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14, 15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24

 

 

 

 

 

                   다음 노래의 설명

 

     1. 영혼의 상징인 이 작은 비둘기는 지금까지 보여주었음 같이 사랑의 고뇌와 초조의 홍수 위를 사랑의 바람 부는 대로 나르고 어디에도 머물 곳을 찾지 못했는데 앞서 말한 마지막 날을 때 정 많은 아버지 노아는 그 자애의 손을 뻗치어 그를 잡고 따스한 방주 안에 들여보내 주었다. 이것은 바로 전에 설명한 노래 안에 “돌아 오라 비둘기야”라고 했을 때를 말한다. 이 새로운 숨을 곳에서 자기가 원했던 온갖 것을 더구나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 발견한 영혼은 그 애인의 찬미를 노래하기 시작하여 그분과의 일치에서 느끼고 또한 즐기는 엄청난 일들을 다음 두 노래 안에서 말한다.

 

 

 

                                  제 14, 15 노래

 

                                 신부

                    내 님은 뫼뿌리들

                    외딸고 숲 우거진 골짜구니들

                    묘하디 묘한 섬들과 섬

                    소리내며 흐르는 시냇물들

                    사랑을 싣고 오는 휘파람 소리

 

                    이슥 조용한 밤

                    동녘 새벽의 어름

                    잔잔한 음악

                    소리 있는 맑은 고요

                    즐거웁고 황홀스런 저녁잔치

 

 

          해 설

 

     2. 다음 두 노래의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노래와 또한 이어지는 노래를 잘 이해하기 위해 다음 것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방금 말한 영혼의 날음에는 매우 높은 단계와 사랑의 일치가 드러나 있으며 하느님은 흔히 많은 영적 수업을 쌓은 영혼만을 거기에 올려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과의 영적 혼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때에 말하자면 그 시초에 하느님은 영혼에게 당신의 관해서 위대한 빛을 전해 주시고 당신의 위대함과 영광에 참여함으로써 꾸미시고 은혜나 덕을 선물하시어 하느님께 관한 지식이나 하느님께 대한 공경과 두려움으로 부유케 하고 흡사 약혼 날의 젊은 처녀에게처럼 꾸며 주신다. 이 복된 날을 맞이하여 영혼은 여태껏 경험한 심한 고뇌가 끝났음을 알고 그 사랑의 신음을 그친다. 뿐만 아니라 영혼은 부유하게 되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단맛으로 가득 넘치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이어지는 노래를 보면 안다. 거기에서는 영혼은 오직 애인의 갖가지 위대함을 이야기하고 노래 할 뿐이다. 더구나 이 위대함은 앞에 기록한 약혼의 일치를 통해 애인 안에서 알고 또한 즐긴다. 그래서 앞으로 이어질 노래에서는 전처럼 조바심이나 고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애인과 영혼 사이에 달콤하고 안온한 사랑의 교환 사랑의 삶만을 말하고 있다. 다른 것은 모두 끝난 까닭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 두 노래 가운데서 이 시기에 있는 영혼에게 보통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뚜렷한 은혜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에 이른 모든 영혼이 여기서 말하는 온갖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거나 같은 방식으로 받고 또는 그들 모두가 같은 정도의 영적 지식이나 감각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누구는 많이 또 누구에게는 적게 주시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주실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나 위에서 말한 영적 약혼 상태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 경지에서 있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다른 모든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노래의 해설

 

     3. 성서의 말씀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 안에는 여러 종류의 동물을 싣기 위해서 수많은 방과 이 동물들에게 먹일 온갖 먹거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영이 날음으로 하느님의 품인 방주까지 올라간 영혼도 성 요한을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데가 많음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물 즉 영혼이 맛볼 수 있게 준비된 음식 곧 하느님의 온갖 위대한 속성을 보고 또한 알 것이다. 위에 말한 두 노래 안에 포함 된 많은 비유적 언어가 상징한 것은 바로 이 신적 속성들이어서 그 뜻은 대강 다음과 같다.

 

     4. 영혼은 이 신적 일치 안에서 헤아릴 길 없는 귀중하고도 넘치 듯한 부요함을 바라보고 소유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쉼과 즐거움을 발견한다. 영혼은 하느님의 비밀과 그 신기한 지식을 깨치는 빛을 받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최상의 음식에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스러운 음식이다. 영혼은 하느님 안에 다른 일체의 권능이나 힘을 초월하는 엄청난 힘을 느끼고 동시에 거기에 감탄할 만한 감미와 영의 기쁨을 맛보고 참 쉼과 신적 빛을 발견한다. 또한 온갖 피조물이나 하느님 손수 이루신 업적의 조화 가운데 빛나는 하느님의 지혜를 매우 높은 방법으로 맛본다. 영혼은 자기가 모든 선으로 충족되어 있어 온갖 악에서 온전히 해방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혼은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사랑의 양식(糧食)을 알고 또한 맛보는데 이것이 영혼을 사랑 안에서 확고부동하게 한다. 이상이 앞서 기록한 두 노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5. 이 두 노래 안에서 신부는 위에 말한 모든 것은 애인 자신이라 하고 또한 신부 자신에게도 신랑이 전부라고 한다. 사실 영혼은 이러한 탈혼 중에 이루어지는 교류에서 “내 하느님, 내 전부여”라고 하신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참으로 체험한다. 하느님은 영혼에게는 전부이시고 또한 모든 것이 포함된 선이시다. 그러므로 이 탈혼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교류는 이 노래 가운데서 말하는 피조물의 우수성에서 인용된 비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 노래들을 한 구절 씩 따로따로 설명하겠다. 우선 명심해야 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의 우수성은 하느님을 통해서 뛰어난 방법으로 무한히 발견된다기보다 오히려 그 우수성 하나하나는 하느님이시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모든 것도 또한 하느님이시라고 하는 편이 더 좋으리라. 영혼은 하느님께 일치하면서 하느님이 전부임을 체험한다. 그것은 성 요한이 말함과 같이 “만들어진 것은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한 1. 4) 그러나 여기서 영혼이 체험한다는 것을 영혼이 빛 속에서 본다든가 또는 하느님 안에서 피조물을 본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일치를 통해서 영혼은 하느님이 자신에게 전부시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말한 대로 이토록 숭고한 하느님과 체험을 했다고 해서 영혼이 하느님을 본체적으로 뚜렷이 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는 않고 그것은 세차고 풍요로운 교류 하느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틈새로 보여주는 빛이어서 그것을 통해 영혼은 피조물이 갖고 있는 우수성마저도 느낀다. 그것을 노래의 구절 따라 설명하겠다.

 

 

 

 

          내 님은 뫼뿌리들

 

     6. 산들은 높고 풍요로우며 넓고 아름답고 우아하여 꽃들이 만발하여 향기로운 내음으로 가득하다. 내게는 내 애인은 이러한 산들이다.

 

 

 

          외딸고 숲 우거진 골짜구니들

 

     7. 인기척 없는 골짜구니는 고요하고 상쾌하고 서늘한 나무그늘로 뒤덮혀 있다.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고 그곳에 돋아난 갖가지 식물이나 새들의 다정한 노랫소리로 사람들의 감각을 반하게 하고 즐기게 한다. 또한 그 정적과 침묵으로 싱그러움과 쉼을 준다. 내 애인은 내게는 이러한 골짜구니다.

 

 

 

          묘하디 묘한 섬들과 섬

 

     8. 묘하디 묘한 섬들은 바다에 에워싸여 바다 저편에 있으므로 인간들과 교류하기는 매우 동떨어져서 온전히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섬들에서 나는 산물은 우리 땅의 것과 무척 다르다. 그것들은 보기에도 다르고 우리가 전연 모르는 특성을 갖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한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일반인식을 훨씬 뛰어 넘은 위대한 감탄할 만한 새로운 것이나 신기한 지식 때문에 영혼은 하느님을 묘하디 묘한 섬들이라고 한다. 사람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산다든가 또는 그 행적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고 이채를 풍기고 있을 경우이다. 이 두 이유 때문에 영혼은 하느님을 “묘하디 묘한”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낯선 섬들에게 있는 온갖 묘한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길도 의견도 행위도, 인간에게는 무척 신기하고 새롭고 놀랍고 감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본 일이 없는 인간에게 하느님은 “묘한” 분이라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하느님을 직관하는 천사들이나 천국의 영혼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들도 하느님을 완전히 볼 수 없고 또한 영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심판 날까지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의 업적에 관련된 매우 깊은 판정하심 안에 너무도 많은 새로운 묘함을 발견하게 되어 그들의 놀라움과 찬탄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또한 하느님을 “묘하디 묘한 섬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느님은 다만 당신에게만 묘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소리내며 흐르는 시냇물들

 

     9. 시냇물은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시냇물은 만나는 모든 것을 적셔주고 가라앉힌다. 둘째로 자신 앞에 있는 모든 낮은 땅과 공허를 채워 준다. 셋째로 다름 모든 것의 음향을 덮어버려 들리지 않게 할 만큼 높은 소리를 낸다. 지금 문제가 되어 있는 하느님과의 통교에서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위의 세 가지 특성을 매우 상쾌하게 맛본다. 그 때문에 영혼은 하느님의 영의 급류(急流)에 휩쓸려 믿기 어려울 만큼 세찬 힘으로 자신을 사로잡음을 느낀다. 흡사 자기 위에 온 세계의 모든 강이 덤벼들어 가라앉힐 듯이 여겨진다. 그리고 이 강은 영혼이 전에 한 행위나 욕정 모두를 삼켜버린 듯이 느낀다. 성령의 이 역사하심은 매우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영혼에게 아무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강들은 평안한 강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영혼이 이토록 점유되어 있음에 관해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나 이제 평화의 강물처럼 영혼에게 끌어들이리라 평화를 개울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영광의 급류처럼 부어 주리라.”(66, 12) 이처럼 소리도 드높이 흐르는 강물과 같은 하느님의 강림은 영혼 안에 오시어 영혼을 평화와 영광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영혼이 느끼는 두 번째 특성은 이 때에 신적 물이 영혼의 겸손의 낮은 골짜기와 욕구의 공허를 채워 주신다. 그것은 성 루가가 복음서에 “비천한 이들을 들어올리셨으며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셨다.”( 1, 52)고 하신 대로이다.

     영혼이 애인의 울리는 높은 강물 소리에 관해 느끼는 셋째 특성이란 다른 모든 소리나 음을 덮는 하나의 소리, 곧 영적 음성을 듣는 것이고 이 음성은 다른 모든 음성을 덮는다. 이 음성은 온 세계의 모든 소리를 능가한다. 지금 여기서 잠시 멈추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도록 하자.

 

     10. 영혼이 여기서 말하는 이 음성, 이 강물의 울림이란 영혼을 온갖 선으로 채워 주시는 넘칠 듯한 충만함이고 영혼을 점유하는 저항키 어려운 힘이다. 이것을 강물 소리에 비교한 것은 충분하다 곤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무서운 우룃소리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영적 소리이고 물체적인 음향 같지 않고 흔히 세찬 음향으로 주는 고통이나 불쾌함은 없다. 그것은 다만 위엄과 힘과 기쁨과 영광에 넘쳐 있다. 이는 온전히 내적 위대한 음성 울려 퍼지는 소리이어서 영혼을 힘과 용기로 감싸준다. 이 영적 소리는 사도행전 2장2절에 기록 된 것처럼 성령이 사도들 위에 세찬 물살처럼 내려오셨을 때 그들 영 안에 울린 소리이다.

     그들의 내부에서 울린 이 영적 소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것은 큰 회오리 바람과 같은 소리로 바깥을 울리어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 외적 음향은 그 때 사도들에게 입혀 준 앞서 기록한 힘과 용기가 충만했던 상징이다. 또한 성 요한(12, 28)이 기록한 대로 주 예수님께서 반대자들한테서 받으신 박해와 고민 가운데서도 성부께 기도하셨을 때 주님의 인성을 굳세게 하기 위해 하나의 내적 음성이 하늘에서 울려 왔다. 이 음성은 매우 장중하고 강렬한 음향으로 바깥에 들렸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 가운데의 어떤 이는 뇌성이 울렸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천사가 하늘 높은 데서 예수님께 말했다고 했다. 외부에서 들린 이 소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내적으로 입혀진 용기와 힘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혼은 그 영 안에서 이 영적 음성과 울림을 받지 않았다고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유의 할 점은 영적 음성의 울림이란 이 음성이 영혼 안에 일으키는 효과라고 알아들어야 하며 마치 육신의 음성이 귀에 울려 그 뜻한 바를 마치 육신의 음성이 귀에 울려 그 뜻한 바를 영 안에 새기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다윗이 말한 “주님은 그 우렁찬 소리를 들려 주시나니”(시편 67, 34)라는 뜻과 같다. 그리고 우렁찬 소리란 내적 음성을 뜻한다. “주님은 그 우렁찬 소리를 들려주신다.”라고 하시면서 다윗은 하느님이 바깥에 들리는 외부 소리에다 내적으로 들릴 힘찬 음성을 합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이것으로써 하느님은 무한한 음성이고 위에 말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영혼과 통교하실 때는 큰 음성과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1. 묵시록에서 성 요한은 이 음성을 듣고 자신이 들은 음성은 대단한 물소리와도 같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았다.(묵시 14, 2)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음성은 강렬하기에 듣기에 어렵고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곧 이어서 그 소리는 마치 수금을 타는 이들이 자기 수금을 타며 내는 소리와도 같았다고 덧부쳤다. 에제키엘도 또한 “큰 물소리 같았고 전능하신 분의 음성 같았다.”(에제 1, 24)고 했다. 이 뜻은 하느님의 이 음성을 통해서 지극히 숭고하게 더없이 상쾌하게 영혼과 통교하신다는 것이다. 이 음성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앞서 기록된 것과 같이 영혼 안에서 이 음성을 울려 주시면서 통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음성을 영혼 하나하나에 맞갖은 강도를 조절하시면서 그들 각자에게 당신을 순응시키시므로 영혼은 큰 기쁨과 영광으로 채워진다. 그러기에 아가의 신랑은 신부를 향해 “네 목소리 나에게 들려다오 부드러운 그 소리”라고 했다.

 

 

 

          사랑을 싣고 오는 휘파람 소리

          (일어 : 사랑의 산들바람의 속삭임)

 

     12. 이 시구에서 영혼은 두 가지를 말한다. 곧 산들바람과 속삭임이다. 사랑의 산들바람이란 애인의 덕과 아름다움이고 이것들은 하늘의 신랑과의 일치를 통해 영혼에게 들어오고 사랑 깊이 이것과 통교하면서 영혼의 실체에 대인다. 이 산들바람의 속삭임이란 하느님과 하느님의 완덕에 대한 매우 상쾌한 인식이다. 이 인식은 하느님의 완덕이 영혼의 실체에 맞대임에서 생기고 지성 안에 넘쳐 들어가는 것이다 일치 상태에서 영혼이 맛보는 온갖 기쁨 가운데서 이것은 최고의 기쁨이다.

 

     13. 이 사정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것을 유의하기 바란다. 산들바람 안에 두 가지를 구별 할 수 있다. 곧 접촉과 속삭임이다. 이와 같이 신랑과의 이 통교는 기쁨과 이해가 동시에 생긴다. 산들바람은 촉각에 대이고 그와 동시에 그 속삭임은 청각에 들어오는데 이렇게 애인의 완덕에 접촉함은 영혼 실체에 있는 촉각으로 느끼고 맛본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덕의 이해는 영혼의 청각 곧 지성으로 감지된다. 그리고 다음 것도 알아두기 바란다.

     사랑의 산들바람이 올 때 그것은 기분 좋게 촉각에 맞대여 이토록 위로를 바란 이의 요구를 채워주실 때이다. 사실 그때야말로 촉각은 기뻐하고 즐긴다. 이와 동시에 청각도 산들바람의 속삭임을 듣고 무척 기뻐하고 즐긴다. 그리고 이 청각의 즐거움은 산들바람에 대일 때의 촉각의 즐거움보다 더욱 더하다. 왜냐하면 청각은 촉각보다 더욱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청각은 영적 것과 더욱 많은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각으로 오는 즐거움은 촉각으로 오는 즐거움보다 더욱 영적이다.

 

     14. 하느님과의 접촉은 이토록 신적 일치에 다다르려고 갈망한 영혼의 욕구를 상쾌하게 채워주시면서 영혼의 실체를 매우 만족하게 해주시고 즐겁게 해주신다. 영혼은 이 일치 또는 접촉을 사랑의 산들바람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애인의 온갖 덕을 사랑스럽고 감미롭게 영혼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성 안에 인식의 “속삭임”이 이루어진다. 이 인식을 속삭임이라고 하는데 마치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귀청을 울리는 것처럼 이 미묘하고 예민한 인식은 무척 멋있고 상쾌하게 영혼의 실체에 깊숙이 들어온다. 이것은 다른 온갖 기쁨을 훨씬 넘는 희열이다. 그 이유는 온갖 우유성(偶有性)이나 영상을 벗어버린 순수 실체적 인식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 인식은 철학자들이 수동적 혹은 가능적 지성이라고 하는 것에 주신다. 따라서 지성은 아무런 협력도 없이 수동적으로 이것을 받는다. 이는 영혼에게는 최고의 기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에 이루어지는 일이어서 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최고의 희열 말하자면 하느님을 뵙는 것은 지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미풍의 속삭임은 앞서 말했듯이 실체적 인식을 뜻하기에 신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우리 성조 엘리야는 호렙 산 위의 동굴 어귀에서 느낀 조용하고 여린 소리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서는 조용하고 여린 소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미묘하고 예민한 영적 전달은 예언자의 지성 속에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영혼은 여기서 이 인식을 사랑의 산들바람의 속삭임이라고 한다. 그것은 이 인식은 애인의 온갖 덕으로 가득한 사랑의 전달로 지성에 넘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랑의 산들바람의 속삭임 소리라고 부른다.

 

 

     15. 영혼의 귀에 들리는 이 신적 속삭임은 앞서 말했듯이 실체적 인식 일뿐 아니라 신성에 관한 진리를 밝혀줌과 숨겨진 하느님의 비밀의 계시이기도 하다. 청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신적 전달이 성서에 나오는 경우 그것은 보통으로 이런 적나한 진리가 지성에 밝혀 드러나고 또는 신적 비밀이 계시된다. 말하자면 감각의 중개 없이 전달된 순수한 영적 시현이나 계시이다. 그 때문에 감각을 통해 하느님한테서 전해졌다는 것은 매우 숭고하고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 바울로는 자기가 받은 계시의 숭고함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2고린 12, 4)하였다. 이것에서 엘리야가 조용하고 여린 소리 가운데 하느님을 본 것과 같이 바울로도 또한 하느님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앙은 육신의 청각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신앙이 가르치는 것, 즉 실체적 인식도 또한 영적 청각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다. 예언자 욥도 이것을 우리에게 밝혀 준다. 하느님이 욥에게 당신을 드러내셨을 때 그는 하느님께 “당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 5)고 했다. 이제 우리는 영혼의 귀로들은 것과 앞서 설명한 수동적 지성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같음을 뚜렷이 알 수 있다. 따라서 욥은 내 귀로 들었다고 할 때 귀라는 어휘를 복수로 하지 않고 단수로 했고 내 눈으로 당신을 보았다고 할 때도 눈이라는 어휘를 단수로 했으며 지성의 눈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때문에 영혼이 듣는다는 것은 지성으로 본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16. 그런데 영혼의 인식은 이미 말했듯이 적나한 실체라고 하지만 이것이 천국에서처럼 완전히 밝은 기쁨이라고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이 인식은 비록 우유성에서 벗어났다곤 하지만 분명하지도 않고 오히려 어둡다. 그것은 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상은 성 디오니시오의 말에 따르면 이 지상에서는 암흑의 광선이다. 그러나 관상은 영광스런 기쁨의 자리가 될 지성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내세의 기쁨의 상징인 그 한 줄기의 광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혼이 여기서 “속삭임” 이라고 하는 이 실체적 인식은 앞서 영혼이 뜨겁게 소원하는 이 실체적 인식은 앞서 영혼이 뜨겁게 소원한 눈인데도 그것을 보여줄 때 감각은 그것을 견디다 못해 “사랑하는 이여, 저것들을 치워주소서” 라고 외치지 않고는 못배겼던 저 눈과 같은 것이다.

 

     17. 그런데 욥기 안에 내가 황홀이나 영적 혼인에 관해서 말한 것이 대부분 증명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적용하기에 매우 적절한 때라고 생각된다. 그 때문에 시구 설명은 잠시 멈추고 내가 이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우리가 다루는 문제에 관련된 부분을 설명하려고 한다. 나는 우선 그 전부를 라틴어로 기록하고 다음에 통속어로 쓴 뒤에 우리 문제에 적절한 곳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그것이 끝난 다음, 다음 시구를 설명하겠다. (역자 주 : 라틴어 생략)

데만 사람 엘리바즈가 욥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만히 알려 주는 말이 있었는데 내 귀는 훔치듯 그 속삭임의 가느다란 음성을 들었다.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질 무렵 밤의 환상의 무서움으로 공포와 떨림이 나를 덮쳐 내 뼈마디가 온통 떨리고 있는데 바람이 한바탕 내 앞을 지날 때 온 몸에 소름이 끼쳤네 그 때 내 눈앞에 누가 우뚝 서는데 나는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다음에 나는 마치 산들바람 같은 음성을 들었다네”(욥 4, 12-16)

     위의 구절은 제 13 의 노래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눈을 치워 주소서” 한 뒤 이제까지 우리가 황홀에 관해 말한 대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데만 사람 엘리바즈가 가만히 알려 주는 말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에게 전달된 저 신비적 지식 애인을 향해 그것들을 멀리해주소서 라고 간청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압박적인 위대한 지식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18. 또한 엘리바즈가 자기 ‘귀가 훔친 듯 들었다’ 고 한 음성이란 영혼의 지성이 받는 이미 말한 적나한 실체이다. 말하자면 가느다란 음성은 여기서는 내적 실체를 말하고 속삭임이라 함은 하느님의 완덕과의 통교와 접촉을 뜻한다. 그리고 이 접촉에서 위에 말한 실체적 인식이 지성에 전달된다. 속삭임이라 함은 이러한 통교가 상쾌하기 때문에 영혼은 이 통교를 사랑의 산들바람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의 교류이기 때문이다.

     엘리바즈는 이 속삭임을 훔치듯 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훔친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인 것처럼 이 신비적 지식도 자연적으로는 인간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것을 받을 때 자기 본성으로는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을 받는다. 그러므로 성 바울로도 자기에게 보여 준 신비에 관해 권리를 못 가졌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예언자도 “내 비밀은 나의 것이다.”(이사 24, 16)라고 두 번이나 되풀이했다. 다음에 엘리바즈가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질 무렵 밤의 환상의 무서움으로 공포와 떨림이 나를 덮쳐”라고 하는데 이것은 탈혼 중에 받는 하느님과의 통교가 필연적으로 영혼에게 일으키는 공포와 떨림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위에 말했듯이 천성은 하느님의 영과의 통교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여기서 사람이 잠에 빠질 무렵 공포로 덮치는 악몽이라고 하는 한 환영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을 수면과 불면의 중간 곧 수면이 시작할 무렵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성적 무지라는 수면과 초자연적 지식이라는 불면 상태의 중간에 -그것은 곧 황홀이나 탈혼의 시작인데 - 영혼에게 주시는 영적 현시는 공포와 떨림을 일으킨다.

 

     19. 그는 또한 “내 뼈마디가 온통 떨리고 있는데” 바꾸어 말하자면 뼈가 떨었다. 또는 뼈마디마디 퉁겨졌다고 한다. 이것은 이 시기에 영혼이 경험한다고 이미 말한 뼈마디가 빠져서 물러나는 엄청난 상태를 뜻한다. 다니엘도 천사를 보았을 때 이와 같은 일이 자기 안에 일어났음을 말한다. “주님 소인은 이 환상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뼈마디가 모두 빠져 버렸습니다.”( 10, 16) 그리고 곧 이어서 “바람이 한바탕 내 앞을 지날 때” 곧 황홀이 내 영으로 하여금 그 자연적 능력의 한계를 넘게 할 때 “내 온 몸에 소름이 끼쳤네” 이것은 육체에 관해 앞서 말한대로 이 황홀 안에서 육체는 냉각되고 생명을 빼앗긴 사람처럼 오그라져 버렸음을 암시하고 있다.

 

     20. “그 때 내 눈앞에 누가 우뚝 서는데 나는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여기서 “내 눈앞에 선 자” 라 함은 위에 말한 방식으로 친히 영혼과 통교하시는 하느님을 말한다. “나는 그 얼굴을 볼 수 없고”라고 함은 이러한 통교 환시가 제아무리 고상한 것이어도 영혼은 거기서 하느님의 얼굴이나 본질을 볼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예언자는 한 모습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것은 감추어진 말씀에 관한 이 인식은 매우 숭고하고 흡사 하느님의 모습, 그 얼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신성의 본질적 직관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21. 끝으로 그는 “마치 산들바람 같은 음성을 들었다네”라고 하는데 그것은 영혼이 여기서 애인을 사랑의 산들바람이라고 한 것과 꼭 같다. 그리고 이런 신적 방문이 언제나 같은 공포나 육체적 상처를 동반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설명했듯이 완덕의 길, 또는 조명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사람, 이같은 통교를 갓 받기 시작한 이에게만 일어나는 형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통교는 오히려 매우 상쾌함을 동반한다.

 

 

 

          이슥 조용한 밤

 

     22. 애인의 가슴속에서 맺어지는 영적 잠 가운데서 영혼은 안온한 쉼과 고요를 맛보고 또한 소유한다. 이와 동시에 영혼은 하느님을 통해 깊은 심연과 같은 캄캄한 신적 인식을 받는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 애인이 이슥 조용한 밤이 된다.

 

 

 

          동녘 새벽의 어둠

 

     23. 영혼은 이 조용한 밤을 캄캄하지 않고 새벽녘이 가까운 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이 조용함과 쉼은 영혼에게 깊은 밤처럼 캄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적 빛, 하느님의 새로운 지식 안에서 맛보는 쉼이나 고요함이고 거기서 영은 신적 빛에로 드높여져서 상쾌하게 쉰다. 이 빛을 새벽빛이라 하고 아침에 비교함은 매우 적절하다. 다시 말하자면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하면 밤의 어둠은 사라지고 대낮 빛이 나타나듯이 하느님 안에 안온히 쉬는 이 영혼은 자연적 지식의 어둠에서 하느님의 초자연적 지식에로 오르기 때문이다. 이 지식은 이미 말한 대로 밝은 것이 아니고 새벽빛이 물들일 무렵의 밤과 같은 어둠이 따라온다. 새벽이 가까운 밤은 아주 어둡지도 않고 온통 밝지도 않으며 말하자면 그 중간에 있다. 마찬가지로 이 고독도 신적 고요도 신적 빛이 완전한 밝음은 없어도 그 한 부분에 다소 갖고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24. 이 쉼 중에 지성은 기묘한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적 지력 모두를 너머 신적 빛에로 드높여 진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잔 뒤에 짐작도 못한 밝음에 눈을 뜬 사람과 같다. 다윗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 유의 지식을 암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붕 위에 짝 잃은 새와도 같이 잠 못 이루나이다.”(시편 101, 8) 곧 나는 내 지성의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자연적 모든 지식을 초월하여 이 지식들을 벗어버리고 지붕 위에 고독하게 있다. 말하자면 지상의 온갖 것을 발 아래에 내려다보면서 고독하게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혼은 자기가 고독한 새처럼 되었는데 그것은 이런 방식의 관상 안에서 영혼은 이 새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특성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늘 가장 높은 곳에 머물고 이처럼 영혼도 그 정도에 따라 매우 숭고한 관상 안에 머문다. 둘째로 바람이 부는 방향에로 언제나 그 부리를 향해 있음과 같이 영혼도 사랑의 바람 곧 하느님 쪽으로 그 애정의 부리를 향해 있다. 셋째는 언제나 홀로 있는데 다른 어떤 새라도 자기 곁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만일 다른 어떤 새가 곁에 오면 이 새는 곧 날아가 버린다. 영혼도 관상 안에서 온갖 것에서 떠나고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자신 안에서 오직 하느님과만 홀로 있는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 넷째번은 매우 아름답게 노래하는 것인데 영혼도 그 때 하느님을 향해 이처럼 아름답게 노래 부른다. 영혼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는 더 없이 감미로운 사랑으로 가득하므로 영혼에게 매우 상쾌하고 하느님께는 무척 귀중하다. 다섯 번째는 같은 색이 아니라는 것인데 완전한 영혼도 자신을 잊은 경지에서 감각적 애정이나 자애심의 색깔은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또한 천상 것에서도 지상 것에서도 특정한 사고를 갖고 있지 않고 그 방식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께 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잔잔한 음악 (일어 : 소리 없는 음악)

 

     25. 이 밤의 고요와 침묵 속에서 또한 신적 빛의 인식 가운데서 영혼은 하느님의 지혜가 그 업적과 각양각색의 피조물을 어떻게 적절히 처리하는가를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 피조물 전체와 그 하나하나는 하느님과의 어느 정도의 유대를 갖고 각기 그 나름대로 자기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선언한다. 그것은 영혼에게 전 세계의 온갖 교향악과 선율을 휠씬 뛰어넘은 매우 고상한 음악의 아름다운 가락처럼 생각된다. 영혼은 이 교향악을 침묵의 음악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말했음 같이 음성의 울림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고요하고 온화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음악의 감미와 침묵의 고요함을 함께 즐긴다. 그래서 영혼은 자기 애인을 소리 없는 음악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를 통해서야 말로 영적 음악의 아름다움 가락을 알고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고 자기의 애인은 또한 (일어 : 울러 퍼지는 고독) 소리 없는 맑은 고요라고 한다.

 

     26. 이 울러 퍼지는 고독은 소리 없는 음악과 거의 같다. 말하자면 이 음악은 자연적 감각이나 능력에게는 소리 없기 때문인데 영적 능력에게는 무척 울림이 좋은 고요인 까닭이다. 이 영적 능력은 자연적 온갖 형태나 지각에서 떠나 비워져 있기에 하느님 안에서와 또한 하느님 안에 하느님의 탁월성의 영적 음악을 더없이 울림 좋게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말했던 저 묵시록에서 성 요한이 본 것, 곧 수금을 타는 이들이 자기 수금을 타며 내는 아름다운 음악을 울리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영적 음악이어서 본질적인 수금의 울림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의 성인들이 각 그 영광의 정도에 따라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를 어떤 방식으로 감지한 것이다. 이 찬미들은 하나의 교향악과 같다. 다시 말해서 성인들은 가기 다른 은혜를 입었기에 각각 고유의 찬미를 부르고 더구나 이 음성들은 융합되어 사랑의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참 교향악을 구성하는 까닭이다.

 

     27. 마찬가지로 영혼도 이 온화한 지혜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 상급 피조물뿐 아니라 하급 피조물도 모두 - 각자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따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듣는다. 피조물 모두는 각기 그 고유의 능력에 따라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찬미라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 음성은 모두 하나로 얽혀서 하느님의 위대함, 지혜 또는 그 놀라운 지식을 노래하는 좋은 가락의 노래가 되어 올라간다. 성령이 지혜서에 다음 구절을 말할 때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으로서 사람이 하는 말은 다 알고 계신다.”(일어 : 주님이 지으신 모든 업적인 이 세계는 소리의 지식을 갖고 있다.) (지혜 1, 7) 이 소리란 울러 퍼지는 고독을 말하는데 온갖 피조물이 하느님께 관해서 자신의 몸을 통해 바치는 증거일 뿐이고 이미 한 설명대로 영혼은 여기서 이것을 감지하고 즐긴다. 영혼은 울리는 음악을 외적인 모든 것에서 떠난 고독 안에서 밖에 감지할 수 없기에 이것을 소리 없는 음악 또는 울러 퍼지는 고독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인은 그에게는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즐거웁고 황홀스런 저녁잔치

 

     28. 저녁식사는 애인들에게 즐거움과 배불리 먹음과 사랑을 이룬다. 영혼의 애인인 하늘의 신랑과의 이 상쾌한 친교에서 영혼 안에 위의 세 가지 효과를 낸다. 그 때문에 영혼은 애인을 “즐거웁고 황홀스런 저녁잔치”라고 한다. 성서에는 저녁식사를 하느님을 본다(見神)는 것을 뜻한다. 저녁식사가 하루의 노고의 끝이고 밤에 쉼의 시작인 것처럼 영혼도 앞서 말한 온화한 지식 가운데서 그 노고의 어떤 마침과 행복의 소유를 즐기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전에 비해 뚜렷이 그 열매를 더해 간다. 그래서 하늘의 신랑은 영혼에게는 고뇌의 끝이기에 “즐거운 저녁잔치”이고 행복을 소유하기에 “황홀스런 저녁잔치‘인 것이다.

 

     29. 저녁식사는 전의 설명과 같이 애인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 저녁식사가 영혼에게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아듣기 위해 애인이신 신랑 자신이 묵시록에서 하신 말씀에 귀기울이자.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 그도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눌 것이다.”(묵시 3, 20) 이 말씀으로 신랑은 친히 식사를 갖고 오시고 이 식사란 주님이 즐기시는 감미 기쁨임을 깨우쳐 주신다. 그리고 이 감미 희열은 그분이 영혼과 일치하실 때 영혼에게 주시고 영혼도 또한 이를 즐긴다. “나는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 그도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눌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영혼과 하느님과의 일치의 효과를 말하는 것이어서 이 신적 일치를 하느님의 보화 그 자체를 하느님과 그 신부인 영혼과 함께 갖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 보화들을 공으로 게다가 후하게 영혼에게 건네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 자신이 영혼에게 이 “즐거웁고 황홀스런 저녁잔치”인 것이다. 하느님은 신부를 당신의 후하심으로 즐기게 해 주시고 깊은 자애를 보이시어 그를 사랑으로 태워 주시기 때문이다.

 

     30. 마지막 노래의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 것을 유의하기 바란다. 영적 약혼 상태에서 영혼은 완전한 고요를 맛보고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온갖 은혜를 전달받는다고 했는데 이 고요함은 영혼의 상부에 관한 것이라고만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아직 영적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영혼의 감각적 부분은 여러 가지 악습을 여태껏 다 버리지 않고 앞으로 설명할 그런 악습의 힘을 온전히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에게 전달되는 은혜는 약혼 상태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은혜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적 혼인상태는 영적 약혼 상태에 비해서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영적 약혼의 시기에서는 하늘의 신랑의 방문 때 신부인 영혼은 멋진 영적 부요를 즐김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영혼은 아직 신랑의 이 부재를 괴로워하고도 감각적 부분이나 마귀에서 오는 불안이나 성가심에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영적 혼인 상태에 다다르면 이런 것은 없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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