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냐 하느님이냐 (2)
참 자유의 대가
갈릴래아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주님은 될 수 있는 대로 대중의 시선을 피하시고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교리를 가르치시는데 몰두하신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교리를 오순절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하였다. 가파르나움에 도착하자마자 성전세 수금원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세금에 대한 적대적인 호기심에서나 아니면 베드로의 스승을 걸고 넘어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가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하고 물었다.(마태오 17,24)
성전세는 원래 죄로 생명을 빼앗겼음을 인정하는 뜻에서 영혼에 대한 몸값으로 각자에게 부과되었다. 출애굽기는 성전의식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이십 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성전세를 부과시켰다. 세금은 반 세켈이었으며 미국 돈으로 삼십 센트쯤 되었다.
주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느냐에 대한 질문은 그렇게 간단한 질문이 아니었다.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지상의 성전에 대해 신적인 권한을 행사하여 장사꾼들을 내쫓으셨다. 신성이 당신의 인성 안에 깃들어 있기에 당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하신 그 분이 이제 성전세를 내셔야 할까? 초막절 명절 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주장하시고 나서 성전세를 내신다면 심각한 오해를 유발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스승의 가난이 아니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신 분이 자신을 나타내는 표지요, 상징에 복종하시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성전세 수금원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님께서는 빠지지 않고 성전세를 내셨다고 답변했다. 베드로는 주님께 세를 내셨는지 상의하지 않았다. 대답을 해주고 집에 들어와 베드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님은 밖에서 벌어진 대화를 잘 알고계신 것처럼 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의 눈에는 만사가 적나라하게 훤히 드러나 보이신다.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예 바치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인두세를 누구한테서 받아내느냐? 자기 자녀들한테서 받느냐? 남한테서 받느냐?”하고 물으셨다.(마태오 17,25)
주님은 베드로가 세금 수금원에게 세금을 내신다고 답변한 것을 알고 계셨다. 위 질문은 잠시나마 베드로가 스승의 지위를 망각했음을 암시해준다. 스승은 당신 집 성전의 아들이시지 다른 집의 종이 아니셨다. 위 질문은 주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강조하셨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주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의 노예만이 아니라 죄의 노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들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하는데만 관심이 있으셨다.
“남한테서 받아냅니다”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겠느냐?”(마태오 17,26)
어떤 왕도 자기가 사는 궁전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가족들에게 세금을 메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주님은 하느님이신데 대속세를 내셔야 할까? 주님은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실 것이다. 주님은 하느님의 성전이신데 희생제사세를 내셔야 하는가? 주님은 성전이시자 희생제물이시지 않는가? 주님은 이처럼 죄많은 사람의 집단에서 자신을 제외시키신다.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영신적인 것이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주님은 천상적인 왕으로서 이 세상의 세를 내실 필요가 없음을 단언하신 후 베드로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이렇게 하여라.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맨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아라. 그 속에 한 스타테르짜리 은전이 들어있을 터이니 그것을 꺼내어 내 몫과 네 몫으로 갖다 내어라.”(마태오 17,27)
왕의 아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인자가 되시어 인간의 가난과 시련과 노고와 집없는 운명을 같이 하셨다. 얼마 후에 주님은 체포되시고 가시관을 쓰시며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인자이기에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고집하시지도 않고 추문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셨다. 항상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위대한 표시가 아니고 때로는 모욕을 감수하기도 해야 한다. 주님께서 성전을 멸시하셨더라면 모두들 분개하였을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의를 완수하기 위해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으며, 주님의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을 낳고 전혀 정결례를 행하실 필요가 없으셨는데도 비둘기를 바치셨듯이, 주님께서는 당신이 누리고 계시는 인간적 유대관계를 성화시키기 위해 세금을 내셨다.
주님은 답변을 통해 베드로와 당신 자신을 긴밀히 연관시키셨다. 주님께서는 천상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한번도 인류와 당신 자신에 대해서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언뜻 보기에는 주님께서 “주의 기도”라는 기도 속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며 인간과 당신은 똑같은 천상 아버지의 아들임을 암시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사도들이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물었으며 주님은 “주의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셨다.주님은 항상 “우리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를 구분하셨다. 주님은 자연스런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은 입양된 하느님의 아들들이다. 똑같이 주님은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과도 자신을 관련시키신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여기서만 베드로와 관련을 지으시며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바위라고 불린 베드로는 목자라고 불리울 것이며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았고 여기서는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훨씬 친밀하게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있다.
주님은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으시면서도 세금을 낼 준비를 하셨으며,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의 벌을 떠맡으셨으며, 죽음의 운명에 메어있지 않으시면서도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실 필요가 없었으면서도 십자가를 얼싸 안으셨다. 세금 수금원이 주님께 돈을 강제로 징수하지 않았듯이 로마 병사들과 의회도 주님의 뜻이 없었더라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몸값을 지불하실 것이기에 더 이상 재앙이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세금을 냈으며 주님도 그와 함께 세금을 내셨다. 둘 다 법에 순종하였다. 따라서 주님은 “내 몫과 네 몫으로 갖다 내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 몫으로”하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위격과 베드로의 인격은 무한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의무가 없으셨지만 죄의 몸값에 대한 빚을 갗으실 것이나, 베드로는 안낼 수가 없어 세를 내며, 주님은 겸손하시기에 세금을 내시지만 베드로는 의무상 낸다.
세금을 지불하는 태도도 베드로에게는 교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즉 주님은 성전 당국에 복종하시면서도 당신이 만물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신다. 전에 한번 사도들은 바람과 파도가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보고 놀랬으나 이제는 바다 속에 있는 것이 복종한다. 죽음과 영광이 주님의 모든 말씀 속에 항상 밀접히 연관을 맺고 있듯이 세금을 내는 굴욕적인 행위가 자연과 바다물고기들에 대한 주님의 왕권과 관련되어 있다. 세금은 피조물을 다 아시고 지배하시는 주님의 기적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 기적을 통해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에는 은화 한 잎이 있었으며 그것은 주님과 베드로가 내야 할 정확한 세금과 같았다. 굴욕과 위엄이라는 두가닥이 십자가의 영광에 관한 주님의 모든 말씀 속에서와 같이 한데 엮어져 있다. 이 둘은 분리 불가능하다. 처음에 마구간에서의 아기 예수의 무력감은 천사의 노래소리와 동방박사들을 당신 발치까지 인도한 별의 움직임이 보충을 해주고 있다.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종교적인 법에서 면제가 되시면서도 세금을 내셨다. 나중에는 정치적인 법에서도 면제가 되시며, 빌라도에게 그의 재판권은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릇된 판결을 받아들이셨다.
사막에서의 사십 년 생활 이후 수세기동안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은 구원이 필요한 자기 영혼에 대해 몸값을 지불해왔다. 이제는 무죄한 분이 죄를 짊어지실 것이기에 더이상의 몸값은 필요없을 것이다. 주님은 청중들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주님은 지상 성전에 속하는 것들을 지상 성전에 되돌려 주신다. 이러한 의무에서 면제를 받았다고 해서 사람이 꼭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악에 물들지 않는 첫번째 자유는 종이 되신 그분이 사주실 것이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필립비 2,6-11)
그리스도의 생애 /가경자 풀톤J. 쉰 대주교/ 성요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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