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16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23

 

 

 

 

 

                다음 노래의 설명

 

     1. 신부는 그 완덕의 정도에 맞갖은 덕을 영혼 안에 갖고 있고 애인의 방문을 받고 평화를 즐긴다. 때로는 그 덕들은 신랑의 접촉 때문에 향기로운 내음을 풍긴다. 그것은 마치 만발한 백합이나 다른 꽃을 들었을 때 풍기는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과 비슷하다. 하느님의 이러한 방문을 자주 받은 영혼은 자신의 영 안에서 자기의 모든 덕을 보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그러한 빛을 영혼에게 생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 영혼은 멋진 희열과 사랑을 더없이 맛스러움 가운데서 이 덕들을 전부 모아 아름다운 꽃다발로 묶어서 애인에게 바친다. 그리고 그 때 이것을 받으시는 애인은(그분은 진실히 받으시므로) 이것 때문에 커다란 봉사를 받으시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영혼 속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영혼은 애인이 마치 당신의 잠자리에 계신 것처럼, 또 거기에 자신도 있음을 느낀다. 말하자면 영혼은 자기의 덕을 바치면서 자기 자신도 바쳤던 까닭이다. 그것은 신랑께 바칠 수 있는 최대의 봉사인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내적 친교에서 영혼이 받는 것은 흔히는 최대의 희열인데 이것은 애인에게 바치는 이러한 봉헌이다.

 

     2. 마귀는 이 영혼의 행운을 감시한다. 마귀는 그 사악한 성질 때문에 영혼 안에 있는 보화 모두를 부러워하면서 그 중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뒤흔들어 놓으려고 교묘히 온갖 술책을 다해서 간사한 꾀를 부린다. 사실 마귀는 이런 영혼한테서 그 부와 영광스런 희열을 단 하나라도 잃게 하는 것을 다른 많은 영혼을 숱한 중죄에 빠뜨리는 것보다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영혼은 잃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안가졌거나 또는 아주 조금만 갖고 있는데 비해서 이런 영혼들은 무척 귀중하고 막대한 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순금 소량을 잃는 편이 다른 시시한 쇠붙이를 대량 잃은 것보다 더욱 큰 손해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귀는 이 영혼 안에 감각적인 욕구를 북돋우려 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 있는 영혼이기에 이미 이런 욕구는 약해져 있으므로 마귀는 아주 약간 밖에 할 수 없고 또는 전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방면으로는 제 노력이 헛되다고 알면 마귀는 이 영혼의 상상에다 오만가지 것을 보여 준다. 때로는 온갖 종류의 충동을 감각적 부분에 일으키게 한다. - 이에 관해서는 뒤에 말하겠다. - 또 다른 영적이고 감각적인 것에서 여러 가지 귀찮게 굴고 거기에서 영혼이 피해 나오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시편에 “주님은 주를 두려워하는 이들 둘레에 사신을 보내어 그들을 구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영혼은 주님이 이 사신을 보내시어 자기를 해방해 주시고 감각적 부분에도 영적 부분에도 평화와 고요함을 주시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시기에 영혼은 마귀가 위에 말한 해를 주려고 사용하는 간계를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에 무서워하면서 이 상태를 알리고 은혜를 청하기 위해 천사에게 이야기한다. 이런 때에 마귀를 쫓고 영혼을 돕는 것은 천사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노래를 읊는다.

 

 

 

                                     제 16 노래

 

                        우리 포도밭에 꽃이 한창이로다

                        암컷 여우들을 몰아내자

                        송이송이 장미꽃을 잣송이 한 알로 뭉쳐보자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말게

 

 

 

                해 설

 

     3. 영혼은 계속 즐기는 이 사랑의 내적 기쁨을 아무도 방해 않기를 바란다. 영혼은 이 즐거움을 포도밭의 꽃에 비교하고 질투로 괴악한 마귀나 감성의 심한 욕구나 우왕좌왕하는 상상이나 그 밖의 어떠한 인식이나 사물로 흩어지지 않기를 소원하여 천사에게 이 모든 것을 쫓아내어 멈추게 하고 내적 사랑의 삶을 방해 놓지 않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 내적 사랑의 기쁨과 맛스러움 가운데 영혼은 하느님의 아들과 서로 통교하고 덕과 은혜를 즐긴다.

 

 

 

                우리 포도밭에 꽃이 한창이로다

                암컷 여우들을 몰아내자

 

     4. 여기서 말하는 포도밭이란 이 거룩한 영혼 안에 있는 온갖 덕이 심어진 못자리를 말하고 이 덕들은 맛스러운 술을 그에게 준다. 영혼이 의지로 신랑과 일치하고 이 모든 덕 가운데서 영혼 안에서 즐길 때 이 포도밭은 꽃이 한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때로는 앞에 설명했음 같이 기억이나 상상력에 갖가지 잡다한 상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감성적 부분에 이런 저런 충동이나 욕구가 솟아오를 때가 있다. 다윗도 맛스러운 포도주를 마시면서 하느님께 대한 심한 갈증을 푸는 동안 여러 잡다한 적한테서 방해받고 시달렸다. 그러므로 그는 외치기를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내 육신 당신을 향해 얼마나 탄식하는지 모르나이다.”(시편 62)

 

     5. 영혼의 감성적인 욕구나 충동의 합창을 여우라고 한다. 그것은 이 시기에 이것들이 여우와 매우 닮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우는 먹이를 잡기 위해 자는 척 한다. 마찬가지로 감성적 욕구나 충동도 영혼 안에 덕의 꽃이 완전히 피어 향기를 풍기기까지는 조용히 쉬고 있다. 그러나 덕의 꽃이 향기를 풍기게 되면 감성의 욕구나 힘도 눈을 뜨고 말하자면 꽃이 피면 영에게 반항하여 제멋대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듯이 보인다. 이것을 성 바울로가 말하는 영에 반항하는 육의 욕망이다. 감성적인 것에로 기울어지는 육은 얼마나 세찬지 영혼이 영적 기쁨을 맛보자마자 육 전체는 싫증과 불쾌를 느낀다. 이렇게 하면서 감성적 욕구는 감미로운 영혼을 매우 괴롭힌다. 그러므로 영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암컷 여우들을 몰아내자

 

     6. 교활한 마귀들은 여기서 두 가지 방식으로 영혼을 괴롭힌다. 첫째는 그들은 우선 욕구를 몹시 자극하여 부추긴다. 그리고 그것 외에도 다른 상상 등을 써서 이 영혼의 꽃이 만발한 안온한 왕국에 싸움을 건다. 둘째는 더욱 해로운 것인데 마귀들은 위와 같은 노력이 성과 없음을 보고 육체적 고통이나 외적 소음으로 영혼에게 덤벼들어 마음을 흩게 하려한다. 그리고 더욱 질 나쁘게도 그들은 영적 공포를 사용하여 영혼을 공격하는 것인데 이 때 영혼은 정말 고문 받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일은 이 시기에 만일 하느님께서 마귀에게 허락하시면 그들은 참으로 잘 해낼 것이다. 그것은 영혼이 사랑의 삶에 몸을 맡기기 위해 영적 적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마귀도 영이니까 한층 쉽게 영에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경우, 영혼이 이 감미로운 꽃들을 즐기기에 앞서 곧 하느님이 영혼을 위에서 말한 사랑의 삶이 이루어진 신랑의 정원에 인도하기 위해서 감각의 집에서 끌어내기 시작한 시기에 마귀는 공포라는 무기로 영혼을 공격한다. 그것은 일반 저 잠심 속에 들어가 버리면 영혼은 매우 안전하게 보고 받기에 아무리 별 짓을 다 해도 해를 주지 못함을 마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마귀가 통로를 막으려고 덤벼드는 그 순간에 영혼은 매우 재빨리 자기 깊은 속에 있는 숨은 집으로 잠적하여 거기서 커다란 기쁨과 보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때 영혼은 이 공포의 습격이 모두 바깥일이나 먼 일로 느껴지므로 그것들은 영혼을 두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의 원인이 되기까지 한다.

 

     7. 아가서에 신부가 “내 마음은 아미나답의 차 때문에 흩어졌다.”(6,11)라고 할 때 이 공포의 습격을 말한 것이다. 아미나답이라 함은 마귀를 뜻한다. 그리고 마귀의 습격에 전차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격렬함과 복작거림과 소란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여우들을 몰아 내자”고 한다. 아가의 새색시도 또한 같은 말을 한다. “여우들을 잡아다오 저 여우놈들, 우리네 포도밭에 꽃이 피었네”(2, 15) 포도밭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고 우리네 포도밭을 위해서 잡아 달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와 애인 두 사람을 위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포도밭에 꽃이 한창이라고 하지 열매 맺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덕은 지금 우리가 말하듯이 이 세상에서는 영혼이 완전히 맛본다해도 그것은 단지 그 꽃만을 즐기는 것과 같고 내세에 가서 비로소 그 열매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이 송이 장미꽃을

                잣송이 한 알로 몽쳐보자

 

     8. 영혼이 포도밭의 꽃을 즐기고 애인 품에서 즐기고 있을 이 시기에 영혼의 여러 덕은 앞서 말한 대로 느닷없이 밝은 데로 나와 영혼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내고 영혼에게 무척 상쾌함과 기쁨을 준다. 영혼은 이러한 덕이 자신 안에 있음을 느끼는 동시 하느님 안에 있음을 느끼므로 이것들은 자기 것인 동시에 또한 하느님의 것인 꽃이 만발한 상쾌한 오직 하나의 포도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양자는 함께 즐기고 실컷 먹는다. 그 때 영혼은 이 덕들을 모두 모아 그 하나 하나로 또는 그 전체로 매우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것을 더없이 다정한 애정과 상쾌함 속에서 애인에게 바친다. 애인도 이 봉헌과 협력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도움과 은혜 없이는 영혼은 이 덕들을 모을 수도 신랑께 바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께 잣송이 한 알로 몽쳐 보자”라고 하는데 함께란 “애인과 나”를 뜻한다.

 

     9. 덕을 모은 것을 가리켜서 잣송이라고 한다. 잣송이란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인데 그것은 서로 굳게 껴안은 비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늘 조각은 바로 잣나무의 씨앗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애인을 위해 만드는 덕의 다발은 영혼의 단 하나의 완덕인데 그 속에는 갖가지 탄탄한 덕이나 매우 풍요로운 은혜가 질서 정연히 견고히 포함되어 있다. 이 덕들은 모두 서로 가지런히 맺어져서 영혼을 위해서 탄탄한 하나의 완덕을 만든다. 이것이 덕을 실천함으로 만들어 질 때 이 두 애인의 내적 친교를 방해하려 오지 않게 위에 말한 여우들을 몰아내는 것은 정말 마땅한 일이다. 또한 새색시인 영혼은 잣송이를 잘 만들 수 있도록 이 노래 안에서 여우를 몰아내어 달라고 청할 뿐만 아니라 다음 시구에서처럼 다른 것도 소청한다.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말게

 

     10. 사실 이 내심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친교를 위해서는 고독과 영혼의 관심을 끄는 모든 대상 - 그것이 영혼의 하부 곧 인간의 감각적 부분에서 오는 것이든 상부 곧 이성적 부분에서 오는 것이든 - 모두를 벗어버림이 필요하다. 이 두 부분은 인간의 모든 능력과 감각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에 새색시인 영혼은 그것을 산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거기에 온갖 관념이나 자연적 욕구가 살고 있어 거처를 정했으며 흡사 산에서 사냥이라도 하듯 마귀는 거기서 사냥을 하고 영혼을 해치기 위해서 이 욕구들이나 관념을 먹이로 삼기 때문이다.

     영혼은 이 산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말게 해달라고 한다. 그것은 곧 전에 한 설명대로 모든 능력과 감각 중에 어디엔가 관련되는 어떤 사물을 나타냄이나 상상이 영혼이라 신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내 영적 능력 말하자면 내 기억, 지성, 의지 안에 아무런 특별한 인식도 애호도 그밖에 어떤 것에도 유의하지 않도록 바란다. 마찬가지로 내 육체적 감각이나 능력 외적 것이나 내적 것에도 즉 상상력이나 시각 또는 청각 등 안에서도 추호의 벗어남도 형체도 영상도 상상도 또는 무슨 사물의 나타냄도 그밖에 자연적인 아무 움직임도 없도록”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11. 영혼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하느님과의 통교를 완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외적이나 내적 모든 감각과 능력이 아무것에도 관계하지 않고 빈 것이 되어 그 고유의 움직임이나 대상에서는 물러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때는 이 능력이 활동하면 할수록 더욱 하느님의 역사 하심을 헤살 놓기 때문이다. 사실 영혼은 사랑의 내적 일치에 어느 정도 다다르면 영적 능력은 일하지 않게 되고 육체적 능력은 더욱 더 일하지 않는다. 사랑의 일치의 업적을 일단 이루면 영혼은 사랑으로서만 움직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능력의 활동은 넘쳐 버린다. 목적지에 다다랐으니 수단으로 쓰던 움직임은 모두 멈추는 것이 마땅하다 그 때부터 영혼이 할 일은 사랑으로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고 이것은 말하자면 끊임없는 일치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디 산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말게 오직 위에 말한 방식으로만 자기의 능력 모두와 자기 자신을 애인에게 넘겨 드리면서 의지만이 나타내도록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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