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예수의 역사적 실재
만삭의 아내를 부축하며 달려온 것이 벌써 수백리 길. 나자렛 사람 요셉은 머리 누일 곳이라도 찾았으나 베들레헴에서 방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임박한 출산의 다급함 때문일까. 요셉과 마리아의 심신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요행히 마굿간에 거처를 마련한 요셉과 마리아. 안쓰럽게도 그들의 출산을 어린 양치기 목동들과 하늘의 수많은 별들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누추하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출산의 순간이 온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 예수, 수천년 동안 인류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그것은 또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 14)고 하신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 voluntas tua)라는 성모 마리아의 고백이 결실을 맺으며 믿는 이들의 신앙고백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구세주의 탄생은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가장 소박하고 가난하게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쯤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 인구 3만명의 도시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인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묘사된 베들레헴은 그동안 주인과 주민이 뒤바뀌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고 지금은 아랍인 거주지로 구세주의 탄생지로 인류 역사에 일대 전환점을 이룬 역사의 현장 베들레헴. 이곳에 예수성탄 성당이 있다.
예수성탄성당의 입구는 말을 타고 들어와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길은 좁고 출입구는 두 번이나 낮추어졌다. 예수성탄 성당은 현재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고, 십자군이 북쪽에 세운 가타리나 성당은 가톨릭이 보존하는데, 성탄 때 TV에 나오는 베들레헴에서의 미사 장면은 성 가타리나 성당에서의 미사봉헌 모습이다. 허리를 굽혀 좁은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아기 예수가 탄생한 바로 그 자리에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동정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고 라틴어로 새겨놓았다.
이곳은 예수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실재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는 순례자들로 연일 발디딜틈 없이 북적댄다. 별자리를 보려면 보통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데 운이 좋았다. 순례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릎을 꿇은 채 예수께서 나신 곳이라는 별자리에 친구했다. 그때의 감격이란.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의 삶의 흔적은 나자렛에서부터 가나 - 갈릴래아 호수 - 사마리아 - 예리고 - 예루살렘 등지 곳곳에 베어있다.
마리아의 여정(초록선) 성가정의 여정(붉은선) 노란색영역: 헤로데 대왕의 영토
사진: 성경역사지도(분도출판사)
이즈르엘 평야 북쪽에 위치한 나자렛은 예수가 유년시절을 보냈고 공생활 전까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30여년을 보낸 곳이다. 이곳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예고해준 자리, 곧 마리아의 집터였다는 곳에 성모영보성당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나자렛에서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나촌.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다는 곳에 기적의 성당이 있다. 지하에 보관된 돌항아리들을 보는 순간 2000년 전 혼인잔치에 와 있는 듯 감격이 밀려든다.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묻어있는 곳.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다니는 기적을 보여주신 곳도, 거센 풍랑을 한마디 말씀으로 잠재운 곳도 바로 이곳이다.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인접한 도시 타브가에는 예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다는 곳에 빵의 기적성당이 서 있고, 산상설교를 하셨다는 진복팔단산 언덕엔 진복팔단 성당이 호수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또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내 양들을 잘 돌보라」는 명령과 함께 수위권을 받았다는 곳에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리스도교 최대의 성지 예루살렘. 예수의 수난 죽음과 함께 그의 인간적 면모를 확연히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올리브산 정상의 주의기도 성당과 게세마니 동산의 고뇌의 성당을 거쳐 예수께서 입성하셨다는 그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가시관을 쓰신 빌라도의 관저가 그대로 보존돼 있고 병사들이 예수를 매질하고 가시관을 씌운 곳에 세운 채찍성당은 다시 한번 순례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기도는 골고타 언덕까지 이어진다. 골고타 언덕은 원래 예루살렘성 밖 사형 집행장이었으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그리스도교 성지가 되었다. 이곳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요청으로 주의 무덤성당이 세워졌다.
예수님 시대의 무덤/ 둥근 막음돌 아래에 홈이 있어 밀면 굴러가게 되어 있다.
성당구내에 10~14처까지의 유적을 수용하고 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곳(12처), 예수의 시신이 내려진 곳(13처), 예수의 빈 무덤(14처) 등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2000년을 이어져 오는 신앙의 실재와 연속성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2000년 전 한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셨다. 그 이름은 예수였다. 그는 30여년을 살았고 당시의 가치기준과 관행을 깨부수는 파격적인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모욕과 수난, 그리고 십자가 형벌이었다. 인간적으로 더할 수 없는 패배와 좌절, 결국엔 죽음까지 자초한 예수를 그리스도요 구원자로 고백하는 무리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는 허구도 아니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당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실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가 나약한 이 세상 삶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게 하는 바탕이자 뿌리이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일생을 걸고 던진 가르침은 바로 사랑과 기쁨이다.
수태고지 성당 내부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겸손하며, 고고학적 유적도 약간 재건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정상회담이 이곳에서 열리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류의 구원이 열립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알립니다. 그녀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하늘이 땅과 이보다 더 가까웠던 적이 없었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이보다 더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 인류 역사의 새로운 새벽입니다. 이 초라한 대성당에서 가장 숭고한 약혼, 즉 인간과 신성의 약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성모송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입니다. ( 사진출처 evangelizarconelarte.com)
"VERBUM CARO HIC FACTUM EST"
동굴의 분위기는 회상과 조용한기도를 초대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곳...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종이오니,
주님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가톨릭신문, 2000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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