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책/천상의책16-20권

천상의책 (17권-21-23) 천사들이 천사들인 까닭. 천사들의 위계질서를 결정짓는 요인.

Skyblue fiat 2015. 9. 29. 19:26

 

17권-21,  천사들이 천사들인 까닭. 천사들의 위계질서를 결정짓는 요인.

예수님의 사랑의 고통이 수난 자체보다 월등 괴롭고 잔혹한 수난이 되었던 이유.

1924년 10월 30일

 

1. 나의 내밀한 고통은, 곧 내 마음으로 느끼는 이 순교적 고통은 펜에 맡길 수도 종이에 옮겨 쓸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 그렇다! 다정하신 예수님의 부재로 인한 이 고통에 비할 수 있는 순교는 달리 없다. 순교자는 몸에 상처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지만, 그분 부재의 고통은 영혼에 상처를 입히며 그의 맨 안쪽 힘줄마저 찢어발기는 고통이다. 더욱 나쁘게도 그것은 영혼을 죽지 않게 하면서 죽이는 순교로서, 사랑과 고통의 쇠모루 위에 영혼을 올려놓고 끊임없이 내려치는 것이다.

 

2. 그러나 나의 이 내적 고통에 대해서는 그만 언급하고 지나가겠다. 아무래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나가면서,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처럼 모든 이에게, 곧 여왕이신 내 엄마와 천사들과 성인들 및 모든 피조물에게 나를 위해서 한 마디 말을, 하나의 짧은 기도를 예수님께 바쳐달라고 애걸하고 싶을 따름이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이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뜻의 작은 딸을 불쌍히 여기시어, 귀양살이 중인 이 가혹한 땅에서 데려가 주시도록 말이다.

 

3. 나중에, 예수님 대신 내 천사가 곁에 있는 것 같아서 ‘어째서 천사일까? 예수님이 아니고?’ 하는 의문이 뇌리를 스쳤던 기억이 난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무렵, 예수님께서 나의 내면에서 걸음을 옮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렸다.

 

4. “딸아, 천사들이 천사들인 까닭이, 곧 그들이 내 손에서 나왔을 때와 같은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유지해 온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냐? 그것은 그들이 창조되었던 저 원초적 행위 안에 언제나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 존재의 원초적 행위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내 뜻의 단일한 행위 안에 있는 것인데, 내 뜻은 행위들의 연속을 모르기에 변함이 없고, 감소하거나 증가하는 법이 없으며, 그 자신 내부에 상상 가능한 모든 선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5. 천사들은 그러므로 그들을 태어나게 한 내 뜻의 그 단일한 행위 안에 머물러 있어서 변함없고 아름다우며 순수한 상태를 보존한다. 자기네 존재의 기원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상태에 있으므로, 그들의 모든 행복이 내 뜻의 단일한 행위 안에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들은 내 뜻의 영역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한다. 내 뜻이 그들에게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뿐, 행복해지려고 그 외의 다른 무엇을 원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6. 그렇지만 우수성의 등급에 따라 각기 다른 천사들의 합창대가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냐? 사실 어떤 천사들은 다른 천사들보다 내 옥좌에 더 가까이 있다. 어째서 그런 위치에 있겠느냐?

 

7. 왜냐하면, 내 뜻이 어떤 천사들에게는 내 뜻의 행위 하나만을 나타내 보이고, 어떤 천사들에게는 둘을, 다른 천사들에게는 셋을, 또 다른 천사들에게는 일곱을 나타내 보이고, 하나의 행위가 더 보태질 때마다 그만큼 더 많이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천사들은 다른 천사들보다 우수해지고 더 큰 능력을 받으며 더욱더 내 옥좌 가까이에 있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

 

8. 따라서 내 뜻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일수록, 그리고 그들이 내 뜻 안에 머물러 있을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드높여지고 아름다워지며 행복해지고 다른 이들보다 우수한 천사들이 된다. 그러니, 보아라, 모든 것이 얼마나 내 뜻 안에 있는지를, 또한 천사들이 얼마나 자기들이 태어난 바로 그 뜻 안에 머무르며 결코 그 밖으로 나가지 않는지를.

 

9. 그런즉 천사들의 각기 다른 합창대 및 그들의 서로 구분되는 아름다움과 다양한 사명과 천상적 위계(位階)는 내 지고한 뜻에 대한 지식의 다소에 따라 이루어진다.

 

10. 네가 내 뜻에 대하여 하나를 더 아는 것, 내 뜻 안에서 하나의 행위를 더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면, 또 이미 알게 된 나의 그 뜻 안에 머무르며 활동하는 것에 의해 각 피조물의 사명과 아름다움과 우수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오! 내가 내 뜻에 대해 알려 준 여러 지식의 진가를 네가 얼마나 더 확실히 인정하게 되겠느냐! 내 뜻에 대한 지식이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영혼을 탁월한 높이에 이르게 하므로, 천사들마저 놀라움과 무상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나에게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를 외치는 것이다.

 

11.

내 뜻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며 무에서 유(有)를 불러 창조한다.

내 뜻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며 (피조물을) 아름답게 한다.

내 뜻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며 피조물을 드높인다.

내 뜻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며 피조물 안에 신적 생명을 더욱더 확장한다.

내 뜻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며 피조물 안에 일찍이 알려진 적 없는 새롭고 경이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12. 그러므로 내가 내 뜻에 대해 너에게 드러내 보인 많은 것을 보면, 내가 너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너의 삶은 내 뜻 안에서 하는 행위들의 지속적인 연쇄(連鎖)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3. 만약 피조물이 천사들처럼 내 뜻이 그를 태어나게 한 저 원초적 행위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다면, 이 땅에도 얼마나 큰 질서가,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겠느냐? 딸아, 너는 그러니 나의 뜻이 너를 창조한 기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의 뜻이 언제나 너의 첫 행위가 되도록 하여라.”

 

14. 그 후 나는 묵상 중에 겟세마니 동산에 계신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빌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다시 움직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15. “딸아, 내 사랑 안으로 들어와서 결코 밖으로 나가지 마라. 네가 내 사랑을 따라다니거나 이 사랑 안에 멎어 있으면, 내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이 피조물을 향한 사랑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인간 안팎의 그 무엇에 있어서든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새로운 사랑의 행위로 다가가시기로 하셨다. 따라서 이 피조물의 생각과 눈길과 말과 숨과 심장 고동과 다른 모든 것 안에 영원하신 사랑의 행위가 흘러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7. 그런데 하느님께서 언제까지나 또 모든 것 속에서 인간을 사랑하려고 작정하신 것은, 이 피조물도 모든 것 속에서 새롭고 끊임없는 사랑으로 보답해 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하고자 하셨으니, 사랑을 주면서 또한 받기를 원하신 것이다.

 

18.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 피조물은 사랑의 리듬을 유지하며 자기 창조주의 사랑의 메아리에 응답하기를 원하지 않았을뿐더러 이 사랑을 배척하고 부인하며 모욕하기도 하였다.

 

19. 하느님께서는 이 모욕 앞에서도 그치지 않으시고 그에 대한 새롭고 끊임없는 사랑을 계속해 오셨다. 인간이 이 사랑을 받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하늘과 땅이 그것으로 가득 찬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받아 가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였다.

 

20. 사실 하느님께서 결정하시고 제시하신 후에는 이를 반대하는 일이 얼마나 일어나든 아무것도 그분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하느님은 당신의 불변성 안에 변함없이 머물러 계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의 말씀인 내가 이 세상에 왔으니, 이는 또 하나의 극한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인성을 취한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 그 모든 사랑을 나 자신 안에 모아들여,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셨고 또 주시려고 하신 사랑과 같은 정도의 사랑으로 그분께 보답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각 피조물의 각 생각의 사랑이 되었고, 각각의 눈길과 말과 심장 박동과 활동과 발걸음의 사랑이 되었다.

 

21. 따라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영원하신 사랑의 손이 내 인성의 가장 작은 심줄 속에서도 활동하시면서 그분의 신성이 피조물에게 주려고 하셨던 모든 사랑을 수용할 능력을 내게 주셨다. 이는 내가 모든 이의 사랑을 그분께 드릴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각 사람의 각 행위의 사랑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22. 그러니 너의 생각 하나하나가 내 끊임없는 사랑의 행위들에 둘러 싸여 있다. 네 존재 안팎의 그 무엇도 나의 거듭된 사랑의 행위들에 둘러싸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내 인성은 겟세마니에서 그토록 많은 사랑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숨을 헐떡이며 극도의 괴로움을 겪었다. 사랑을 주면서 받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응답없는 사랑의 고통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쓰라리고 잔혹하며 가차 없는 고통이었고, 나의 수난 자체보다 월등 괴로운 것이었다.

 

23. 오! 사람들이 나를 사랑했다면 그리도 무거운 사랑의 무게가 가벼워졌을 것이다. 사랑이 그 응답을 받으면 사랑하는 이의 그 사랑으로 갈증이 풀리고 배부름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미쳐 날뛰며 헛소리를 할 지경이 되고, 스스로 내뿜은 사랑이 죽음의 고통으로 갚음을 받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 보아라, 내 사랑의 수난이 얼마나 월등 쓰라린 수난이 되겠느냐! 내 수난을 통해 그들은 내게 단지 한 번의 죽음만을 안겨 주었지만, 사랑의 수난을 통해서는 그들의 무응답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에게서 나온 사랑의 행위들과 같은 수의 죽음을 겪었던 이다.

 

24. 그러므로, 딸아, 너는 내게로 와서 그리도 엄청난 사랑에 보답해 다오. 네가 내 뜻 안에 들어오면 그 모든 사랑이 현행 중인 것처럼 있음을 볼 것이다. 이를 너 자신의 것으로 삼고, 나와 함께, 모든 이의 사랑의 보답을 내게 줄 수 있도록 너 자신이 그들 각 행위의 사랑이 되어라.”

 

 

 

17권-22,  영혼과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느님께서 인간 창조의 순간부터 그를 에워싸게 하신 두 가지 공기

1924년 11월 23일

 

1. 예수님의 부재와 이로 인한 내 하찮은 영혼의 심한 쓰라림이 계속되는 상태 속에 있다. 그분께서는 나의 내면에 잠시 나타나실 때에도 아무 말씀 없이 생각에 잠겨 계신다. 그런 순간에는 그분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뿌듯해진다. 어떻든 나를 떠나시지 않고 내 안에 줄곧 계시는구나 싶어지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내 영혼이 바야흐로 말라 죽으려고 할 무렵 그분의 모습을 보게 되면, 이것이 내게는 한 모금의 생명이 된다. 은혜로운 이슬처럼 나를 다시 살리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을 하기 위한 소생이겠는가? 그 결과 다시 말라 죽고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나는 따라서 언제나 삶과 죽음 사이에 있다.

 

3. 나중에 다정하신 예수님을 상실한 끝없는 아픔의 바다 속에 잠겨 있노라니, 그분께서 나의 내면에서 기척을 내셨다. 기도중이신 모습을 보여 주시기에 나도 그분과 함께 기도 안에 일치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4. “딸아, 나는 사람을 창조하면서 그 생명을 보존하고자 두 가지 공기를 형성하여 그를 에워싸게 하였다. 육신을 위한 자연의 공기영혼을 위한 하느님 뜻의 공기였다. 너는, 자연적 공기는 다만 공기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호흡작용을 하게 하는 힘이 있고, 자연계 전체에 힘과 양분과 생기와 성장력을 주는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5. 사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그 자체 안에 함유하고 있어서 스스로 각 생물체의 생명이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공기의 필요성을 느끼기에, 공기는 밤이나 낮이나 도처로 흘러든다. 심장의 고동 속이든 피의 순환 속이든 어디든지 흘러든다.

 

6. 그러나 너는 아느냐? 어째서 공기가 그렇게 많은 힘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그것은 하느님께서 공기 안에 만물을 먹여 기르고 숨 쉬게 하며 생장 발육시키는 힘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기 중에는 그것이 생겨나게 하는 선들의 본질이 다 들어 있고, 마치 모든 선의 수많은 씨앗과 같은 형태로 들어 있는 것이다.

 

7. 이와 같이 온 자연계의 유지에 공기가 필요했다면, 또한 영혼의 유지를 위해서도 다른 공기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나의 선함은 내 뜻이 아닌 공기에 영혼을 맡기거나 기르기를 원치 않았다. 내 뜻이 몸소 영혼의 공기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8. 그것은 내 뜻 역시 자연의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안에 담긴 모든 선들의 본질이 영혼 깊은 곳으로 흘러들면서 그에게 신적인 양식과 성장력과 모든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고, 천상에 있는 모든 것을 호흡하는 능력과 불패의 힘과 모든 덕행들의 풍요를 가져다주기 위함이었다. 그리하면 자연의 공기를 호흡하는 육신과 내 뜻의 공기를 호흡하는 영혼 사이에 (즐거운) 경쟁이 붙을 것이다.

 

9. 하지만 통탄해 마지않게도! 사람들은 자연의 공기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높은 산에 올라가서라도 그것을 쐬려고 하며 그 결핍을 못내 아쉬워하지만, 정작 내 뜻의 공기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내 뜻의 공기에 잠길 정도로 싸여 있어야 할 그들이 이 향기롭고 거룩하게 하는 공기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내 뜻은 자신이 지닌 선들을 그들의 영혼 안에 넣어 줄 수 없고, 스스로의 생명을 펼치지 못한 채 그 영혼들 안에 버려진 상태로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0. 딸아,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부탁한다. 내 뜻의 계획이 네 안에 성취되기를 원한다면 항상 내 뜻의 공기를 호흡하여라. 그렇게 함에 따라 하느님의 생명이 네 안에 성장하게 되고, 이 생명이 너를 이끌어 네가 창조된 진정한 목적에 이르게 할 것이다.

 

 

 

17권-23,  하느님의 불변성과 피조물의 가변성

 1924년 11월 27일

 

1.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성질인간의 변하기 쉬운 성질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내가 이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에 언제나 친절하신 예수님께서 나의 내면 안에서 기동하시며 이르셨다.

 

2. “딸아, 보아라. 내가 현존하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내가 오른쪽이나 왼쪽이나 또는 뒤쪽으로 쏠리며 흔들리는 곳도 없고, 나로 가득 차 있지 않는 공간도 없다. 없는 곳이 없는 나의 현존이 확고한 것인 만치, 나는 변동을 모르는 존재다. 이것이 나의 영원한 불변성이다.

 

3. 이 무한한 불변성은 내게 기쁨을 주는 것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작용한다.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항상 좋아한다. 사랑하는 것, 즐기는 것,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일단 어떤 것을 사랑하고 즐기며 원해 왔다면 그 마음이 변할 위험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변하기 위해서는 나의 무한성을 제한해야 할 것인데, 나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러기를 원치도 않는다.

 

4. 나의 무한성은 내 머리를 에워싸면 내 발 아래까지 펼쳐지는 지극히 아름다운 후광으로서 나의 불변적인 거룩함에 영원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네가 나를 볼 수 없는 곳이 어디 한 군데라도 있느냐?"

 

5. 그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하느님의 이 불변성이 나의 정신 앞에 우뚝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누가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엉터리로 말할까 두려우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6.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인간의 변하기 쉬운 성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련한 피조물! 이 피조물이 점(點)하는 면적은 너무나도 작다! 그토록 작디작은 자리인데도 그것이 안정감 있게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오늘은 이 지점에 있지만 내일은 다른 지점에 뛰어든다. 이것이, 오늘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떤 장소를 사랑하며 좋아하다가도 내일은 마음이 홱 바뀌어 어제 좋아하며 사랑했던 것을 멸시하기까지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7. 너는 이 가련한 피조물이 무엇 때문에 그리도 변덕스러운지 아느냐? 사랑에 있어서나 만족에 있어서나 선행에 있어서나 이랬다저랬다 태도가 자꾸 바뀌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뜻 때문이다. 인간적인 뜻은 속 빈 갈대에 불어치는 드센 바람처럼 불어칠 때마다 그 인간을 좌충우돌하게 하는 것이다.

 

8. 이런 이유로, 나는 창조 당초부터 이 피조물이 내 뜻으로 살기를 바랐다. 이는 내 뜻이 인간 뜻의 그 드센 바람을 잠재우면서 그를 선에 굳건하고 사랑에 항구하며 거룩하게 활동하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가 원한 것은 인간이 내 불변성의 무한한 영역 안에서 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9. 그렇지만 인간은 그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그 작디작은 자리를 원하면서 스스로를 그 자신과 남들의 노리개로, 제 격정의 노리개로 만들고 말았다.

 

10. 내가 인간에게 나의 이 뜻을 가지라고, 자기의 것으로 삼으라고 간곡히 당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그가 태어난 이 불변적인 뜻 안으로 돌아와야 더 이상 변덕을 부리지 않고 안정과 확고함 속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 나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열망하고, 그가 늘 내 뜻 안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