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나를 따라 오너라'
시작기도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 앞에 서 계신다고 의식하고,
그분이 당신을 참된 희생과 극기의 신비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십시오.
예수님,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저를 당신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성모 마리아님, 제가 제 삶의 갈바리아를 오르며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저도 당신처럼 온전히 받아들이며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느님 아버지, 제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저를 당신께 돌아온 자녀로 인정해 주소서. 그래서 제가 당신 아드님이 걸으신 그 신비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제1처
예수님께서 부당하게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첫 번째 십자가
부당한 판결을 받아들임
사람들은 나를 부당하게 판결하고 마침내 내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나의 설교를 호기심에 가득 차 귀 기울여 듣던 군중들이 국가, 종교, 권력자들과 손잡고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나의 친구들과 제자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나를 칭송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내가 행한 기적에 놀라며 나를 단 한 번만이라도 만져 보려고 서로들 떼밀곤 했지. 그러면서 저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과 신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나를 반대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소리치고 있다. 외국인인 빌라도는 오히려 나를 풀어 주려고 하지만 내 동포들이 나에게 부당한 유죄 판결을 내리라고 빌라도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네 곁에 있는 사람들, 심지어 가장 절친했던 친구들이 너를 비판하며 네게 유죄 판결을 내리게 될 것이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네 잘못인 양 누명을 뒤집어쓸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 너는 사람이 결코 네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너의 확실하고 튼튼한 마지막 보루는 오직 하느님이시다.
이 첫 번째 십자가는 네가 의지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너를 자유롭게 해주고, 네가 나를 의지하도록 초대한다. 사람들이 너에게 부당한 유죄 판결을 내릴 때 너는 내 처지가 되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지금의 너처럼 억울하게 비난받고 부당한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너를 비판할 때 너 자신을 방어하지 마라. 그런 판단이 결코 너의 존재를 없애지도, 너를 외톨이로 남겨 두지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너를 내게 가까이 오게 하여 너를 영광으로 이끌겠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당한 유죄 판결은 너를 내게 이끌어 주는 문, 그러니까 나를 만나게 하는 하나의 문인 셈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너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못 할 것이다.
제2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다.
두 번째 십자가
일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임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나를 방어할 수 있었고, 혹은 누군가가 날 변호해 주기를 바랄 수도 있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난 죄가 없고. 어째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이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없이 십자가를 받아들였다.
네 삶의 순간순간이 십자가일 것이다. 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내팽개칠 수도 있고, 그 십자가에서 달아나 버리거나 아니면 십자가와 맞닥뜨리게 상황을 그대로 둘 수도 있을 것이다. 난 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졌다. 그러니까 네가 어디에서 나를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네게는 이제 달아날 힘도 없다.
순간마다 너는 나를 따를 것인지 아닌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십자가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신비를 알고 있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십자가를 찾고 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일상생활을 받아들이는 일, 바로 거기에 있다. 일상의 일들이 바로 너의 삶이고 너의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받아 짊어져라. 그러면 너의 마음은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제3처
예수께서 첫 번째 넘어지시다.
세 번째 십자가
넘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갖기
넘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누구든지 두 발로 땅을 굳게 딛고 서서 끝까지 참아서 이겨 내기를 바란다. 나는 하느님인데도 십자가 아래 힘없이 넘어졌다. 모두가 나의 기적을 보았고, 그런 나를 보며 경이로워했거늘.... 그러나 이제 그들은 내가 넘어지고 매 맞으며 경멸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넘어졌을 때 용기를 내라. 너의 실패를 미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이 땅에서는 달리 할 수가 없다. 너는 이곳에서 죽기 위해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 말은 자기 생명을 잃는 이는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너는 왜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네가 실패했을 때, 너보다 더 현명하고 똑똑한 이들이 너를 바라볼 때 왜 그들의 눈을 피하려 하느냐? 죄악이 너를 짓누르고 있을 때 왜 두려워하느냐? 이 모든 것을 잘 견뎌내기를 넌 원하겠지만, 보아라, 네가 넘어지면 너는 나에게 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넘어지는 것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왜 실패를 비극으로만 보느냐? 왜 부끄러워만 하느냐? 네가 넘어진 것은 내게 더 가까이 오기 위함이다. 나도 넘어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네가 이해한다면 넌 네가 넘어졌을 때 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우리는 함께 모든 죄와 실패를 이겨 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홀로 있지 않고 나에게 다가오는 일이다.
제4처
예수께서 어머니를 만나시다.
네 번째 십자가
사랑하는 이에게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줌
사랑하는 이에게 언제까지나 상처를 주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와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에게 실망하고 있을 때, 바로 그때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난 모든 이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이단자나 선동자처럼 경멸당했고, 내 어머니는 이 일의 끝을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내가 몸과 마음으로 겪는 모든 고통을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내 두눈을 바라보셨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있을 때,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의 두 눈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십자가이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네가 이들을 실망시키는 순간들을 번번이 피해 갈 수만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십자가를 거부하지 마라. 네가 친구들을 슬프게 할 때 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너의 어려움과 곤경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지 넌 보게 될 것이고, 이 일은 너에게 근심이 될 것이다. 내가 쓰러졌을 때 내 어머니는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셨다. 내가 이겨내기를 바라셨던 어머니의 마지막 바람도 사라져 버렸지만, 그 순간 어머니의 믿음은 완전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칭찬거리를 찾지 못할 때, 그때 네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넌 비로소 진정한 친구를 발견한 것이다. 그 친구는 그 순간에도 너 자신만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네게 있는 실망스러운 점들을 받아들여라. 네가 다른 이들에게 실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는 나와 나의 어머니를 만나게 될 것이다.
제5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고 가다
다섯 번재 십자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임
이제 아무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내가 그 많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지만 그들은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 절친했던 이들마저 나를 등졌다. 상처 입고, 피투성이가 되고, 어머니에게 내 처참한 모습을 보이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나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손길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시몬을 강요하여 날 돕게 하였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와 함께 고통을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이것은 십자가이다. 그러나 네가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네가 고통당할 때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져라. 나는 전능하기에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시몬에게 나를 도와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하였다. 타인의 도움에 너를 맡겨라. 네가 타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이 알도록 내버려두어라. 이것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십자가가 내게 이를 수 있는 하나의 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여라. 네 마음속에서 이러한 십자가를 거부할 때 놀라지 말아라.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른다(갈라 5,17).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너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제6처
베로니카가 예수님께 수건을 건네다.
여섯 번째 십자가
보답할 수 없는 호의를 받아들임
사람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 나는 홀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베로니카가 내게 다가와 수건을 건네주었다. 아, 그때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아느냐? 나는 감동했고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하지만 난 베로니카에게 보답할 만한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슬픔과 고통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난 베로니카에게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을 닦은 수건을 돌려주었다.
네게 선행을 베푼 이들에게 보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이번 십자가이다. 너는 내가 한 것처럼 용기를 갖고 행하여라. 네가 다른 이에게 사랑의 빚을 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모든 것을 그대로 되갚을 필요는 없다. 그 보답으로 너 자신을 주어라. 너를 남에게 주는 법을 배워라. 네가 타인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떄, 부끄럽고 미안함을 견디어 내는 것, 이것이 내게 이르는 문이다. 이렇게 하여 너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고, 성부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네게 선물로 마련해 주시는 것을 너는 결코 갚아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생명의 물을 거저 흘러나오게 하는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너도 원천에서 거저 흘러나오는 생수라고 한다면 분명히 넌 내 아버지의 자녀인 것이다.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을 갚을 수 없는 것, 이 십자가를 받아들여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좋은 것을 받아 즐기는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제7처
예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시다.
일곱 번째 십자가
반복하여 짓는 죄
이미 한 번 넘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서 강한 모습을 기대했지만 나는 또다시 넘어졌다. 이런 모습이 내 어머니를 놀라게 하고, 적대자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실망하여 내게서 움칫 물러난다. 내 약함이 모두를 분노케하고, 정말 이 사람이 하느님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런데도 난 이 십자가를 졌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이 모든 분노보다도 더 강하시다는 사실을 내 안에서 보여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처음 넘어졌을 때는 사람들에게 변명할 거리를 찾을 수 있고, 사람들도 네가 실수했으려니 하고 이해해 준다. 그러나 네가 다시 또 넘어진다면 사람들은 너를 가망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을 것이다. 넌 이 십자가를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고 모든 것을 다시 잘해 보려고 애쓰며 너를 정당화하려 하겠지만 이런 일은 너 자신을 내게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이런 행동은 너 자신만을, 네 힘만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다. 너는 늘 또 쓰러지고 거듭 넘어지겠지만 그때마다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여라. 그것을 보고 모두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 봐요! 저 사람이 다시 일어났어요. 누군가가 저 사람을 도왔군요."
너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너의 일곱 번째 십자가이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오너라. 네가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그 안에서 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당한 패배는 인간적 패배일 뿐, 영적인 것은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제8처
예수께서 우는 여인들을 위로하시다.
여덟 번째 십자가
고통 중에 타인을 위로함
여인들은 내 말을 귀담아 듣고 나를 믿으며 나를 사랑했다. 난 그 여인들의 아이들을 축복해 주었다. 이 여인들은 내가 받은 유죄 판결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따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인들은내가 받은 유죄 판결이 내 삶에 대한 유죄 판결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나는 슬픔에 잠겨 있는 여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자유에 시선을 돌리며 고통을 극복하는 것, 이것은 십자가이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종말처럼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그보다는 마음이 무디어지고 진실의 눈이 멀게 되는 것, 그것이 더 비극이다. 모든 죽음 뒤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병고 뒤에는 회복이, 이별 뒤에는 재회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진정 비극이다. 네가 자기 연민에 빠진다면, 그것이 더 비극이다.
너 자신도 위로가 필요한 때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위로해 준다면, 너는 거기에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 네게 필요한 위로를 주실 것이다. 인간적인 위로를 포기하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을 청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이렇게 함으로써 너는 세상을 이길 것이다. 이렇게 너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만 하느님께서는 너를 생명으로 이끄신다. 너 자신이 상처를 입어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타인을 위로할 때 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때 나는 너의 버팀목이 되어 주겠다.
제9처
예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시다.
아홉 번째 십자가
완전한 패배의 고통을 견디어 냄
나도 세 번씩이나 넘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가 더 버틸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때 나는 스스로를 추스르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올랐다. 모두가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여길 때에도 우리는 계속 해 나갈 수 있다.
사람들이 네게 "이제 기대할 것이라곤 티끌만큼도 없군. 끝장이야!"라고 말하는 순간을 맞을 것이다. 너 역시 그 순간 '그래, 난 더 버틸 수 없어.'라며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그 어느 곳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무기력한 순간이 올 것이다. 항복의 순간, 정말 이제는 끝이라고 자각하는 순간, 그 순간에 너는 모든 희망을 놓아 버리려느냐? 두려워하지 마라. 아직 하나의 문이 남아 있다. 그 문 뒤에서 넌 뜻하지 않게 나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네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때, 바로 그때 내가 그곳에 있다. 네가 너의 깊은 영혼 속에서 나를 향해 부르짖을 때, 나는 너에게 응답할 것이다.
모두가 너에 대한 기대를 접고 너를 포기함으로써 완전히 버림받는 것. 이것은 하나의 십자가이다. 하지만 네가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내가 나의 현존과 나의 힘으로 너를 놀라게 해줄 것이다. 너는 내 이름으로 이 세상 끝까지 가게 될 것이다.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겠느냐?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내가 세상을 이겼다.
제10처
악당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다.
열 번째 십자가
발가벗김을 당함
나는 악당들이 내 옷을 벗기도록 가만히 있었다. 가장 감추고픈,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을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치부를 가리고 싶은 기본적인 감정까지 짓밟히면서, 나는 그들이 내 내면에 상처를 입히는 행동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 혼자만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 즉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너만 간직하고 싶은 그런 곳을 지키고 싶을 것이다. 네게 있는 그 어떤 부분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그것을 들키고 나면 네 명예가 훼손될 수도 있을테니까. 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런 일을 막고자 할 테고, 타인들의 눈앞에서 애써 숨기려 할 것이며, 또 당연히 그럴 권리가 네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넌 그것을 너의 가장 사적인 부분으로 남겨 두기 위해 투쟁까지도 불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넌 너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맞닥뜨려질 것이다. 모든 것을 타인에게 내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 너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네게서 그 최후의 것마저도 빼앗아 가려 할 것이다. 그러면 너도 나처럼 그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야 한다. 그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려라. 나와 내 아버지는 유일하게 더렵혀지지 않은 내 내밀함으로 네게 머물러 있겠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육신의 옷이 벗겨지는 것만이 십자가는 아니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네 영혼의 옷이 벗겨질 때이다. 이미 죄악이 네 영혼의 옷을 벗겨 버렸기에 넌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그 누구도 더는 네 명예를 훼손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네게 새 옷을 입혀 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너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아버지께 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너의 깊은 내면을 깨긋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결백을 드러내고자 너 혼자만의 힘으로 온갖 애를 쓰겠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그때 너는 너 스스로 그렇게 되기에는 역부족임을 고백하여라. 이것이 열 번째 십자가이다. 발로 밟히는 수모의 십자가이고, 무죄함을 갈망하는 십자가이며, 누군가는 내 잘못을 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너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너 역시 연약한 인간임을, 죄로 더럽혀진 인간임을 인정하여라.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 누구도 더는 너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제11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열한 번째 십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 십자가를 내던져 버릴 수도 있을 테지만, 일단 그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면 그때는 빠져 나올 수 없다.
이 십자가가 죽을 때까지 운명처럼 정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너는 알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넌 너의 십자가들을 내던져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넌 그 위에 못 박혀 있다. 그 십자가들은 네가 그때그때 죽게 될 자리이다. 네 주위 사람들이 널 그 십자가들에 못 박을 것이다. 놀라고만 있겠는가, 아니면 내게 모든 것을 맡기겠는가?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십자가. 이런 십자가들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수고일 뿐이다. 이런 무의미한 싸움을 포기하고 내게 오너라.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다른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허황된 거짓말에 기대를 두기 마라. 십자가는 끝까지 너를 따라갈 것이고, 네가 이러한 마음을 일찍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더 일찍 부활하게 되리라. 이것이 열한 번째 십자가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라. 네가 십자가에 단 한 번 못 박히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에 나와 함께 달려 있을 것이니, 그로 인해 나는 기쁘다.
제12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다
열두 번째 십자가
십자가 위에서 죽음
죽음. 나는 이 세상을 떠난다. 무의 상태가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기 위해서. 나는 죽음으로써 내 아버지의 뜻을 이뤘다. 그래서 죽으면서 "아버지, 당신 손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성부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었다.
넌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떠올리는 일조차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넌 항상 무거운 짐이 네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승리를 얻어 내게로 올 것이다. 그러나 네가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에서 구해 달라고 청하는 한, 난 네게서 멀다. 죽음을 통해서 내게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여라. 죽음은 너의 죄악과 사라져 갈 헛된 모든 것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죽음 그 자체를 소멸시켰다. 죽음이 너를 여러 십자가에서 해방시킨다면 나는 너를 죽음에서 해방시킨다. 오늘 한번 죽음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이 십자가를 성부께서 네게 주시는 선물이자 완성으로 여겨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죽음도 허락하셨다. 그러니 네가 죽음을 거부한다면 아버지와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열두 번째 십자가는 삶의 최정상이며 동시에 축제이고 완성이다. 여기에 참다운 삶의 시작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제13처
예수님의 성시(聖屍)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다.
열세 번째 십자가
자신의 업적과 성과를 향유할 수 없음
내가 죽었을 때 친구들이 왔다. 너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한 씨앗이다. 하지만 넌 당장 네가 일한 성과를 보고 싶어할 것이다. 내 제자들은 절망과 치욕 속에서 죽어 가고,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 제자들이 뿌린 씨앗의 수확을 거두어들인다. 다른 사람들은 친구를 사귀며 삶을 누린다. 그러나 너에게 지금 이 순간은 새 시대를 위한 씨앗으로서 일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너의 십자가이다.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확신을 너에게 주겠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성공을 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네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너를 십자가에서 내릴 것이고, 그때에야 비로소 너에게 존경을 표하리라. 세상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용기를 네가 갖고 있었으니 영원한 세상에서는 십자가가 너를 짓누르지 못할 것이다. 일을 했으나 그 일에 대한 성과를 누릴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열세 번째 십자가이다. 스스로 수확할 수 없음을 알고도 씨앗을 뿌릴 용기를 내는 것, 그것이 네게는 필요하다. 그러한 네 포기의 대가는 바로 나 그리스도이다. 내가 너를 부활케 하리라.
제14처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시다.
열네 번째 십자가
인간적으로 볼 때 절망적인 삶
내 육신을 무덤에 눕히는 일. 내 친구들은 이 일이 나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친구들은 내 육신만을 보았지,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했던 말은 모두 잊어버렸던 것이다.
무덤은 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네 무덤이 세워질 때, 네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네가 죽은 후 너에 대한 흔적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지 않다면 넌 어떻게 하겠느냐? 아무도 네 무덤에 찾아오지 않은 채 불행하게 끝을 맺는다면 어찌하겠느냐? 어느 누군가가 너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다.
이 땅에서 무엇인가 보상받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마저도 묻어 버리는 것. 이것은 십자가이다. 그런 바람은 네가 참된 의미를 찾고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사욕을 너 자신과 함께 묻어 버리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네가 빛이 될 수 있겠느냐? 네가 내게 오기를 원하면서 네 뒤에 놓인, 사욕으로 이끄는 그 다리를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빛이 될 수 있겠느냐? 네가 모든 사욕을 끊었을 때 비로소 나는 네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네 욕심을 묻어 버리고 이 열네 번째 십자가를 지거라. 이 십자가 위에 부활이 맴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 교만이 묻힌 무덤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넌 아직도 무덤에 들기를 원치 않고, 이 땅에서 네 삶이 사라져 버리는 상상을 하며 경악하고만 있구나. 그렇다면 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너 자신을 위해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일 때, 너는 내 생명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야만 부활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네게서 내게 이르는 하나의 다리이니 말이다. 죄악에 대해 죽는다는 사실은 기쁨이고, 너와 나의 일치이며, 또 모든 소망과 갈망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미 내가 이 길을 걸어왔고 너를 기다린다. 죽음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나 온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이 세상이 내게 맡겨졌다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전에 나는 이 세상에서 다만 나그네였을 뿐이지만, 이제 나는 주인이다. 너도 나와 같이 되리라. 죽음을 피하지 말고, 거기에 너 자신을 맡겨 보아라. 무덤을 슬픈 인생의 종착점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의 탄생으로, 참 삶의 시작으로 여겨라. 네 교만이 죽으면 네게 부활 축제의 여명이 밝아 올 것이다.
마침 기도
아버지,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 아드님을 따르기 위해 날마다 제가 지고 가야 할 여러 가지 십자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포기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용서하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죽어야 하며, 어떻게 삶을 대면해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자신의 뜻을 끊어 버리고 당신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진정 살아 계십니다. 저는 당신의 자녀이고 당신의 기쁨입니다.
하느님, 오늘 저의 부활이 진실로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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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 나를 따라오너라 / 토미슬라프 이반취치/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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