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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의: 카롤로스 신부님께서 하느님 뜻 영성을 하게 된 계기 (사제 피정)

Skyblue fiat 2014. 5. 31. 07:35

 

 

제 1 강의

 

카롤로스 신부님께서 하느님 뜻 영성을 하게 된 계기    

(2010. 9. 6. 사제 피정)

 

 

이곳에 오신 여러분과 수고해 주실 통역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 피정에 초대해 주시고 이렇게 피정을 할 수 있게 준비하느라고 수고해 주신 메리놀회의 여러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저와 함께 하느님 뜻의 집을 창설한 마리아넬라 수녀가 이곳에 오지는 못했지만, 지금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넬라 수녀의 인사도 여러분에게 전해드립니다.

 

 

1. 하느님 뜻의 집을 창설하다

 

 (1) 루이사의 글을 읽고 성소를 받아 사제가 되다

 

처음 강의는 저와 마리아 넬라 수녀가 어떻게 하느님 뜻의 집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카를로스 안토니오 마씨유 아빌라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안토니오 성인의 축일인 1953년 6월 13일에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습니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멕시코시티에 있는 기술학교에서 엔지니어가 되는 공부를 했고, 아주 여러 해 동안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1976년에 예수성심께서 저를 부르시고 저에게 회개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예수성심께서 제 어머니의 친구를 통해서 루이사의 글 일부를 저에게 주셨는데 그것이 제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에게 하느님 뜻이 위대하고 제일 중요하다는 확신을 주었으며, 그 확신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지금 제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만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제일이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관한 글의 처음 몇 줄을 읽으면서, 지금처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이 ‘에베레스트 산처럼 최고다.’ 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엔지니어로 일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루이사의 글을 주셨고, 그래서 점점 더 루이사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글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줄 사람을 계속 찾았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른 후에 이 글을 인쇄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루이사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고, 루이사라는 분이 글을 아주 많이 썼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 일이 끝나면 매일 그 책을 편집하고 인쇄한 사람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루이사의 글을 이태리어에서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읽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 되면서, 나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도 퇴근 시간만 기다렸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야 그 사람에게 가서 루이사의 글을 더 읽을 수 있었으니까, 빨리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2~3년 후에는 이탈리아에 너무너무 가고 싶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코라토로 갔습니다. 그곳 코라토에서 2년간 루이사의 글과 사전만 가지고 관상생활을 하듯이 살았습니다. 사전을 가지고 루이사의 글을 읽다 보니 이태리어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렇게 이태리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에 멕시코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엔지니어로 일을 계속하면서도 나에게 사제성소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래서 1983년에는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아주 결심을 했습니다.

 

멕시코에서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의 노동자들’ 이라는 사제들의 공동체를 창설한 창설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사제들의 공동체인데, 주교님들이 자기 교구 안에서 사제들을 필요로 할 때 신부님들을 보내드리기 위해서 창립된 사제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창설자가 나에게 스페인에 가서 공부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으므로 1983년, 29살이 되던 해에 스페인의 톨레도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내가 그 톨레도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주 큰 행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스페인에서 제일 좋은 신학교였으며, 내가 아는 바로는 그 스페인 톨레도 교구의 추기경님이 그 시대의 스페인 교회를 구한 분이였습니다. 스페인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지독한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수석 추기경님이신 마르틴 마르첼로 추기경님께서 스페인에서 제일 좋은 교수님만 모으셔서 신학교를 운영하셨습니다. 그 결과 스페인에서 다시 사제직이 꽃피기 시작하고 융성해지기 시작하여 스페인 교회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추기경님께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도 무척 친한 분이십니다.  

 

6년 후인 1989년 8월 4일에 나는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이 모셔져 있는 바실리카(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이 되어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우리 공동체(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의 노동자들)의 신학교에서 영적 지도 교수로 일했습니다.

1993년부터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영성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로마로 갔습니다.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할 때에 루이사의 삶인 산 제물의 영성, 희생 제물의 영성이 저의 마지막 공부의 제목이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넬라 수녀가 내 생애에 들어오고 내가 마리아넬라 수녀의 생애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공부하러 로마에 도착했을 때, 치비타벳키아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에서 마리아넬라를 만났습니다.

 

 

 (2) 하느님 뜻 영성이 미국에서 전파되다

 

치비타벳키아는 아주 특별한 장소인데, 그곳에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에서 성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치비타벳키아의 주교님께서 성모님을 안고 계셨는데 피눈물이 흘러 주교님의 손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조사를 하는 분이 주교님이신데, 그 책임자인 주교님의 손바닥에 피눈물이 떨어졌으니, 주교님도 조사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티칸이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치비타벳키아 교구는 이태리 교구 중에서 제일 작은 교구이고 또 이 아우구스티노 성당은 교구 내의 성당 중에서도 제일 작은 성당입니다. 또 7살밖에 안 된 여자 아이가 있는 앞에서 성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신 것은 너무 흥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치비타벳키아 교구의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은 흥미로운 곳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묵상을 하시는데,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남자 아이가 모래사장의 작은 구멍에 바닷물을 집어넣고 있었던 삼위일체 이야기에 나온 바로 그 장소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모니카 성녀의 눈물 젖은 기도로 회개했기 때문에, 모니카의 눈물과 성모님의 눈물이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모니카가 아니라 우리의 성모님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로마로 들어가는 문인 치비타벳키아에서 성모님께서 주교님의 품에 안겨 피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은 파블로 신부님께서 주일에 미사를 봉헌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6~7명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그런 성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신 사건 후에는, 이 성당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수백 대의 전세버스가 성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신 성당을 보기 위해 왔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기 몇 년 전부터 루이사 피카레타와 오상의 비오 성인을 잘 알고 계시는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은 그곳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과 루이사 피카레타와 오상의 비오 신부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께서는 계속 그곳에 계십니다. 아직도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에서 살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에 바로 그 장소에서 마리아넬라를 만난 것입니다.

마리아 넬라는 쿠바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에 보트 난민으로 미국 마이애미로 피난을 갔습니다. 온 가족이 빈손으로 마이애미에 보트를 타고 가서 피난민으로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마이애미에서 그렇게 자랐고, 커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넬라는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로 가서, 루이사의 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루이사가 쓴 것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잘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하느님의 뜻이 전파되고 있어서 마리아 넬라는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통적인 것이 아니라 혼란이 심했습니다. 마리아 넬라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고 확실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코라토에 있는 루이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치비타벳키아로 가서 파블로 신부님을 만나라는 권고를 받고, 치비타벳키아로 갔습니다. 그때에 내가 파블로 신부님과 함께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 넬라가 루이사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것 등을 설명해 주자 파블로 신부님과 나를 마이애미에 오라고 초대했습니다.

 

마이애미에서 루이사 피카레타에 대해서 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 넬라는 우리가 가서 그 혼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해주어 그곳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원했습니다. 마리아 넬라는 더 알고 싶은 것들과 마이애미의 사정들을 전부 설명하고 파블로 신부님과 나를 마이애미에 오라고 초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에게 루이사 피카레타에 대한 혼란을 없애고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서 파블로 신부님과 나는 마이애미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 사도직을 함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내가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 때였습니다. 로마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방학 동안 마이애미로 간 것이었습니다.

 

 

 (3) 루이사 피카레타의 시복 과정이 추진되다

 

우리가 마이애미 방문 후 6개월 뒤인 1994년 초에 바티칸에서 트라니 교구의 카르멜로 카싸티 대주교님께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회의 허가(nihil obstat : 장애 없음)가 나온 것이었는데, 그것은 루이사의 시복 과정을 조사할 수 있다는 편지였습니다. 로마에서 온 허가가 없으면 시복 과정의 조사를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 편지가 왔으니까, 시복 과정의 조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94년 10월 20일 시복 심의에 필요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1995년 초에 대주교님 카싸티 몬시뇰께서 미국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국제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도록 마리아 넬라와 나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산호세 대주교님께서 이것을 받아들이셔서 산호세에 있는 대신학교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국제 대회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고 초대도 해주셨습니다. 시복 심의과정을 준비한지 1년 후에 이 국제대회를 개최했고, 시복 심의 재판에 관계되는 모든 분들이 산호세에 오셔서 국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17개국에서 신부님 12명, 많은 수도자들, 그 외에는 모두 평신도들로 5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하느님 뜻에 관한 첫 번째 국제대회였으며 아주 대단한 성공이었습니다.

 

한 달 후인 1996년 1월에 시복 심의 재판소의 심의관 중 한 분이 루이사의 글을 복사하는 일을 위해 다른 신부님 두 명과 함께 로마에 가서 도와달라고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1938년부터 루이사의 글들은 모두 바티칸의 신앙 교리성의 고문서실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시복 심의 과정이 시작된 지 1년 후에도 루이사의 글이 트라니의 대주교님께 없었습니다. 트라니의 대주교님께서 산호세의 국제대회에 참석하시고 코라토로 돌아오시면서 바티칸의 신앙 교리성 장관인 라칭거 추기경님(교황 베네딕토 16세)을 만나 루이사 시복에 관한 조사를 계속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루이사의 글은 모두 추기경님의 고문서실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복에 관한 조사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구 차원에서 조사와 심의를 먼저 할 수 있도록 추기경님께서 루이사의 글을 모두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청을 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복사를 해서 대주교님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글들을 복사하기 위해서 팀을 조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주교님께서 팀을 조직하시는데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카싸티 대주교님께서 로마에 가라고 임명한 그 사람이 자기를 도와달라고 우리를 초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사해야 할 루이사의 글은 모두 10,000페이지였습니다. 1996년 1월에 우리가 다른 두 사제와 함께 그곳에 갈 수 있었는데, 4명의 사제와 마리아넬라와 토마스 페히, 총 6명이 일주일 동안 이 10,000페이지를 복사했습니다. 신앙성에서는 일을 별로 많이 안합니다. 오전에 몇 시간, 오후에 몇 시간밖에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해보고 나서 왜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진행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 시기는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시기였습니다. 6명 중 4명은 복사를 하고, 마리아 넬라와 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으로 찍은 것은 5,000장이었습니다.

 

매일 오후 로마의 신앙 교리성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제는 일이 끝나는 시간이니 나가라고 했습니다. 신앙성에서 문을 닫는다고 하면 나와서 코닥 필름을 가지고 현상하러 갔습니다. 사진을 현상하여 엽서처럼 사진이 나오면, 한 페이지라도 빠지는 것이 있을까봐 그것을 하나하나 확인 대조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우리는 잠을 전혀 못 잤습니다. 한 주일 동안 잠은 못 잤지만 루이사의 글을 모두 우리가 가지게 되어 너무나 멋있고 좋은 일이었습니다. 1996년 2월 2일에 이 작업을 모두 끝냈습니다. 1996년 2월 2일은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이 날짜는 산호세의 성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시기 1년 전이었습니다.

 

60년 동안 루이사의 글이 감옥(고문서실)에 있다가, 1996년 2월 2일에 루이사의 글이 감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루이사의 글을 필사하고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교구 차원에서 하는 심의 과정에서 필사는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루이사의 글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루이사의 글을 스페인어와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다음의 다른 강의에서 루이사의 글과 번역한 과정을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1994년에 시복 조사가 시작되었고, 1995년에 첫 번째 국제대회가 열렸고, 1996년에는 루이사의 글이 준비되었습니다. 카싸티 대주교님께서 마리아 넬라와 나에게 마이애미에 협회든지 무엇을 만들라고 제안하셨습니다. 시민 차원에서 협회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영적지도를 해주고 양성하기 위하여 협회를 하나 만든 것입니다. 카싸티 대주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데 관심도 많고 걱정도 하셨기 때문에 이런 협회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출판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는데, 하느님의 뜻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 없이 그러한 것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싸티 대주교님께서 걱정하신 것입니다. 카싸티 대주교님께서는 우리를 알았기 때문에, 우리를 신뢰하고 신용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4) 하느님의 뜻 협회가 생겨 하느님 뜻을 전파하다

 

처음 카싸티 대주교님께서 나에게 이런 사명을 맡기시면서 보내신 첫 번째 편지에서 왜 이러한 협회를 만들어야 되는지 이유를 말씀하시고 그분이 나를 얼마나 신뢰하고 계시는지, 또한 신임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주교님께서 내가 멕시코의 사제 공동체의 회원이었으므로 우리 공동체의 장상에게 내가 카싸티 대주교님 밑에서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셨습니다. 주교님들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생긴 공동체이기에 싫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2000년부터 카싸티 대주교님 밑에서 일하는 사제가 된 것입니다. 카싸티 대주교님의 이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협회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한 곳은 코라토가 아니라 마이애미에서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태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장에서는 대접을 못 받습니다. 루이사의 글을 사진 찍고 복사할 때 이태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사람 중에 이태리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숨타 수녀님이라고,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의 일을 하고 루이사의 집을 돌보고 있는 수녀님 이외에는 이태리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이애미에 하느님의 뜻 협회가 생겨났습니다. 카싸티 대주교님의 위임으로 내가 협회를 시작했는데 이 협회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지만, 협회를 시작할 때 카싸티 대주교님의 위임 아래 정식으로 전파하는 것은 우리뿐이었습니다. 하느님 뜻의 집은 카싸티 대주교님의 초청과 마리아넬라가 받은 영감들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2000년 대주교님 카싸티 몬시뇰께서 75세가 되어 은퇴하시게 되어 트라니 교구를 떠나셨을 때, 새 대주교님 비케리 대주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 오신 비케리 대주교님을 뵈러 갔습니다. 새 대주교님께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라는 새 편지를 마리아넬라와 나와 하느님 뜻의 집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나는 더 이상 트라니 교구의 대주교님의 권한 하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새 대주교님께서는 루이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셨고 또 온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전파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내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카싸티 대주교님께서 이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고 나에게 이 일을 해달라고 해서 하게 된 것이지, 새 대주교님께서 부탁하신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멕시코에 있는 나의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공동체로 돌아와서 공동체의 장상에게 하느님 뜻의 일을 계속하겠다고 청했습니다. 장상께서 “이제 하느님 뜻의 일은 그만두고 우리 공동체에서 당신에게 주는 우리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상께 “당신의 허락 하에 하느님의 뜻 공동체, 협회 등이 세계에 많이 생겨났는데 이제 내가 안하면 그런 것들은 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장상께서 “매달 한 주말의 시간을 당신에게 주겠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당신에게 멕시코시티에 있는 본당을 맡기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렇게 새롭게 생겨난 하느님의 뜻 그룹들을 한 달에 한 번 주말에 비행기를 타고 그들을 방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한 주교님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있는데 그 주교님께서는 내가 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나를 받아들여주고 그 일을 계속하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장상은 나에게 “하여튼 당신은 멕시코로 돌아오시오. 그리고 그 다음에 봅시다.” 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계속 주장을 했습니다만 일단 순명하고 멕시코로 돌아와서 일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주말마다 여러 하느님의 뜻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내가 하던 이 사도직을 완성해야 한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느낀다.” 고 장상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공동체의 장상, 참사회 같은 곳에 내 경우를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1년 후에 그분들이 나에게 니카라과로 가라는 허락을 주었습니다.

 

 

 (5) 하느님 뜻의 집이 교회법적으로 설립되다

 

니카라과의 주교님은 나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뜻 협회를 교회 법적으로 인정해 주려는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에 나는 내 공동체에 계속 속하면서도 니카라과의 레온 교구의 주교님의 권한 하에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주교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뜻 사도직의 일을 계속하도록 축복해 주시고 지지해 주셨습니다. 1년 후에 하느님 뜻의 집이 교회법적 인준 하에 설립되었습니다.

 

2003년에 나는 멕시코의 공동체에서 나와 니카라과 레온 교구의 교구 사제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괴로운 일이었고, 나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공동체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나에게 새로운 일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의 공동체에서 나와서 다른 교구로 들어가는 일 때문에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교구 신부가 되었습니다.

니카라과 레온 교구의 교구 사제가 되었습니다. 니카라과는 아주 더운 곳입니다. 일 년 내내 덥고, 밤과 낮에도 덥지만 아주 특별한 장소입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첫 번째 교구입니다. 레온 교구에서부터 모든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

 

 

 (6) 루이사 피카레타의 시복 과정에 다시 합류되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 마리아 넬라와 나는 계속해서 루이사의 글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복사를 하고 사진을 찍고 그것을 가지고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2001년에 교구 수준에서의 청원자가 어떤 이유로 인해서 교구의 시복 과정의 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 청원자가 임명되었습니다. 이 새 청원자가 우리를 코라토로 초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아주 맨손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복 소송을 시작한지 8년 후에 새 청원자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

 

이 새 청원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루이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 청원자가 “나는 루이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루이사를 사랑하지도 않고 나는 루이사를 모릅니다. 주교님이 나에게 이 루이사의 사건을 맡아서 돌보라고 하시는데 나는 루이사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행해진 일들의 자료와 결과를 내 손에 가지고 있으니까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필요성은 압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새 청원자 신부님은 그 교구 안에서 벌써 2개의 시복 사건을 취급하고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루이사의 시복 사건 말고 다른 2개의 시복 과정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새 청원자가 나에게 “일단 나에게 이런 서류들이 들어오면 나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된 것이 없습니다. 비케리 대주교님께서 그 회의에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이 일을 계속하고 끝을 내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비케리 대주교님께서 저에게 ‘그래서 대주교님 자신이 사비뇨 나탄시오 신부님을 청원자로 임명했으므로 사비뇨 나탄시오 신부님이 책임자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새 청원자인 사비뇨 나탄시오 신부님이 대주교님에게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니 위원회 같은 팀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넬라와 내가 그 팀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새 청원자 신부님께서 나에게 “당신은 신학자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전체 과정을 소개해 줄 수 있는 신학자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2002년 당시에 필사작업이 끝난 것에 틀린 곳이 조금 있으므로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필사한 것에 오류들이 좀 있는지, 잘못된 것들이 있는지 그것을 신학자와 같이 전부 다시 체크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님께서 어떤 사람 한 분을 나에게 추천했습니다.

 

그때가 2002년이었는데 지금 10,000페이지를 다시 체크해야 된다고, 손으로 쓴 것을 복사 했는데, 이제 복사한 것을 손으로 필사를 했으니 이것이 전부 맞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과 마리아 넬라와 내가 3년 동안 이 힘든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몇 달 후에 우리가 전부 체크한 것을 프린트해서 대주교님께 내가 보여 드렸더니, 대주교님께서 ‘내가 이것을 루이사가 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답하기를 “그 고문서 창고에 루이사가 손으로 쓴 원본이 다 있으니까 그것과 비교해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대주교님께서 “아니, 그것보다 원문과 대조할 수 있는 더 쉬운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 손으로 필사한 것과 복사한 것을 같이 놓아 대조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주교님, 10,000페이지이며 쉬운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니 그래도 대주교님께서 “그래도 해보지 않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이 작업을 한 것의 한두 페이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주님의 도움으로 교구 차원에서의 재판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대주교님께서 요구하신대로 필요한 것을 다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트라니의 교구에서 재판이 끝나기 전날 이것을 전부 마쳤는데, 이것을 가지고 트라니로 가려고 했을 때 태풍 때문에 마이애미가 엉망이 되고 마이애미 공항이 폐쇄되었습니다. 마이애미는 전기도 끊기고 공항도 폐쇄되고 아무것도 없어서 통행금지 상태였는데, 우리는 통행금지 명령도 어기고 올란도로 빠져나가 이태리의 트라니 교구로 가서 정식 재판 종결 전에 우리가 한 모든 것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구에서의 공식 재판은 2005년 10월 28일에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7) 하느님 뜻의 집이 교회법적으로 설립되고 예루살렘에 진출되다

 

마이애미에 있는 하느님의 뜻 협회가 교회법적으로는 레온 교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니카라과의 수도인 마나과이에서 하느님 뜻의 집이 법적으로 승인되고, 2005년에 마이애미 대교구에 고마운 법령 하나가 그 하느님 뜻의 집을 법적으로 인준해 주었습니다.

 

2009년에 이탈리아의 베네벤토에, 2010년에 예루살렘에(예루살렘은 교구라고 하지 않음) 하느님 뜻의 집이 법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타이베이(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곳으로 아라비아 이름)에, 성서적 이름은 에프라임에 하느님 뜻의 집이 정식으로 법적으로 생겼습니다. 하느님 뜻의 집이 있는 장소, 마이애미(미국), 마나과이(니카라과), 레온(니카라과), 베네벤토(이태리), 에프라임(예루살렘) 등은 교구의 주교님께서 정식으로 받아 준 것입니다.

한국에도 하나 생겼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지금 마리아 넬라와 나를 소개하는 중입니다만, 에프라임에 있는 하느님 뜻의 집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부터 1년 전에 예루살렘의 주교님에게 하느님 뜻의 사도직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고 싶어서 예루살렘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하느님께서 마리아넬라의 마음속에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레온 교구 주교님에게 우리가 청을 드렸고 주교님께서 예루살렘 주교님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루살렘 주교님을 뵈러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지에 간 것은 우리 일생에 처음입니다.

 

예루살렘의 주교님에게 오늘 여기에서 한 이야기와 같은 것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루이사와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예루살렘의 주교님에게 조금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 주교님께서 시작하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강복해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주교님께서는 나자렛에 가서 예루살렘 주교님의 보좌 주교인 옵슬레리 주교님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공식 편지와 문서들, 공식 자료들을 나자렛의 보좌 주교님에게 보여 드리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나중에 당신들에게 그 답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주 후에 우리는 편지를 두 통 받았습니다. 한 통은 예루살렘 주교님으로부터, 또 한 통은 나자렛의 보좌 주교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에게 오십시오. 우리가 당신들에게 무엇인가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에프라임(타이베이)에 양로원이 하나 있는데, 프랑스 수도자들이 그 양로원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은 병들어 프랑스 수도회가 계속 할 수가 없어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자렛의 보좌 주교님이 이 장소의 역사적인 것을 다 설명해 주셨습니다.

 

에프라임(타이베이)은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마지막으로 계셨던 곳으로 라자로의 부활 사건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가셨습니다. 라자로의 부활 후에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에프라임으로 가서 지내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 성지 주일이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에프라임은 사마리아에 속한 지역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계셨던 지역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사이가 나빴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지역에 가시어 좀 위험하지 않게 계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게 되는 그 프랑스 수도회의 집을 우리가 가서 보고 발견한 것이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첫째, 편지에는 언급되지 않은 피정집이 하나 있었고, 둘째, 은퇴하신 대주교님께서 일주일에 4일은 그 양로원에 묵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퇴하신 대주교님께서 2008년에 자기 일을 끝내셨는데, 팔레스티나의 첫 번째 대주교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교님들은 모두 이탈리아 사람이었는데, 이 주교님께서는 팔레스타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집(양로원)을 하느님 뜻의 집에서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 수도원이 떠나려고 하는 오래된 집이 있다는 것으로만 알고 갔는데, 피정집도 하나 있고, 은퇴하신 대주교님을 돌보는 일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이 두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세 가지가 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주교님께서 하느님 뜻 일을 공식적으로, 정식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제일 처음 이야기할 때 프랑스 수도자들이 돌보는 양로원이라고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양로원에서 노인 16명을 돌보고, 피정집도 운영하고, 은퇴하신 대주교님도 돌봐드리는 세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읽을 내용입니다만,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구원의 왕국을 주었다, 이제 그에 대한 응답으로 로마가 예루살렘에게 내 뜻의 나라를 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회개할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에 의해서 이스라엘 전 민족이 회개할 것이고 모든 피조물은 인류를 위해서 자신 안에 숨어 있는 모든 풍요로움을 모든 인류에게 넘치도록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일을 함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이 예언의 성취가 시작되는 것으로도 생각이 됩니다. 우리의 뜻이 하느님 뜻에서 떨어져 있으면 우리는 피조물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피조물의 외부적인 형상만 보게 됩니다. 모든 창조물은 전부 대단한 보물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아질 때,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 넣어두신 그 위대한 모든 보물들을 우리 인류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