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요한’, 마리아 발또르따 그는 누구? - 인터넷뉴스 신문고 (shinmoongo.net)
[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1] '마리아 발또르따'의 인물과 작품
[번역: 강명준 변호사 편집: 추광규 기자]
예수에 관한 가장 놀라운 이야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물론 나오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여기 펼쳐집니다. 픽션이냐고요? 외경이나 다른 글을 짜깁기한 것이냐고요?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마리아 발또르따를 통해 말하고 보여 준 것입니다. 20세기에요. 그럴리가 있냐고요? 여러분이 읽고 판단하십시오.
출생과 유년
마리아 발또르따는 1897년 3월 14일 이탈리아 카세르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셉은 기병대의 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 이시데 피오라반찌는 프랑스어 교사였다. 마리아는 출생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어머니가 다시 아이를 갖지 못해 무남독녀가 되었다.
마리아가 생후 18개월이 채 못 되었을 때, 가족은 로마냐 지방의 파엔짜로 이사했고, 몇 년 후에는 다시 밀라노로 이사했다. 마리아는 그곳의 비아 만쪼네에 위치한 우르술리네 자매회의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여기서 4살 반의 마리아는 ‘사랑으로 인하여 자발적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처럼 됨으로써 예수님을 위로하려는 갈망’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월, 7세 때 마리아는 비아 벤티 세템브레에 있는 마르셀리네 자매회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마리아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학급에서 1등을 했다. 1905년 5월30일 그 학교에서 거룩한 안드레아 페라리 추기경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는데, 그 때 마리아에게 진정으로 사랑의 성령이 주입되었다.
1907년 9월 아버지의 또 한 번의 전근으로 마리아의 가족은 보게라로 이사했고 거기서 마리아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꽁브 법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망명해온 수도회에서 목요일마다 받았던 프랑스어 수업은 그녀의 영혼을 다시 한 번 ‘하느님과의 교감’에 이르게 하였다.
1908년 10월 첫째 주일날 마리아는 까스뗏지오에서 첫 영성체를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녀가 사랑하는 아버지가 참석하지 않아서 매우 슬퍼하였다. 극히 엄했던 마리아의 어머니가 남편의 참석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몬짜의 기숙학교에서
어머니의 습관적인 횡포한 태도―아버지는 이에 대해 온유한 순종으로 대응하였다―로 인해 마리아는 1909년 3월, 12살의 나이에 강제로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학교는 ‘가장 거룩한 아이 마리아의 사랑의 자매회가 운영하는 몬짜의 아름다운 비앙꼬니 대학이었는데, 마리아는 그곳에서 평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마리아의 ‘관대하고, 확고하고 강하고 충직한’ 성격은 그녀를 ‘발또르띠노’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했다. 마리아는 공부, 질서, 순종에 대한 사랑으로 ‘모범생’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런데도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기술학 과정을 공부하도록 결정했고,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는 그녀는 시험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마리아는 집중적인 공부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였고 ‘늘 성공적으로’ 교과과정을 완수했다.
‘학사력으로 5년, 햇수로 4년의 끔찍했던 세월’을 보낸 후 1913년 2월 그녀가 그 대학을 떠나도록 명령한 것은 역시 마리아의 어머니였다. 마리아는 ‘평화의 둥지’를 떠나야 했다. “고통스러운 미래를 예감한 그녀의 불쌍한 마음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떨었다.”
그 대학에서 마리아가 참석한 마지막 영적 훈련은 까짜니 주교가 실시한 것이었는데 그때부터 마리아는 ‘세상에서 곧 닥쳐올 자신의 모든 삶의 항구한 열매와 그녀의 장래 삶을 위한 프로그램을 얻기를’ 원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마리아의 영혼에 계시하셨으며, 마리아가 ‘하느님이 원하시고, 하느님과 관련하여,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해하도록 하셨다.
피렌체에서
1913년 9월, 발또르따 가족은 피렌체로 이사했다. 이때는 아버지가 건강상 이유로 군대에서 제대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자주 아버지와 함께 피렌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어머니가 항상 제공하는 ‘종교적 무관심에 대한 무료수업’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기 스스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피렌체에서 마리아는 로버트를 만났다. 그는 미남이고 부유했으며 교양이 있었다. 그는 또한 양순하며,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그들은 서로 ‘조용하고 인내하고 존경하는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마리아의 어머니는 그 우정 어린 사랑의 꽃봉오리를 따내도록 강요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9년 후 마리오와의 약혼 시에도 일어났다. 마리오는 ‘착한 남자이자 용감한 장교’가 되기 위해서 보호와 사랑이 필요한, 어머니 없는 매력적인 젊은이였다. 마리아에게 ‘사랑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었으나 그녀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안 후’ 하느님께 가기로 했다.
꿈
1916년 봄 절망과 욕구 사이에서 번민하던 힘든 시기에 주님께서 꿈을 통해 마리아를 당신께 이끌기 위해 돌아오셨는데 그 꿈은 마리아의 일생동안 ‘생생히’ 남게 되었다.
마리아의 문학 작품의 각성상태의 환상(waking vision)들을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복음 환상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속죄와 축복의 손짓과 아울러 훈계와 경건의 말들로 마리아를 도왔는데, 그것이 마리아에게는 ‘자기를 완전히 정화하는 씻김’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무언가에 의해 영혼이 조명되면서” 깨어났다.
사마리아 간호사
하지만 마리아의 세상으로부터의 후퇴는 여전히 멀었다. 1917년 마리아는 ‘사마리아 간호사들’ 진영에 들어갔고 18개월간 피렌체의 군병원에서 ‘연애하거나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받는 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장교들이 아니라 병사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이러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하느님께로 즐겁게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등에 타격받다
마리아가 점진적으로 희생 제물이 되기 시작한 것을 상징하는 사건은 한 무분별한 폭력행위였다. 1920년 3월 17일의 일이었다. 마리아가 어머니와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마리아는 한 젊은 범죄자에게 등을 강타 당했다. 그는 침대에서 뽑아낸 쇠막대기를 들고 마리아를 뒤쫓아 와 온 힘을 다하여 가격했다. 마리아는 그로 인해 3개월간 병상에 눕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앞으로 완전한 불구가 될 전조였다.
레지오 칼라브리아에서
같은 해 10월, 그녀는 부모와 함께 한 호텔의 소유자인 그녀의 사촌들인 벨판티 가의 손님으로서 레지오 칼라브리아에 갔다. 이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마리아의 영혼을 되살아나게 했고 사촌 크로틸데가 소장한 매우 아름다운 책들은 그녀에게 배움의 건강한 욕구에 대해 일시적 휴식을 주었다. 이 때 주님은 그녀에게 또 다른 ‘힘찬 분발’을 주기 위해 한 책을 이용하셨다. ‘안토니오 포가짜로가 쓴 ‘성인(the Saint)’은 마리아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표를 새겨 넣었는데, 그것은 좋은 표였다.
레지오 칼라브리아에서 마리아는 더욱 의식적인 방법으로 확실한 영적 인식을 경험했는데, 그녀는 그전에는 그러한 것들을 ‘예감’이나 다른 ‘기이한 일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레지오에서 그녀가 성 프란시스코와 만나는 체험도 재현되었고, 그것은 그녀 영성의 불변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아아, 슬프게도 레지오에서 마리아는 마리오와 자신의 약혼을 파기하려는 어머니의 계교를 보았다. 1922년 8월 2일 마리아는 피렌체로 돌아왔고, ‘쓰디쓴 기억들’로 인해 짓눌린 채 거기서 2년을 머물렀다.
비아렛지오에서
1924년 9월, 발또르따 가족은 비아렛지오로 이사했고 거기서 10월 23일 새로 구입한 ‘작은 집’에 정착했다.
여기서 ‘가끔 해변과 소나무 숲에서 짧은 시간 동안 산책하는 것’과 '어머니의 벼락같은 위협을 유발하지 않고 가장 거룩한 성사 안에서 예수님을 방문하는 것’을 그녀에게 허용한 ‘매일 쇼핑’을 제외하고는, 마리아는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그녀의 생애에서 새롭고 다른 기간’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그 기간 동안 하느님 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숙해갔다.’
사랑의 봉헌
마리아가 단숨에 읽은 아기 예수의 성녀 테레사의 ‘자서전’의 예에 매혹되어 마리아는 자신을 자비로운 사랑의 희생자로 봉헌했다.(1925년 1월 28일) 그 후 매일 이 봉헌행위를 경신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비상하게 고양되었고, 그녀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기까지 했다.
사도직에 대한 동경
주님께 봉사하려는 염원에 고취되어, 마리아는 성 바오로수도회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활동보다 고난을 통해 양육되어 오로지 하나님께만 알려진 겸손하고 감추어진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1929년 9월에 청년 문화사절로 가톨릭 액션에 받아들여졌을 때 수많은 청중, 특히 가톨릭 냉담자들 중에서도 점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모임들을 조직하면서 열성적인 활동을 신속히 수행하였다.
정의에 대한 헌신과 완전한 신체장애
한편 마리아는 ‘더욱 순결하고 희생적인 삶’을 준비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희생으로도 봉헌하려는 결심이 무르익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적, 영적인 고통은 갈수록 커져갔으나, 1931년 7월 1일 봉헌을 갱신하면서 마리아는 순결, 가난, 복종의 맹세를 선언하였다.
1933년 1월 4일은 마리아가 극심한 피로 속에서 일망정 자기 집을 걸어서 떠날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1934년 4월 1일 마리아는 더 이상 자기 침상을 떠날 수 없었고, 그것은 ‘사랑의 강렬한 탈혼 속에서의 길고 활동적인 신체장애’의 시작이었다. 마리아의 사명은 ‘고통 받고, 속죄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마르타 디코티는 1935년 5월 24일 발또르따 가족에 들어왔다. 그녀는 마리아의 충실한 동반자이자 그녀의 글의 ‘듣는 이’ 로서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즐겁게 그녀를 돕고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친구가 항상 함께 있으면서 주는 위로를 받기 시작한 날로부터 한 달 남짓 후인 6월 30일 마리아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에 대한 모든 공격을 용서하고 악을 선으로 갚으며 자기를 그릇 판단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고통을 극복하면서, 인내와 온순함과 사랑으로써 항상 자기의 의무를 다해 왔다.”
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에 아버지를 도울 수 없었고 죽음 후에 아버지의 시신도 볼 수 없었던 고통은 마리아를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뒤늦은 사랑의 어리석은 장면들”을 연출한 후 더욱 무정하고 횡포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자기가 독재적인 여자임을 발견한 것으로 인해 내친 김에 더욱 그 길로 가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병상에서 고통 받고 사랑하기를 계속했다. 하느님의 뜻을 더욱 의지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위로하고, 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바로잡아주고, 시대의 중대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고를 받으며, 그녀의 성격의 강건한 힘과 하느님께 고정된 마음의 명확한 지성을 항상 드러냈다.
밀리오리니 신부와 최초의 원고
마리아가 한 경건한 선교사 사제의 방문을 받은 것은 1942년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종복회 회원인 로무알도 M. 밀리오리니 신부는 4년간 마리아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1943년 신부의 요청으로, 마리아는 자기 영혼의 모든 좋은 것과 모든 나쁜 것을 진실하게 보여주는 것을 허락받는 것을 조건으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근면하고, 지적이고, 재능이 있는 마리아는 모든 것에 관심이 끌렸다. 질병마저도 마리아가 일하고 글을 쓰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복합적인 적성, 특히 여성적인 적성에 마리아는 타고난 작가로서의 재능을 추가했다. 마리아는 이러한 자기의 탁월한 능력을, 그녀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사랑한 하느님의 완전한 섭리에 맡겼다.
초자연적인 충동에 자극되어같은 해 1943년 4월 23일 성금요일에 그녀는 그 ‘자서전’을 완성한 후에 ‘구술 받아 적기’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
몇 달 후인 10월 4일, 딸의 숭고한 사업을 알지 못한 채, 마리아의 어머니가 죽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의 냉혹함까지도 지치게 하거나 약화시킬 수 없는 사랑으로 어머니를 사랑했다.” 이제 집에는 마리아와 마르타만 남았다.
신비 작가
마리아의 작가로서의 활동은 1943년부터 1947년까지 극점에 이르렀고, 1953년까지 점진적으로 약화되면서 계속했다. 그 시기로 인해 마리아는 무엇보다도 전시에 매우 어려운 조건하에서 글을 썼는데, 이 악조건에는 1944년 4월 24일에 그녀가 콤피토 성 안드레(루카 지방 카판노리 자치구의 지역)에 이동해야 하는 피난이 포함된다. 그녀는 같은 해 12월 23일 비아렛지오의 그리운 집에 돌아왔다.
마리아는 침대에서 거의 앉은 자세로 자기의 구부린 무릎 위에 올려놓은 판지를 받침으로 하여 통상적인 학교 공책에 글을 썼다. 그녀는 밤이나 낮이나 어느 때든, 피로나 고문하는 것 같은 고통으로 완전히 지쳤을 때에도 글을 쓰곤 했다. 마리아는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수정하지 않고 글을 썼다. 방해를 받으면 글 쓰는 것을 중단했다가 나중에 쉽게 다시 글쓰기를 계속했다. 마리아는 성경과 교황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서를 제외하고는 책들에서 정보를 구하지 않았다.
마리아의 작가로서의 사명은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는데, 그들의 삶과 걱정에 대해 비추임 받은 조언으로, 필요하다면 비밀리에 영웅적인 희생으로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기적적으로 해결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마리아는 자기가 사랑한 조국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고, 1948년 4월 18일 선거일에는 투표소에 앰뷸런스로 수송되어갈 정도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작업, 살아있는 지속적인 기도, 구속자들(redeemers)의 기쁨으로 포옹된 고통 중에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열렬하게 참여하는 자기의 외부적 표지들을 개선해주시지 않기를 빌었는데, 그리스도는 ‘환상’의 풍부함과 ‘구술’의 깊음 속에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그녀를 충성된 ‘대변인’과 ‘펜’으로 사용하셨다.
작품
마리아 발또르따에 의해 쓰여진 공책은 거의 15,000쪽에 이른다. 이 놀라운 문학작품의 3분의 2에 약간 못 미치는 부분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 기념비적인 작품(사람―하느님의 시)과 관련된다. 보다 적은 부분은 성경본문에 관한 대규모 주석, 교리강의,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순교자들의 역사 및 경건한 문학을 포함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과 심지어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가 알지 못하고 쓰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발또르따는 선언한다.
그녀가 자신이 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고도로 영감 받은 작품 외에도, 마리아 발또르따는 자기의 강한 인간적인 개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서신과 흥미 있는 자서전적인 작품들을 우리에게 남겼는데, 이들은 모두의 선을 위해 하느님에 대한 영웅적이고 거룩한 봉사로 자발적으로 봉헌된 것이다.
지성의 봉헌
1949년 4월 18일, 마리아는 그 작품에 대한 교회의 승인을 보지 못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드렸고, 자신의 지성이라는 귀중한 선물도 그 희생에 덧붙였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셨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작품이 ‘봉쇄된 것을’ 본 후 그녀는 아마 1956년에 시작된 일종의 심리적 고립 속으로 점진적으로 철수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이러한 상태의 첫 징후 중 하나는 그녀의 개인서신에서의 대문자의 과다 사용이었다. 그 후 성스러운 카드와 그녀가 입수한 어떤 종이 위에나 “예수님, 나는 당신께 고백합니다”와 같은 절규들을 채워 쓰는 집착증이 뒤따랐다. 그녀는 때때로 자기가 받은 보속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계산하였다.
마리아는 글쓰기, 작업, 기도를 하였지만, 침대에서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결국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끝나게 되었다. 그녀는 대화에서 틀리게 대답하기 시작했고, 때때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유쾌한 재치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녀는 점진적으로 말을 적게 하였고, 인사말이나 그녀에게 말해진 문구의 마지막 단어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정도에 이르러 대화를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시시때때로 그녀는 “저기 있는 태양은 어쩌면 저렇게 밝을까!”라고 고함치거나 부르짖고는 했다.
그래도 그녀의 눈은 항상 맑았고, 태도는 차분했다. 그녀는 결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어린이처럼 먹었다. 그녀의 글에 대한 심각한 상황으로 인해 조사받을 때는, 그녀는 마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빠져나온 것처럼 간단하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죽음과 매장
1961년 9월 16일,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마리아는 구급차로 피사로 후송되어 마리아 돌로로사 종복회 진료소에 입원하여 월말까지 머물렀다.
회복의 징후가 없자, 마리아는 비아렛지오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돌려보내졌고 거기서 65세이자 신체장애자가 된지 28년째인 1961년 10월 12일 오전 10시 35분에 운명했다. 마리아 종복회 제3회 지도신부인 인노첸쪼 로베티 신부가 그녀의 임종을 돕기 위해 보내졌다. 그녀는 이 수도회 제3회 및 프란시스코 수도회 제3회에 속했었다. 그 사제는 “프로피시세레, 아니마 크리스티아나, 데 혹 문도(오, 그리스도인의 영혼이여, 이 세상에서 떠나라)”라고 낭송했고, 바로 그 순간 마리아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마리아의 마지막 순종의 행위로 보였다.
1944년 한 원고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안다.
“네가 나의 세상에 영원히 있게 될 것과, 마치 어린이가 자기 어머니를 꿈꾸다가 깨어서 어머니가 자기를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환상에서 현실로 넘어오면서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비참한 세상에서 떠나올 것을 네가 알게 된다면 너는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너에게 그렇게 해 주겠다.”
마리아의 시신은 불구의 몸을 가진 저자의 고통, 근면한 활동, 봉헌의 행위들, 경건한 죽음을 증언하였던 그녀 자신의 방의 바로 그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리아는 자기의 장례복식으로 자기 머리를 덮게 될 세례 면사포와 자기 묘비명이 될 구절 “나는 고통당하기를 끝냈으나 사랑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를 여러 해 전에 선택했다. 극소수의 엄숙한 방문자들이 그녀의 왼손은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오른손(‘주님의 펜’으로 정의된 바 있는)은 밝음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아의 책상으로 봉사한 그녀의 무릎은 그녀가 영면 속에 안치되어 있는 당시에도 그녀의 흰 드레스 아래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굽어져 있었다.
장례식은 10월 14일 이른 아침에 그녀가 전에 부탁한 대로 매우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성 파올리노 교구에서의 장례예절에 뒤이어 그녀의 시신이 매장이 거행된 자비 묘지까지 소규모의 자동차 행렬이 고인을 동행했다.
유해의 발굴과 특별 취급된 유해 안치
10년 후인 1971년 10월 12일, 그녀의 유골 잔해들은 땅에서 발굴되어 가족 납골묘에 소장되었다. 그러나 1973년 7월 2일 당국 및 교회의 허가를 받아 유골 잔해들은 비아렛지오에서 피렌체로 옮겨져 지극히 거룩한 성모영보 성당의 대 회랑에 있는 참사회원 채플의 무덤에 매장되었는데, 마리아 발또르따의 묘는 지금도 공경되고 있다.
원고의 보급
마리아 발또르따의 작품의 초판들은 그녀 생애의 마지막 수년 동안 그녀의 이름의 표시 없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광고 없이 단지 사람들을 더 좋게 변화시키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진리와 사랑의 메시지의 충격으로 이탈리아는 물론 해외 심지어 멀리 떨어진 지역에도 신속히 보급되어 전 세계에서 광범한 환영을 받았다.
1943년 8월 23일의 ‘구술’에서 우리는 저자에게 말씀하신 예수의 다음 말씀을 발견한다.
“나의 선물을 이용하려면 좋은 감각이 필요하다. 공개된 요란한 전파가 아니라 느리고 점진적으로 점점 널리 그리고 이름 없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대 안에서 네 손이 평화 안에서 멈출 때, 그때, 오직 그때 너의 이름이 드러날 것이다.”
“사람―하느님의 시”
작품의 주요한 부분은 예수님의 위대한 생애이고, 그 서술은 성 마리아의 탄생과 유년시절에서 천국으로의 몽소승천(蒙召昇天, assumption)까지 연장된다.
‘작은 요한에게 계시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발또르따 식 저술에서 정의된 그 작품은 초판에 선호된 ‘예수의 시’라는 더 간단한 제목을 받았다. 후에 편집자는 그 제목이 여러 곳에 이미 발간된 작은 분량의 시집에 이미 사용되었으므로 개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그 제목을 ‘사람―하느님의 시’로 개정하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책이 ‘복음서’를 대체하거나 변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생시키면서 오히려 복음서를 해설하고 통합하고 조명하기에, 그것은 하나의 ‘복음’이다.
그것은 ‘작은 요한’이라고 불리는 마리아 발또르따에게 ‘계시’되었는데, ‘요한’이란 말은 사랑받은 제자인 그 복음사가 가까이그녀를 위치시키기 위해, ‘작은’ 이란 말은 비록 그녀의 작품이 방대하지만, 짧은 원고 안에 요점을 담은 그 복음서 저자의 작품에 대한 그녀의 작품의 의존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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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작은 요한’, 마리아 발또르따 그는 누구? - 신문고뉴스 - 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11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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