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십자가 2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제, 수도자, 종교인들이 가족과 모든것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수 있었냐고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나쁜 상황입니다. 어떤 수도원은 그 사람으로 인해 악몽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머지 수도자들을 성인이 되도록 만듭니다. (웃음)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되기 위해서는 다른곳이 아닌 우리 마음 안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부로서, 종교인으로서, 목수로서… 등등등.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으로 불리움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알고 자신을 성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서 매일 주님께서 주신 모든 작은 일에서부터 일어나는 모든일을 주님께 봉헌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살게 하며 침묵의 십자가를 만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것이 아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미소한 작은 마음, 미소한 작은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하려 하고 모든 것을 가지려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굶주려 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지? 이 세상을 어쩌면 좋아”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작은 세상, 자신의 일을 돌보십시오.
성당에 가면 5명의 자녀가 있는 어머니가 하루 18시간, 하루종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자기 가족은 내버려 둔채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고 너무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엉망입니다.
우리의 개개인 사역은 우리가 속해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있는 곳을 먼저 올바르게 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처럼 주님의 현존앞에 나아가게 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세상이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작은 마음, 작은 삶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미소한 우리 자신에 대해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 미소한 자신으로 되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사람으로 왔을 때 가장 기본적인 자연 가운데, 가축들 가운데에서 오셨습니다. 그곳에 의미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주님은 나사렛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도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입니다. 단순함과 겸손함 입니다. 삶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 바쁘고 너무 크고 넓은 삶을 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뉴스를 볼 때 7시 뉴스로도 충분치 않아 8시 뉴스, 9시, 11시 뉴스, 그리고나서도 전화로 사람들과 또 그 이야기를 합니다. (웃음) 여기에 큰 덫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적은 우리를 매우 바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많은 정보를 가질수록 우리의 지식은(영혼의 지식) 줄기 때문입니다. (웃음)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읽은 모든 것, 본 모든 것 등 광대한 정보를 주곤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정보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주기 위해 모든 정보를 쌓아 놓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엉망입니다.
우리는 작아져야 하고 주님은 커져야 합니다. 그것이 세례자 요한의 메세지 입니다. 너무도 큰 메세지 입니다. 우리는 사라져야 하고 주님은 나타나야 합니다.
그와 같이 저도 지금 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 대해 말하면 저는 큰 죄인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 바로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이신 창조주이시며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오직 그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형편없는 비참한 존재일뿐입니다.
많은 크리스쳔들이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죄가 없다고 여기고 고백성사 할 것이 없어 고백성사도 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모든 곳에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매우 선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큰 착각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돋보기를 들고 교회로 가서 모든 사람들의 흠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교회의 아무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부님도 맘에 안들고, 성체 봉사자도 맘에 안들고, … 등등 … (웃음)
성서에서 젊은이가 예수님에게 와서 선하다고 말할 때 주님께서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선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하느님이셨습니다만, 겸손하게 자신의 인성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너 자신을 선하다고 말하지 말아라. 나 일지라도 선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선 인정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것입니다. 우리는 비참한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죄로 인하여 호기심을 가지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브를 생각해 보십시오. 호기심으로 인해 사탄으로부터 모든 정보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저런 타롯점,…점을 봅니다. 호기심으로 인해 정보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원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TV를 통해서도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는 깨어서 영원한 삶은 죽은 후부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놓은 가장 큰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탄은 우리에게 우리가 두개의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육체를 가진 삶과, 육체가 없는 삶,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므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큰 거짓입니다. 두가지 삶, 그런 것은 없습니다.
진실은 우리가 어머니 모태에서 생겨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영원한 삶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지금은 육체를 입고 있을 뿐이고, 그 육체를 벗게 된다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죠. 지금 이순간 이곳에서 우리가 죽는다면 바로 그곳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 우리 삶에서 행했던 것들에 따라 다른 영적 단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를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체를 벗더라도 이곳에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큰 영적 훈련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성체 앞에 앉으십시오. 그리고 영원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영원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을 낭비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 영원을 낭비한 것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 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영원안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영원한 삶에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두가지 다른 삶은 없습니다. 하나의 삶입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의문이 있습니다. 어떤 삶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요. 빛으로 가던지 어둠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그리스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보면 사람들이 문밖에서 주님께 우리가 당신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이것 저것을 했음을 기억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을 하지만 하느님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주님을 위해 하지 않았고 자신을 위해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종교적이며 영적이며 신심이 있다고 가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함과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비참함을 알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해야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로 부터 희망을 앗아가기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너무도 크시기에 주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모든 정보를 자르고 다져서 우리가 소화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내가 옳바른 이유로 여기에 있는가? 내 삶이 어떻게 되는지 두려워서 이러는 건가? 혹시 다른 것일지도 몰라서인가? 진리를 알고 내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려는 이유가 아닌 다른 것인가? 나는 왜 묵주기도를 하고 미사를 보고 고백성사를 하는가? 나는 참으로 그것을 믿는가? 그것이 그리 심각한 건가? 혹시 내가 그런척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잘못 될까봐 두려워서?
우리가 그것에 진지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카톨릭 신자로부터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에게 화가 나. 하느님이 내 삶을 왜 이렇게 두는지 모르겠어.” 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 답을 즉시 받길 원합니다. 비지니스를 하듯 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답이 아니면 우울해 합니다. 기도를 했는데 아무런 답도 효과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일시적인 유익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기도할 때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만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어린 아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좀 떨어진 곳에 아이가 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 하고 있는 동안에 아이가 넘어졌습니다. 아이가 괜찮은 것을 알고 있는 여러분은 그곳에 달려가지 않습니다.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그러다 조금 후에 아이는 여러분에게 와서 좀 전에 있던 일을 불만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 저런, 그런일이 있었어?” 하며 몰랐던 듯이 말합니다. 그리고는 아이는 곧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일이 여러분이 성체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일어납니다. “… ㅠ 차를 잃을것 같습니다. ㅠㅠ… 내 남편이 떠났습니다 ㅠ ... 이런 문제 ㅠ 저런문제…….”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실겁니다. “오, 저런~~ 정말?” (웃음)
그러나 주님은 다 보시고 계시고 여러분에게 일이 생기기 전부터 모든 걸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듣지 않으시고 도와주시길 원치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모든 기도를 답하십니다. 모든 기도 하나 하나 다 답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식으로 답하십니다. 오직 영원한 유익으로 답하십니다. 일시적인 유익은 안주십니다. 우리가 이 육체의 옷을 벗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저 차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우리는 ‘싫어요~~’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먼저 찬미를 드리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약 얼마나 네 마음에 하느님이 있는지 알고 싶다면, 얼마나 성체를 영하기를 원하는지를 보아라’ 라고 하십니다. 성체를 영하기를 갈망하지 않는 것은 자신만을 갈망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 앞에 충분히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혼란이 있고 정보의 홍수로 인해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앞에 충분히 오래 머무르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법을 배우십시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번역: 양의현 소피아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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