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마리노 레스트레포 강연

신앙의 해와 성체 1 -마리노 레스트레포

Skyblue fiat 2015. 7. 16. 16:20

 

<말씀: 베드로 전서 1:13>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서 준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때에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욕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하느님께 복종하십시오. 성서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 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여러분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해와 성체에 대한 묵상 1

 

우리 마음안에 신앙(믿음)의 해 라는 단어가 깊이 자리하여 울리고 있음을 믿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지 생각해봅니다. 신학적으로는 믿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그동안 많이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자가 아니며  신학이나 종교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므로 성령으로써 여러분께 말하고자 하며 여러분이 그 것을 이해하시리라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안에 성령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으며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때 우리 모두 그것을 듣습니다. 그것이 꼭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을 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성령이심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초자연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도유함으써 믿음의 은총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창조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 우리의 삶의 신비 등, 그 모든 신비를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은 귀중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많은 때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사랑합니다. ㅎㅎㅎ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사랑한다면  아주 곤란하죠…ㅎㅎ   인생은 이해하기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해하기 때문에 삶을 사는 것도 아니구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하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으로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도유되었지만, 우리와 같이 도유되지 못한 사람들도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십니다.  그들 역시 그들 안에 하느님의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도 성령으로 창조하셨으므로 그들안에도 성령이 있으며 그들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삶이 무엇입니까?  삶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자체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우리와 달리 초자연적으로 도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갖는 책임(의무)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면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도유로서 책임이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 도유를 받은 우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가졌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같은 삶을 받았고 삶은 하느님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다른 단계의 하느님이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에게 하느님이 더 많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이 더 많이 있지 않다는) 그것은 다른 단계(차원)를 말합니다.

이 말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교회에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 평신도가 있듯이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같으나 다 각기 다른 책임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말하고자 할 때 신뢰(trust,의탁)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비의 예수님을 잘 묵상하면 아주 큰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이 시대에 성녀 파우스티나를 통해 이 메세지를 세상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신비가나 성인들을 찾아보면 하느님께서 교회 역사 안에서 오래 전에도 이 자비의 메세지를 여러 다른 신비가들에게도  주셨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오상을 받았던 어떤 수녀에게도 주님께서 이 메세지를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수녀를 통해 주님께서 주신 말씀도  같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바칩니다…”  같은 성령을 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예수님의 피와 고통을 봉헌하는 같은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고 희망이 없다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화가 나 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믿음도 없습니다.

 

크리스챤의 신비로서 우리의 믿음은, 특히 성체를 모시는 가톨릭 신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도, 꿈꿔보지도 못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았으나 또한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배워야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성체를 통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인류의 보속의 도구로서 초자연적으로 도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체로서 보속의 도구가 되는가?

우선 우리는 아주 강한 훈련으로 단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양심을 넘어서 매우 자신의 성화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내가 거룩한 것과 같이 너희도 거룩해지라고 말씀하신다고 전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룩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남편이 누가 아내에게 충실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내에게 충실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과 결혼하여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다면 초자연적으로 도유받은 은총을 부정하고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가리옷 유다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은총을 저버렸습니다.

가리옷 유다와 성체 사이에 큰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체성사가 마지막 만찬 때 세워진 것임을 교회로부터 배웠습니다. 그것에 많은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에게 빵을 포도주에 적셔 주시고 ‘가서 할 일을 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성서는 그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가 먹은 것이 성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빵을 먹였던 마지막 만찬에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을까요?

그가 죄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가서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우리가 믿음을 저버렸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제를 통해 우리에게 성체를 주십니다. 그때 예수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할 일을 하여라” 그리고 여러분이 그곳을 떠날때 대죄상태에 있다면 사탄은 여러분에게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정확하게 말합니다. “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빵을 먹는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전서 11:27)

어떤사람들은 성체성사가 상징이라고 말합니다만 사도 바오로가 그에 대해 그토록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어떻게 그것이 상징일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상징이라면 준비가 안된 채 빵을 먹어도 단죄받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되어지지 않은채 성체를 모시면 사탄은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여기에 또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처음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때 배반자인 가리옷 유다도 그렇게 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악령도 내보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을 가질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도구(중재인)에 관계없이 하느님은 언제나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때로 우리 카톨릭에서 중재인에 대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을 했을때 그들은 이 중재인을 없애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교개혁 자체를 비하하는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이고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에게 성사가 없다면 성체의 도구로서의 우리의 중요한 의무를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고백성사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체를 이야기 할때 고백성사를 이야기 하여야합니다. 고백성사가 없이 우리는 성체를 모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체가 무엇입니까? 성체는 용서입니다. 화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어 우리의 생명 자체를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과 성체는 죽음의 운명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여 죽음의 운명과 영원한 삶사이의 다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 다리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의 운명인 우리가  그 위를 걸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것을 할 수 있으신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많은 영웅들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웅(스타)을 그린 티셔츠를 입고 다닙니다. 영웅이 차 백미러에도 있고 차에도 있고 이곳 저곳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영웅들이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 아무도 그곳에서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ㅎㅎㅎ  오직 무덤에 갔다 그곳으로부터 나온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니 그분만이 참된 영웅입니다. 저는 그분의 티셔츠만 입고 싶습니다. ㅎㅎㅎ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티셔츠를 입기를 부끄러워 하지요? 별로 인기있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그분만이 유일한 진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판타지를 원합니다. 진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살아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안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체를 지고 무덤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안에서 깨어나서 참으로 성체의 신비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지고 가야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크리스챤이란 부활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얼마나 부활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한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죽을 운명의 크리스챤으로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순이지요. 세상에는 많은 죽을 운명의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여전히 죽을 운명의 크리스챤은 크리스챤의 삶을 이용하여 오직 부와 육체적인 건강과 모든 세상적인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오늘날엔 그것들이 아주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하셨다. 알렐루야! 그분의 피로써 모든 것을 갚으셨으니 걱정할 것 없이 주님께 건강과 부를 청하자! 알렐루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따라 갑니다.

그것이 크리스챤입니까? 아닙니다. 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적인 유익도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크리스챤으로서의 우리의 목표가 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부활입니다.

크리스챤이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귀양을 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읽은 성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이곳은 귀양, 순례일 뿐입니다. 지나가는 곳입니다.

성서에 씌여진 구절중 사람들이 별로 묵상하지 않는 것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만질수 있고 보기위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내려 오셔서” 어떻게 우리를 떠나셨습니까? “다시 올라 가셨습니다”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나를 따라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에? “저 위에”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으나 우리가 있을 곳은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해낼수 있겠습니까?

자,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이곳까지 로프를 보내셨습니다. 그 로프는 십자가라고 불리웁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타고 올라가야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강력한 선물중 하나이며 교회에 대한 성령의 신비한 언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신비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저 종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집에 가기 위한 이 순례길을 가면서 우리자신을 새롭게 할때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이 놀라운 무기에 대한 정보를 받게 되어 우리의 인생의 역경을 헤쳐 나가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집에 갈 수 있도록 견뎌 내게 해 줍니다.

십자가의 길은 신비의 사다리입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의 신비를 한 처 한 처 이해한다면 우리는 각 처 마다 그 신비를 뚫고 나갈 수 있게 되며 그것을 극복하고 그 다음처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삶을 마치는 순간 영혼이 몸에서 나오자 마자 즉시 우리는 주님의 현존안에 있게 됩니다. 어디일까요?  산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직 산의 정상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올라가야 됩니다. 주님께서 사다리 꼭대기인 정상에 팔을 벌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 곳으로 오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온 삶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참된 십자가의 길을 걸었으며 얼마나 주님과 가까이 그 십자가의 길을 걸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그것에 따라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선고 받았을때를 기억하십니까?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는 우리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빌라도가 우리에게 내린 선고이며 우리 모두 그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들은 조롱하고 모욕하며 채찍질을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할 때 그것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 친구, 주윗사람들이 우리를 모욕하고 조롱하여 우리가 믿음을 증거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를 가지고 그 다음 처로 가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수난의 삶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 산을 오르려면 크리스챤의 삶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 십자가의 각 처를 거쳐가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번역: wis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