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강의 (2010. 9. 15. 사제 피정)
20. 하느님 뜻 안에서 우리 어머니 성모 마리아
아버지, 사랑합니다! 저희에게 아드님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저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겠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뜻 안으로 들어가오니,
아버지께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시어
아버지 뜻의 무한성 안으로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면 아버지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아닌 것은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겠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아버지 뜻의 나라를 청하나이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는 당신의 보호 아래 피신하오니
이 가련한 자녀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오,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지금 20번째 강의에서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님께서 스테파노 곱비 신부님에게 바로 이 집에서 해주신 말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1987년 9월 27일 서울(한국)에서의 동정 성모 마리아님의 말씀입니다.
363장 세상 만민에게
1. 이 땅에서는 내가 퍽 많은 사랑과 공경을 받고 있다.
내 자녀들이 단순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내게 의지하며,
모두가 어머니다운 내 보호의 망토 속을 피난처를 삼고 있다.
나의 현존이 이곳 교회에 활기와 힘을 주고 있기에,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비옥해진 토양 위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날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2. 이 작은 땅, 내 천상 정원의 특전적 부분인 이 작은 땅 주위에는
내 원수 ‘붉은 용’(묵시 12,3)이 지배하는, 광대하기 그지없는 땅이 펼쳐져 있다.
하느님께 대한 반역의 토대 위에 자신의 왕국을 세운 원수가 엄청난 수의 내 자녀들을 강박하여
무신론으로 몰아갔으니, 이 자녀들은 지금 더 없이 깊은 암흑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부터 내 빛과 승리가 퍼져나가, 이 거대한 아시아 대륙의 모든 나라를 휘덮게 되리라.
3. 나는 갈수록 강렬하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서광’(曙光)이다.
나는 세상 만민에게 도움과 구원을 가져오는 ‘동정 어머니’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개선에로 ‘열려 있는 길’이다.
나는 또한 ‘태양을 입은 여인’(묵시 12,1)이니,
바야흐로 내가 특별히 개입하여 ‘붉은 용’을 결박하려고 한다. 불과 죽음의 제 왕국으로 처넣기 위함이다.
그런즉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온 교회가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어머니의 현존’이야말로 교회의 보편적 쇄신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4. 이 해는 내게 바쳐진 해이다.
내 승리의 계획에 협력하도록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나와 함께 기도하고 고통받으며, 모든 것을 봉헌하여라.
5. 내 가장 작고 가난한 아들인 너,
하지만 교회와 세상 앞에서 내가 영광을 받게 하려고 뽑은 아들인 너를 통해,
내 ‘티 없는 성심’이 각별히 사랑하는 땅인 이 한국을 축복하고,
아울러 아시아 대륙과 온 세상의 모든 나라를 축복하고 싶다.
우리 동정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고 특별히 사랑하시는 이 나라에 우리가 이렇게 있게 된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나라와 이 세상에게 이렇게 특별한 메시지로 주신 이 말씀을 이렇게 가지게 되고 읽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성모님께서 지금 우리를 특별히 부르고 계시는데, 그 부르심에 우리가 감사하고 잘 응답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이 큰 대륙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하는 일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의 나라의 여왕이신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큰 대륙에 구원의 은혜와 또 하느님 뜻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 강의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무한하고 깊은 신비 속으로 들어갑니다.
성모님의 도움으로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성모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발견할 것입니다.처음부터 성모님 안에서 다스리시는 이 피앗이 성모님께 그 모든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주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파렐 신부님, 혹시 이 순간에 곱비 신부님을 통한 이 ‘세상 만민에게’ 메시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파렐 신부님 : 지금 카롤로스 신부님이 묵으시는 방에서 고삐 신부님이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카롤로스 신부님 : 저에게는 아주 큰 영광입니다.
제가 신부가 되기 전에 벌써 저는 여러 해 전부터 곱비 신부님과 그분의 말씀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곱비 신부님이 받은 모든 메시지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여기 올 것을 상상도 못하면서, 이 한국에서 받으신 곱비 신부님의 ‘세상 만민에게’ 메시지를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이제 때가 가까이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 동정 성모 마리아의 모든 메시지들이 성취되는 때가 가까이 오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내 위대한 나라의 표징과 징조가 더욱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없었던 일로 내가 지금 너에게 내 뜻의 왕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이제 가까워졌다는 표시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우리가 모릅니다만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믿고 느낍니다. 이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우리들에게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분명히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이 지금 우리들 사이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모님께 대한 루이사의 글들을 좀 읽겠습니다.
4권 104장 1902년 1월 26일 : 지존하신 성삼위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풍성한 여왕이신 어머니
1. 아침에 평소와 같은 상태로 있다가 내 앞에 펼쳐진 끝없는 빛을 보았다.
그리고 이 빛 안에 지존하신 성삼위께서 계심을 알았다. 동시에 여왕이신 어머니께서도 이 빛 앞에 계심을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성삼위 안에 온전히 흡수되어 계셨는데, 또한 당신 안으로 성삼위를 온전히 흡수하기도 하셨다.
2. 그래서 어머니 안에는 성삼위의 세 가지 특별한 권능인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풍성한 것이었다. 게다가, 성삼위 하느님께서 인류를 당신의 일부로, 곧 당신 자신에게서 나온 작은 조각으로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이 분신들이 당신 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갈망하시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왕이신 어머니께서도 이를 공유하시며 뜨거운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는 사람은 성부님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성부님 안에 있고 성부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동정 마리아를 묵상하려고 할 때 우리는 성삼위의 신성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 성삼위의 신비 속에 흡수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것의 마지막 부분을 잘못 읽으면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성삼위께서 인류를 당신의 일부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류를 당신 자신에게서 나온 작은 조각들로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잘못 읽으면 우리가 하느님의 본체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본체는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천사들과 우주의 그 실체 본체들은 다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의 피조물들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하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가 좀 다른 존재인데, 우리는 그냥 붓으로 한 획을 그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면으로는 하느님 전체의 신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닮은 삶을 살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본체와 인간의 본체 사이에는 아주 무한한 거리가 있습니다. 아주 다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무한한 실체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당신 자신의 일부로 사랑하십니다. 내일 우리가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 마리아의 그 첫 번째 가르침들을 읽을 예정인데,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티 없으신 성심 속에, 티 없이 잉태될 때부터 우리들 각자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에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의 영원한 신비 속에 잠겨 계십니다. 신적인 모성과 사랑으로 성모님은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성모님의 덕들만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과 그분의 모든 명예, 그런 모든 것의 원천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피앗 그리고 또 자신을 존재하게 한 그 영원한 피앗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8권의 다른 장에서 또 이것을 설명합니다.
8권 33장 1908년 4월 5일 : ‘피앗’ - 성모님께서 지니신 모든 선의 근원
1. 평소대로 계속 앉아 있다가 어느새 나 자신 밖으로 나와서 어느 동산에 있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드높은 옥좌에 좌정해 계신 여왕이신 엄마를 뵐 수 있었다. 나는 거기까지 올라가서 그분의 손에 입맞추고 싶은 불타는 열망을 느꼈으므로 애써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그분께서 내 쪽으로 오셔서 내 얼굴에 입맞춰 주셨다.
그분을 뵙는 순간, 공 모양의 빛 덩어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 보였고 그 빛 속에는 ‘피앗’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이 낱말에서부터 덕행과 은총과 위대함과 영광과 기쁨과 아름다움 따위 우리 여왕이신 엄마께서 지니신 모든 것의 수없이 많고 다양하며 끝없는 바다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체가 그 ‘피앗’에 근거를 두고 있었고, 그분의 모든 선도 이 ‘피앗’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2. 오, 전능하고 열매 푸진, 거룩한 ‘피앗’이여!
누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말문이 막힙니다.
너무나 위대해서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숫제 입을 다무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도 루이사처럼 성모님께 올라가서 그분에게 입맞추고 싶습니다.
더구나 루이사께 성모님이 해주신 것처럼 성모님이 나한테로 내려 오셔서 기막힌 입맞춤을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도 그런 것을 원합니다. 이런 은혜, 이런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마 천당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 될 것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오셔서 우리한테 입맞춤을 해주시려고 하면 우리는 물론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루이사가 성모님 안에서 공 모양의 큰 빛 덩어리를 봤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피앗’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피앗’이 마리아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샘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피앗’이라는 낱말에서 온갖 덕행과 은총과 위대함과 영광과 기쁨과 아름다움들이 나오는 것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이런 생각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전례력에서 성모 마리아의 생애의 중요한 순간들을 다 축하하고 지나가지만, 어떤 때는 원죄 없는 잉태를 굉장하게 축하되고, 어떤 때는 성모 승천을 축하하고, 그 성모님의 각 생애의 순간들을 우리가 크게 축하하는데, 한국과 니카라과, 미국, 북한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되었습니다. 그런데 멕시코는 아닙니다. 멕시코는 과달루페 성모님께 봉헌되었습니다. 멕시코에서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현존이 멕시코의 모성, 멕시코의 어머니로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성모님의 어떤 명칭에 봉헌됩니다. 예를 들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이런 식으로 봉헌되고 있습니다.
루이사가 묵상하고 있을 때는 성모님의 그 모든 것들이 다 ‘피앗’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루이사가 이렇게 성모님을 묵상하고 성모님의 빛, ‘피앗’이 성모님의 모든 것의 원천인 것을 보고 있는데 성모님이 루이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3. 나는 놀라움에 잠겨 여왕이신 어머니를 우러러보았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 “딸아, 나의 모든 거룩함은 ‘피앗’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힘을 얻지 않았다면, 나는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걸음을 옮길 수도 다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나의 양식이요, 나의 전부였다. 여기에서 내 거룩함과 부요함과 영광과 영예들이 나왔고, 그 모든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었다.
5. 이와 같이, 영혼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이 뜻 안에 녹아들면 들수록 더욱 거룩해지고 하느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그만큼 더 입게 된다. 이 영혼의 생명은 다름 아닌 하느님 뜻의 작품인 까닭이다. 그렇게 영혼이 그분 자신의 것이 되면 그분께서 어찌 사랑하시지 않을 수 있겠느냐?
6. 그러므로 사람은 행하고 있는 일이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를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는지 아닌지를 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지 않은 위대한 행위보다도 당신 뜻을 따르는 사소한 행위를 더 높이 보시기 때문이다.”
(천상의 책 8-33,3-6)
성모님께서는 루이사가 묵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시고, 루이사가 본 것을 확인해주시고 보태어 주십니다. 성모님의 생애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의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고 성모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생명과 내 음식과 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모습이 생각납니다. 야곱의 우물가에 예수님이 계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계셨죠. 사도들은 늘 그런대로 그때도 배가 고팠습니다. 사도들은 언제나 무엇을 먹을지, 배가 고파서 무엇을 먹을까 그런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 먹을 것을 좀 사오라고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사도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음식이 있다. 너희들이 모르는 음식이 나한테는 있다. 내 음식은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음식이다.”
하느님의 뜻은 진짜 음식입니다. 예수님이 또 다른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하고 똑같았습니다. 성모님의 음식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다른 예가 또 마음에 떠오릅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입니다.
꿀벌들 중에 일벌들은 한 달가량밖에 못삽니다. 여왕벌이 낳는 알들은 일벌과 똑같다고 합니다. 여왕벌이 될 알이나 일벌이 될 알이나 모두 똑같습니다.
여왕벌이 낳은 알들 자체는 다 똑같습니다. 그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 알들이 먹는 음식에 따라서 여왕벌이 되고 일벌이 됩니다. 벌집에 있는 벌들이 여왕벌이 될 알들에게는 특별한 음식을 줍니다. 로열 젤리를 그 알에게 줍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왕벌은 다른 일벌들보다 굉장히 커집니다. 여왕벌이 될 알이 먹은 것이 로열 젤리이기 때문에, 알은 똑같이 생겼는데 먹은 것이 달라서 그렇게 커집니다. 그래서 일벌과 같이 한 달가량을 사는 게 아니라 여왕벌은 7년을 삽니다. 자기 체중보다 몇 천 배나 많은 알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것은 받아먹는 음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보통 먹는 음식, 보통 의지로 먹는 음식과 하느님의 뜻으로 먹는 음식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을 음식으로 먹는 것은 너무나 다릅니다. 하느님의 뜻은 왕들과 여왕들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왕들과 여왕들이 됩니다.
루이사의 글에 이 점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왔을 때 우리 성모님께서는 순명하는 충실한 종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는 여왕들과 왕들에게 둘러싸이실 것입니다. 왕들과 여왕들이 성모님을 둘러쌀 겁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일생 동안 받아먹은 음식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 음식이 온갖 종류의 기적들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적인 기적들이 아니라 신성한 기적들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이 신성한 피앗, 하느님 뜻의 피앗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만드는데 종사하는 사람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그것이다. 매일 맥도날드를 먹는 사람은 맥도날드가 된다.’
그러면 우리가 만약 아주 초월적인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인데,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 뜻 자체로 변화됩니다. 하느님 뜻을 먹으면 하느님 뜻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신적인 효과를 냅니다.
그리고는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끝을 맺으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일치된 사람일수록 더 거룩하다고 불린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다. 더 많이 사랑받으면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삶은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성모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내가 정원에서 죽은 나뭇가지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원하시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또 주님께서 다른 데서 말씀하시기를
“매일 성당에 가서 나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좋다.
그렇게 매일 영성체하는 것은 좋은데, 영성체를 할 만큼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잘 준비된 상태에서 받아먹지 않으면 그 열매는 아주 조금밖에 안될 거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열매가 조금밖에 안 되는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뜻이 주님의 뜻과 가깝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제대로 못 맺고 조금밖에 못 맺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거룩한 성체를 영하면서도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성당에 갈 수 없는 어떤 엄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주님의 뜻을 받아서 주님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 성당에 못 간 그 엄마가 오히려 성당에 갔던 사람들보다 주님 앞에서는 더 거룩하게 성장합니다. 성당에는 갔지만 그 사람들의 뜻이 주님의 뜻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읽고 또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 뜻을 다 알고 있으니까 성당에 갈 필요도 없고, 하느님 뜻만 이루면서 집에 있으면 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 중요하게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의 뜻이 그분의 뜻과 합치하는 것, 그것을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끝을 맺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지 않는 위대한 행위보다 당신 뜻을 따르는 사소한 행위를 더 높이 보시기 때문이다.” 하시고는 가르침을 마치셨습니다.
여기 책이 있습니다. 여기 이 표시 안에 있는 성모님의 심장 바탕에는 ‘피앗’이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태양은 36개의 빛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36권의 책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있는 빛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과 하느님 뜻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이 지니셨던 빛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세 빛깔로 된 묵주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묵주, 피앗 로사리오인데, 흰색, 빨강, 초록색의 세 가지 빛깔로 되어 있습니다. 루이사가 주님과의 신비적인 결혼을 한 그날, 루이사가 받은 세 가지 빛깔의 보석입니다.
1889년 12월 8일
신비적인 결혼의 날에 예수님께서 세 가지 보석을 가진 반지를 당신 심장에서 꺼내셨습니다. 흰색과 빨간색과 초록색, 이 세 가지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를 꺼내셔서 루이사에게 주셨는데, 루이사가 이제 이 세 가지 빛깔의 보석에 대해서 씁니다.
“이 세 돌은 세 위격을 말하고 또 세 향주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루이사의 글에서 그 내용을 가져와서 이 피앗 로사리오 묵상을 하는데, 루이사가 받은 이 선물, 즉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그런 묵상을 합니다.
(통역자) 모르겠어요. 신부님들, 이 세 가지 빛깔로 된 로사리오 묵주가 있습니까?
(이범주 신부님) 있습니다. 전체가 하나는 빨간색, 하나는 흰색, 하나는 하늘색인데 코라토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특별한 묵주에는 특별한 은사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빛을 가지고 있는 샤플레, 한 구미씩 돌아가는 그런 묵주 기도가 있습니다. 카사티 대주교님이 시복 조사에 대해서 닐 롭스타를 해주심으로써 시복 조사가 시작될 수 있도록 해 주셨고, 시복조사가 시작된 지 1년 후에 기도를 허락해주신 묵주입니다. 그리고 은사도 있습니다. 그 묵주기도를 하면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들을 묵상하는 것인데 그 묵상 내용이 루이사의 글에서 뽑아온 것입니다.
피앗 볼룬타스 묵주와 영적 순례 샤플레하고 두 가지가 다 교회의 권위가 인준해 주신 것이니까 사람들에게 하라고 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묵주기도 신비는 다 이 책에서 나온 신비로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한테 자료가 없으면 제가 거기에 대한 조그마한 책자를 두고 가겠습니다.
이 묵주는 카사티 몬시뇰 대주교님의 인준을 받은 것이고, 하느님 뜻 안에서 기도하는 데 굉장히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이니까 아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 장으로 가겠습니다.
18권 2장 1925년 8월 15일 : 모든 조물은 사람을 향해 달려오게 되어 있었다.
하느님 뜻의 축일로 불려야 할 성모 승천 축일.
8 그 후 나는 천상 엄마의 승천 축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애정 깊고 감동적인 어조로 이어서 말씀하셨다.
9 “딸아, 이 축일의 참된 이름은 ‘하느님의 뜻 축일’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뜻은 하늘을 닫고 창조주와의 유대를 끊으며 불행과 고통이 세상에 들어오게 하여,
피조물이 하늘에서 누렸을 축제의 기쁨에 종지부를 찍었다.
10 그런데 ‘만물의 여왕’이신 이 사람은 모든 일 속에서 언제나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했으니 -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이 바로 오직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 그리함으로써 하늘을 열고 영원하신 하느님과 유대를 맺었으므로, 이 사람과 함께 하늘에 축제들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11 이 사람이 지고한 뜻 안에서 행한 각각의 행위마다 그가 하늘에 시작한 축제였다.
그것은 그가 이 축제를 장식하려고 만든 태양들이었고, 천상 예루살렘을 즐겁게 하려고 그가 보낸 아름다운 음악들이었다. 그런즉 이 축제의 진정한 원인은 내 천상 엄마 안에서 활동하며 완성된 하느님의 영원한 뜻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비참함은 다 인간 의지의 결과라고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주 잘 이해해야 됩니다. 인간의 의지는 인간을 구성하는 아주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의 왕이고 여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서,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신비를 가장 잘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후만찬에서도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가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이렇게 인간 의지 때문에 이 세상에 불행이 왔다는 것은 인간 의지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인간 의지가 나쁘게 잘못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는 인간 의지가 이 세상에 그렇게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의지가 하느님 뜻과 합쳐 있을 때는 정말 더 할 수 없이 훌륭하고 굉장한 것입니다.
하느님 뜻의 가르침에서 아주 중요하고 아름다운 면이 또 있는데, 루이사의 글에서는 인간 의지가 그렇게 나쁜 것들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완전히 없애버려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이걸 읽으면 그것은 아주 큰 스캔들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가르쳐주신 것, 또 루이사가 그런 말을 사용한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걸 보면 인간의 의지는 파괴될 수 없습니다. 또 완전히 무(無)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 의지를 가진 채로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갈 겁니다.
인간의 의지 없이는 인간 존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수준으로까지 인간의 의지가 파괴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 의지의 어떤 면이 파괴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의지가 자기 혼자 행동하는 것, 그것은 파괴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면서 행동하는 것, 그런 인간의 의지가 없어져야 됩니다.
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인간 의지, 나쁜 열정과 악덕으로 지배당하는 인간의 의지, 그런 형태의 인간의 의지는 파괴되고 없어져야 됩니다. 무(無)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고 피앗에 순명하고 그렇게 하는 인간의 의지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고 좋은 일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의지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생생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사랑합니다, 순명합니다, 예스라고 자발적으로 말하는 그 인간 의지는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한 다른 측면의 인간 의지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면 안 되고 올바로 이해해야 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우리 인간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 뜻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 뜻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내 인간의 의지가 필요한 삶입니다.
이 36권에서 묘사되는 선물은, 하느님 뜻의 삶이 우리 뜻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 의지가 하느님 뜻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의지가 꼭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의지를 없애려고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 의지가 없어지거나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의지가 하느님 의지와 완전히 하나 되고 일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처럼 인간 의지와 하느님 의지가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가 진짜 여러 가지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면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사의 글을 가르치는 것을 공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못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 루이사의 글을 가르치지 마라, 금지해라.’ 라고 하는 이런 것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진정한 인간인 하느님이라고 설명할 때, 교회의 교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두 가지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Divine Will과 Divine Volition,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Volition으로 살았고 또 아울러 인간의 뜻과 인간의 Volition 두 가지를 가지고 사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이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행한 행위를 신인(神人) 행위라고 가르칩니다.
강생하신 말씀의 행위는 신인(神人) 행위입니다. 그래서 신인(神人) 행위라고 교회가 가르칩니다. 이 모든 루이사의 글들을 가지고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유혹의 하나는, 나 자신의 인간적인 차원을 없애버리든지 무시하는 그런 경향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천사같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 뜻의 글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인간 의지의 위치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 의지는 가질 수 없고 하느님 뜻만 가진다는 이런 잘못된 문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문으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부정하게 되고, 성사도 부정하게 되고, 인간적인 모든 것을 다 부정하게 됩니다. 이건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은 루이사의 글에 있는 것을 잘못 이해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성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론에 도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래 위 전체적인 문맥에 맞춰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동떨어지게 외딴 것만을 읽기 때문입니다.
36권의 글 전체를 전반적으로 올바르게 전체 안에서 봐야 되는데, 그 아래 위 문맥과 연결함이 없이 하나를 떼어서 그것만을 보고, 또 다른 하나를 떼어서 그것만을 보면 그렇게 됩니다. 교회의 생활, 교회의 삶과 교회의 교의 밖에서 이것들을 따로 따로 읽으려고 하면 이런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두 가지 상황 안에서 두 가지 상황이 잘 조화되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이고 또 하나는 이 36권을 따로따로 떼어서 보는 게 아니라 36권 전체를 연결시켜서 전체를 보는 것, 이 두 가지를 잘해야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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