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세금 (마태오 22,19-21)
카이사르냐 하느님이냐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 가장 많이 말한다. 마찬가지로 자유를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거나 노예가 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한다. 때때로 자유는 극단적으로 방종이나 폭정과 동일시되어 있었다. 주님께서는 노예화되고 식민화된 나라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적인 자유나 정복자의 멍에에서 해방되는 것만을 바라는 것도 당연하였다. 만일 주님께서 윤리개혁자시라면 분명히 그러한 자유를 주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구세주시라면, 사실 구세주시지만, 정치적인 자유보다 정신적 자유가 훨씬 중요하였다.
산꼭대기에서 사탄은 주님을 정치적 활동에 전념시키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정치가 신을 섬기는 것이지 신이 정치를 섬기는 법은 없다. 나중에 군중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기도하였을 때 주님은 산으로 피하셨다. 정치적 해방이 가장 널리 그리고 최우선적으로 대중들의 뿌리박고 있는 생각이었다. 폼페이가 예루살렘 성도에 들어와 도시를 방어하던 아리스토불르스(Aristobuius)와 그밖에 수천명을 포로로 데려간 이후로 이스라엘 땅은 완전히 로마인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다. “자유”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거의 언제나 카이사르의 노예제도를 전복시킨다는 정치적 의미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주님께서 끊임없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당신이 정치적 해방자가 되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주님께서 자유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사람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각기 다른 세가지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셨으며 당신이 생각하시는 참 자유에 대해 추호도 의심의 여지를 남겨 두시지 않았다.
1. 카이사르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얻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다.
2. 참 자유는 정신적인 것이며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3.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주님은 죄의 몸값으로 홀연히 당신 자신을 바치신다.
카이사르에 대해서 헤로데 당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헤로데 당원들은 하나의 파벌이나 종교적 학파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집단이었다. 표면상 그들은 카이사르의 친구였고 로마 권력의 편이었다. 그들은 로마인은 아니었지만 헤로데 가문의 왕권에 예속되기를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분간 동료 집단으로서 이교도 로마 권력에 복종하였다.
또 하나의 집단은 바리사이파 사람들로서 당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과 유대 전통에 대해서 엄격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속하는 어떤 권력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들은 헤로데를 죽이려고까지 계획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인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언젠가 메시아-왕 밑에서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기라 바라고 있었다.
이 두 집단은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그 이유는 헤로데 당원들이 카이사르의 편을 들고 지배자에게 기꺼이 세금을 바치는 반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경멸했으며 마지 못해 세금을 바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이유는 헤로데 당원들은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에 반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장 모범적인 종교의 모형이라고 공언했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사람의 병을 고쳐주신 후 어느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그분을 없애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바리사이파 삶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일시적인 동맹까지도 불사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면 주님께 대한 그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음모는 주님을 로마 총독의 권한에 넘겨 주던가 아니면 백성들에게 넘겨주고자 한 것이었다고 복음서는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밀정들을 선량한 사람처럼 꾸며 예수께 보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사법권을 쥔 총독에게 넘겨서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루가 20,20)
헤로데 당원들이 주님을 만나러 왔다면 비열한 동기를 갖고 왔다는 의심을 샀을 것이며, 항상 교활하기 짝이 없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주님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악의없이 단순하게 정보만을 얻는 것처럼 해서 자기들 가운데 몇몇 젊은 학자들을 파견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과 헤로데 당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그런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위대한 학자이신 주님께 의뢰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찬송하면서 어리석게도 주님이 아첨 몇 마디에 넘어가시리라고 생각하였다.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마태오 22,16)
그리고 나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아주 간교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마태오 22,147)
“이 세금을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너무도 혐오하고 있지만, 헤로데 당원들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세금을 내야 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 중에 누가 옳습니까? 이러한 세금을 미워하고 분개하는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이 세금을 정당화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입니까?”
그들은 주님께서 “헤로데 당원”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고 대답하실거라고 기대하였다. 만일 주님께서 “아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시면, 헤로데 당원들이 주님을 로마 당국에게 넘겨주고 로마인들은 반역을 모의한 죄로 사형에 처해 버릴 것이다. 만일 “암, 당연히 세금을 내야지”라고 대답하신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게 될 것이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가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나 해방자, 구세주라면 백성들이 침략자의 멍에를 메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주님께서 세금을 내기를 거부하신다면 반역자가 되시고, 세금을 내는데 동의하신다면 백성의 적이 되신다. “안된다”라고 말하면 카이사르의 배반자가 되고, “된다”고 말하면 주님은 반민족주의자요, 반애국자가 되실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됐든 올가미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현실파들은 위대한 지도자 카이사르의 적이라고 주님을 비난한 것이다. 질문 속에 숨겨져 있는 함정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요인이 분리가 되어 있다. 하느님과 카이사르에게 어떻게 절대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까?
흑심을 품고 제시한 까다로운 이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마태오 22,18)
비록 추켜세우는 말로 시작은 하였지만, 주님은 그들의 말 속에서 상대방에게 공격을 가하려는 뱀의 독설을 들으실 수가 있었다. 비록 그들이 주님은 두려움이 없으시고 공정하시다고 아첨을 떨었지만 주님은 “위선자들아”라는 분노에 찬 한 마디로 그들을 제압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하셨다.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마태오 22,19)
주님은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동전을 꺼내 주님의 손에 놓아드렸다. 동전의 한 쪽에는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Tiberius Caesar)의 초상이 찍혀있었고, 다른 쪽에는 그의 칭호인 황제(Pontifex Maximus)가 새겨져 있었다. 주님의 손에 동전이 놓이는 것을 보자 군중들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을 것이다. 앞으로 며칠 안 있으면, 당신이 바라보시는 이 초상의 대행자의 명령에 따라 동전을 들고 계시는 왕중의 왕이신 주님의 손이 못에 뚫리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그들이 대답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마태오 22,21-22)
주님께서는 누구의 편도 드시지 않았다. 근본 문제는 하느님이냐 카이사르냐가 아니라 하느님과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매일 물건을 사고 팔 때 사용하는 이 동전을 보면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에게 더 이산 자주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낮은 차원의 일상생활 속에서 볼 때 국가에 지고있는 빚은 갚아야만 하였다. 주님은 독립을 쟁취하려는 열망을 고취시키지 않으셨고 해방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으셨다. 현재 카이사르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마땅히 인정해야 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 단어 “되돌려 주다”나 “갚다”는 성 바오로가 나중에 로마인들에게 말한 것과 같은 도덕적 의무를 암시해준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3,1)
그러나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으면 하느님께 대한 의무가 면제된다는 반대의견을 없애기 위해, 이렇게 덧붙이셨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다시 한번 주님께서는 당신 왕국은 이 세상것이 아니며, 당신께 순종하는 것과 국가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상충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유일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해주셨다. 카이사르를 증오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카이사르에게 바쳐라”고 명령하시며, 카이사를 따르느라 하느님을 잊어버린 헤로데 당원들에게 “하느님께 바쳐라.”라는 근본 원칙을 말씀해 주셨다. 만일 백성들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렸더라면 지금쯤 카이사르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주님이 오신 첫째 목적은 하느님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전에 그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와 의를 찾는다면, 정치적 자유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은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
이 동전은 카이사르의 초상을 지니고 있지만 질문자들은 누구의 초상을 간직하고 있었을까? 하느님의 모상이 아니었을까? 주님께서 회복하시고자 관심을 가지신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모상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지금처럼 변화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화폐 주조권에 추호도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게 하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실 것이다.
참 자유
자유에 대한 질문은 주님께서 두번째로 예루살렘을 들르셨을 때 제기되었다. 주님은 진리를 자유의 조건으로 말씀하셨었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기계의 차원에서는, 기계에 대한 사실을 훤히 알 때 기계를 가장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차원에서도 “내가 진리다”라고 하신 분의 깨우침을 받을 영혼을 지닌 자만이 가장 자유롭다.
주님의 말씀을 듣던 자들은 자기들이 노예라는 듯이 말하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한테도 종살이를 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따졌다.(요한 8,33)
이러한 오만한 자랑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바로 그 순간에도 로마인들은 피정복민인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걷고 있었다. 판관기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곱 번이나 가나안의 노예살이를 했다. 더구나 칠십년간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잊었단 말인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앗시리아인과 칼데아인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어디서나 로마 수비대가 눈에 띄며 그들의 주머니 속에는 로마 돈이 들어있고 예루살렘에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정치적 배경을 무시해버리신다. 그러한 속박은 참을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노예는 죄의 노예이다. 인간성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없고 내부로부터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만 배반을 당한다. 자유로운 결정이 반복되면 일련의 습관이 형성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노예이다.”(요한 8,34)
방종 속에서 죄인이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는 그가 폭군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 주님께서는 청중들을 죄의 노예들이라고 비난하신 후 노예와 이들을 대조해서 말씀하신다. 노예는 집에서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오십 년절이 영구적인 노예신분을 금하는 법규이다. 때가 오면 노예는 떠나야만 한다. 그러나 아들의 경우는 다르다. 아들은 시간을 초월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가정에 속해 있다. 주님은 일시적으로 주인에게 속하는 노예를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에 속하지 않는 노예–죄인에 비유하셨다. 어떤 죄인도 사탄에 예속되어 있는 한 진정한 자기 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은 천상 아버지의 아들이셨다.
노예는 자기가 있는 집에서 끝내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그 집에서 살 수 있다.(요한 8,35)
죄의 노예인 그들을 정치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아들이신 주님은 그들 가운데 오셨다. 이러한 해방을 통해 죄의 노예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분이 그들을 죄로부터 몸값을 치르고 해방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죄의 집에서 하느님의 집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구속해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그들이 알 수 있도록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요한 8,36)
아들은 대변자인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인간을 죄로부터 풀어 주실 수 있으시다. 해방자이신 주님이 자유롭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조금이라도 주님이 죄의 노예가 되셨다면 죄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감옥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으며 죄수가 아닌 주님에 의해서만 열 수 있다.
주님께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오셨으며 당신을 따른 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는 선포 속에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없다. 주님이 당신 고향에서 공적으로 발언하신 첫마디가 구원의 메시지였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 먼 사람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루카 4,18)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드려 죽이려 하였다. 이 청중들은 나자렛의 청중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죄의 노예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 비교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유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로마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도 진정한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일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주님은 그 이유를 말씀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왜 나를 믿지 않느냐?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너희가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8,45-47)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자를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실이 불신을 낳고 있다. 진실이 감추어진 거짓을 드러낼 때에는 미움을 받을 수가 있다. 비록 그들이 주님을 거부했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죄없는 인격에 대해 하나라도 흠이 있으면 지적해보라고 응수하셨다. 심지어 유다는 배반한 후에도 주님을 “무죄한 분”이라고 불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죄를 용서해주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지만 한번도 당신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죄가 노예 상태라면 무죄함은 완벽한 자유일 것이다. 자유란 본질적으로 외부 압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주님은 자유에 대해 강의 하는 교사가 아니라 해방자시며 로마보다도 훨씬 강력한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분이시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로운 삶이 되게 한다.” 자유에 대한 다음 토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유에는 뭔가 대가를 치뤄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 /풀톤J. 쉰 대주교/ 성요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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