. 은수생활을 시작한 대표적 인물로는 성 안토니오를, 공동체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로는 성 빠꼬미오를 꼽는다. 안토니오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 근처인 코만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해 일찍 부모를 여읜 후 복음서에서 부자청년 이야기(마태 19, 21)에 감동된 나머지 상속받은 모든 재산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80여년간의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다. 땅바닥에 자면서 빵과 소금물뿐인 하루 한끼의 식사로 극기생활을 하던 안토니오의 선종이후 수도원이 그리스도교에 급속히 전파됐고 새로운 형태의 성소가 나타났다.
사막에서의 초기 고행수덕생활은 물론 하느님께 봉헌된 삶에 우선성을 부여하기 위해 공동생활없이 혼자 시작됐으나 젊은 은수자들은 안토니오와 같은 경험많은 은수자를 필요로 했고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또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자신들이 만든 것을 팔아 생필품을 단체로 구입하기도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은수자 마을이 형성됐다. 이를 공동은수생활 수도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수자들이 증가하면서 철처히 혼자 수도하는 생활이 극단적이거나 개인주의적으로 빠질 위험이 있자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 곧 공동생활 수도회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수도원으로는 빠꼬미오가 이집트 북부지방의 타벤니시에 세운 공동체가 처음이다. 은수자 생활은 성숙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었고 높은 수준을 요구했으므로 모두가 성공하지 못했다. 은수생활을 결심한 이들이라 해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살아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이러한 은수자들이 단일체를 이루려는 경향을 파악한 빠꼬미오는 한 형제 같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수도생활을 만들고 이 수도공동체를 위해 수도규칙서를 만들었다. 빠꼬미오는 사도행전 4장 32~35절에서 표현된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형태를 새로운 수도공동체의 표본으로 삼았다.
빠꼬미오의 이 수도회에서 여러 수도원들이 만들어졌고 많은 수도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수도원의 발전은 4세기 후반에 와서 유명한 주교들이 교회와 수도원의 관계를 정립하기 시작했고 451년 칼체돈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다뤄 수도원을 교구에 종식시키고 주교가 수도원 창립을 허가하고 수도원을 돌보도록 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고 온전히 봉헌된 삶을 살고자하는 열의로 시작된 수도원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를 차지하게 되면서(많은 지원자들과 함께 수도자들은 노동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 이상이 반감하게 되고 3~4대를 거치면서 창설자의 정신은 식어가면서 자주 개혁의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처음 시작의 마음을 간직 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교회사의 교훈을 수도원의 역사에서도 똑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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