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32,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진리가 무엇이요?”
1922년 6월 1일
1. 평소와 같이 다정하신 예수님의 <수난의 시간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특히 빌라도가 그분께 그분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대목이었다. 그러자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그것은 지상 생활 중 내가 최초로 다른 민족의 권력자를 대한 순간이었다. 그는 내 나라에 대해 물었고, 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수많은 천사들의 군대가 나를 지켰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3.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민족들에게 내 나라를 개방하고 내 천상적 가르침이 그들에게 전달되게 했으므로,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오?’ 하고 물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였다. ‘그렇다. 나는 임금이다. 진리를 가르치려고 세상에 왔다.’
4.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의 정신 속에 나를 알릴 길을 트고자 했으니, 그는 가슴이 찔린 듯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나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그를 이해시킬 기회가 없었다.
5. 만약 그가 내 대답을 기다렸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진리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진리다. 진리는 이 숱한 모욕들 가운데서 견디고 있는 내 인내다.
진리는 이 숱한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 가운데서 주고 있는 내 부드러운 눈길이다.
6. 진리는 나를 증오하는 수많은 원수들을 사랑하고, 내게 죽음을 안겨 주려고 혈안이 된 그들을 싸안으며 생명을 주고자 하는 나의 온유하고 아름다운 자태다. 진리는 위엄과 천상적 지혜가 가득한 내 말이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진리다.
7. 진리는 찬란한 태양보다 더 찬란하다. 사람이 짓밟으려고 드는 정도만큼 더욱 아름답고 눈부시게 떠올라, 원수들에게 수치를 안겨 주면서 그들을 발치에 때려눕힌다.
8. 빌라도는 성실한 마음으로 질문했으므로 나는 대답해 줄 용의가 있었다. 헤로데는 어느 쪽인가 하면 악의와 호기심으로 질문을 해대었다. 그러므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9. 거룩한 것을 성실한 태도로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지만 악의와 호기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나 자신을 감춘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조롱하려고 들때 나는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으로 조롱한다.
10. 하지만 나는 진리를 지닌 존재이기에 헤로데 앞에서도 진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헤로데의 빗발치는 질문 앞에서 지킨 침묵, 내 겸손한 눈길, 온유와 위엄과 기품이 가득한 나 자신의 자태 - 이 모든 것이 진리였고, 활동 중인 진리였던 것이다.”
14-33,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사람이 지는 십자가의 성격
1922년 6월 6일
1.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하신 예수님께서 달라지셨다. 어째서일까? 종전 같으면 내가 고통 받는 것을 무척 기꺼워하셨고, 모든 것이 못과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은 내가 고통 받는 것을 기꺼워하시지 않는다. 어쩌다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그런 나를 무심히 바라보신다. 더는 지난날의 즐거운 기색을 보이시지 않는다.’
2. 그런 생각에 잠겨 있노라니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기척을 내시며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보다 뛰어난 낙이 있을 경우 보다 못한 것은 그 즐거운 느낌과 매력을 잃는다. 그러므로 이를 무심히 보게 된다.
3. 십자가는 은총을 결합시키지만, 누가 그것에 영양분을 주느냐? 누가 적당한 크기로 자라나게 하느냐? 내 뜻이다. 내 뜻만이 모든 것을 완성하고, 영혼 안에 내 지고한 계획이 실현되게 한다. 내 뜻이 없다면, 얼마나 강력한 힘과 위대성을 지니고 있건, 십자가조차 영혼들을 어중간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고 만다.
4. 오, 얼마나 많은 고통이, 내 뜻의 지속적인 영양을 받지 못한 탓으로 목표점에 다다르지 못하는지!
이 목표점은 다름아닌 인간 의지의 소멸인데, 하느님의 뜻이 신적 성덕의 이 끝손질을, 마지막 붓질을 해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5. 너는 못이며 십자가가 다 사라졌다고 하는데, 틀렸다, 딸아, 그건 맞는 말이 아니다. 종전에는 내 십자가가 작고 불완전했지만, 지금은 내 뜻이 너를 내 뜻 안으로 들어 올려 네 십자가가 커지게 하고 있고, 네가 내 의지 안에서 행하는 하나하나의 행위가 너의 의지에 박히는 못이 되고 있다.
6. 네가 내 뜻 안에서 살아감에 따라 너의 십자가가 개개의 피조물 안에 너를 퍼뜨릴 정도로 확장되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해서 내게 생명을, 곧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생명을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게 영예와 영광을 돌려주며 내가 피조물을 창조한 목적을 이루고 있다.
7. 보아라, 네 십자가는 너뿐만 아니라 각 사람을 위해서도 커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도처에서 네 십자가를 본다. 종전 같으면 네 안에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어디든지 보이는 것이다.
8. 네가 내 뜻 안에 녹아드는 것 - 사적인 이익 때문이 아니고 오로지 모든 사람이 내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려고, 또 내 뜻이 지닌 모든 선을 만인에게 주려고 내 뜻 안에 녹아드는 것은 다만 신적인 생명에 속하는 것일 뿐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직 내 뜻만이 영혼 안에 이 신적인 성덕을 기른다.
9. 반면에 너의 이전 십자가들은 인간적인 성덕이었고, 인간적인 것은 제아무리 거룩해도 작은 일이나 할 뿐 위대한 일은 하지 못한다. 하물며 영혼을 들어 높여 자기 창조주와 하나 되어 활동하는 성덕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언제나 피조물의 한계에 머무를 뿐이다.
10. 하지만 내 뜻은 인간적인 장해 요인을 전부 없애고 피조물을 하느님의 무한성 속으로 던져 넣어, 그의 모든 것이, 곧 십자가와 못과 성덕과 사랑과 보속이 무한한 것이 되게 한다.
11. 내가 네 안에 이루고자 한 목표는 인간적인 성덕이 아니었다. 작은 일부터 먼저 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내가 고통 중인 너를 보며 그토록 기꺼워했지만 말이다.
12. 이제 내가 너를 내 의지 안에 살게 함으로써 그것을 뛰어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너의 작음, 너라는 티끌이 무한성을 싸안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내게 사랑과 영광을 주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나의 권리를 되돌려 주고 있다. 이를 보는 것이 너무나 기꺼운 나머지 다른 모든 것에는 더 이상 내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이다.
13. 그런즉 너의 십자가와 못은 내 뜻이다. 내 뜻이 간혹 너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못 박아, 진정한 못 박힘을 완성할 것이고, 이는 못 박힌 채 잉태되어 못 박힌 채 죽은 나의 십자가와 완전히 똑같은 십자가가 될 것이다.
14. 내 십자가는 오직 영원하신 뜻만을 섭취하며 자라났다. 그러므로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여기에 못 박혔다. 내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표상을 각인한 것이다.
14권-34, 주님께 안식을 드릴 수 있는 영혼의 됨됨이.
그분 안에는 일체가 자비로운 사랑이다.
1922년 6월 9일
1. 늘 변함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노라니,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매우 자주 오시곤 한다. 내 머리에 머리를 기대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다.
2. “딸아, 내게 안식이 필요하다. 창조되지 않은 지성이 창조된 지성 안에서 쉬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다른 모든 지성들이 나에게 마땅히 주어야 하는 영광과 만족을 너의 지성 안에서 전부 얻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3. 그러므로 그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네 능력의 용량을 확장하는 것이 내 뜻의 바람이다. 내 뜻이 다른 이들이 나에게 주어야 할 모든 것을 네 안에 두지 않으면, 내가 만족할 수 없으니 말이다.”
4. 그러면서 그분은 내 지성에다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 같았다. 그러자 우리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피조물의 지성들과 같은 수만큼 많은 빛살에 내 지성이 칭칭 동여매인 느낌이었다.
5. 그 하나하나의 빛살이, “영광과 감사와 영예가 삼중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께 있나이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6. “아, 됐다. 이제 내가 쉴 수 있다! 피조물의 모든 지성이 답례를 보내는 것이 보이니, 창조된 정신들이 창조되지 않은 정신과 하나로 녹아 있다.”
7. 그 후 그분은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셨다. 그러나 완전한 안식을 얻을 수 없으신 듯 내 심장에다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 숨 하나하나에 내 심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러자 그분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8. “딸아, 내가 쉬기로 작정했으므로 네 심장 안에 숨을 불어넣어 나머지 모든 피조물이 내게 주어야 할 모든 사랑을 이 안에 넣어 두고자 한다. 내게서 나온 사랑의 답례가 없고서는 내 안식이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내게 마땅히 주어야 할 사랑을 네 마음 안에서 얻기 위함이다.
9. 나의 의지가 네 안에 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면, 네 마음이 모든 이를 대신하여 하나의 멜로디를 지니게 될 터인데, 그것은 나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일 것이다.” 하시면서 그분은 다시 내 가슴에 기대어 쉬셨다. 예수님께서 쉬는 모습은 보기에 얼마나 아름다운지!
10. 그리고 그분은 사라지셨다가 다시 오셨다. 머리를 내 손에 기대시는가 하면 내 어깨에 기대시기도 하는 품이, 내 온 존재가 그분께 안식을 드리기에 합당한지 살펴보시기 위함인 것 같았다.
11. 그분께서는 나중에 이 말씀을 덧붙이셨다.
“사랑하는 얘야, 너에 대해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느끼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줄 모든 사랑을 너에게 집중적으로 쏟아 붓는 것은 그들이 내 사랑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12. 네 안에서 나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고 한 내 창조어의 반향을 듣는다. 그리고 그것의 성취를 본다.
13. 아, 홀로 우리 성삼위의 뜻만이 사람을 그의 근원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우리의 뜻이 사람의 뜻에 모든 신적인 모습을 각인하고 우리의 뜻에 압도되게 한 뒤, 이를 우리 뜻의 날개에 태워 사람의 창조주께로 데려올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뜻은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 제 창조주를 닮아 깨끗하고 아름다워진 상태가 될 것이다.
14. 그런즉 나는 네가 내 뜻의 모든 인장을 네 안에 받아들여, 오직 하느님 뜻만이 네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하늘과 땅이 알아보게 하기 바란다. 그들은 이 뜻에 압도된 느낌이 들 것이고, 모두가 피조물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무슨 일에든지 즉각 응할 수 있는 태세로 있으면서 나에게 충실하여라.”
15. 그러고 나서 그분은 다시 오셨는데,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엄하다고, 자비보다는 정의를 더 많이 쓴다고 생각할 때 나는 슬픔을 느낌다. 그들은 내가 틈만 나면 자기들을 때려치는 존재인 것처럼 대한다. 오, 이런 이들을 보면 얼마나 욕을 당한 기분인지!
16.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내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그렇게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니 내 사랑이 빚어내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다. 자기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굴면서도, 나를 엄하다고, 거의 공포를 불어넣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7. 그들은 (복음서를 통해) 내 생애를 얼핏 볼 때에도 내가 오직 한 번 행한 정의의 행위만을 주목한다. 그것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을 지키기 위하여 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좌우를 후려치며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쫒아낸 대목이다.
18. 그러나 그 나머지는 다 내 자비의 행위였을 뿐이다. 내가 잉태되고 태어난 일, 내 말과 행위와 발걸음, 내가 흘린 피와 그 고통들 - 그 모든 것이 자비로운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무서워한다.
나를 무서워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 자신을 무서워해야 하련마는!”
14권-35, 자연적인 삶은 초자연적인 영적 삶을 상징한다.
1922년 6월 11일
1. ‘영적인 삶도 수많은 변화를 겪으니 어찌 된 일일까? 이것이 자기 삶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때에도, 뜻밖의 순간에 다른 어딘가로 내던져지고, 여기에서 결국 아무도 모를 수많은 고통을 치른다. 이로 인해 마음이 피를 흘릴 정도가 되면서 말이다. 그런 변화를 수없이 겪기 때문에 영적인 삶은 계속적인 순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2.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내 내면에서 걸음을 옮기시며 말씀하셨다.
“딸아, 영적인 삶은 과연 계속적인 순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위대한 최초의 순교자, 곧 나 자신과 같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영적 삶이 아니라 이 삶의 환영(幻影) 내지 그림자로 일컬어질 수 밖에 없다.
3. 그러니 이를 적당한 수준에 도달하게 하여,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완전한 것이 되게 하려면, 여러 변화를 겪을 필요가 있다. 이보다 덜 중요한 인성 자체도 적당한 수준에 도달하려면 아무도 모를 여러 변화를 겪어야 하는데, 하물며 자연적인 삶보다 더 중요하고 우월한 영적인 삶이야 훨씬 더 많은 변화를 겪어야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영적이 삶을 상징하는 것이 자연적인 삶이다.
4. 우선 자연적인 삶이 얼마나 숱한 변화를 겪는지를 보아라. 사람은 어머니의 태내에 잉태되어 여기에 머무르는 아홉 달 동안 그 작은 몸이 형성된다. 이것이 다 형성되면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머무려고 한다면 죽고 말 것이다. 성장에 필요한 공간 부족으로 숨을 쉴 수 없어져서 그 자신과 어머니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 태문이다.
5. 그런데 만약 이 잉태가 모태 밖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작은 몸을 형성할 피와 열을 누가 주겠느냐? 더욱이 갓난아기는 몸의 각 부분이 극도로 연약해서 외부 공기에 노출되어도 죽을 수 있으니,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서 돌보아야 한다. 추위나 더위, 어머니의 젖 결핍도 아기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런즉 기저귀며 요람이며 젖 등등을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6. 또 젖이 아닌 무엇을 먹이려고 든다면, 아기는 씹어 먹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음식을 먹을 줄 아는 때도 온다. 기저귀를 차지 않게 되고, 걸음마를 배우게 디는 때 말이다. 알겠느냐? 아기는 아직 유아기에 속해 있지만 벌써 세 가지 변화를 겪었다.
7. 그런데 이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도록 땅바닥에 내려진 자신을 보고, 그렇게 엄마의 팔에서 떼어진 것이 두려워 앙앙 울어대며 하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린다면, 어떻게 말하겠느냐? 아기가 참 안됐다. 싶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의 팔 안에 있으면 성년(成年)이 되지 못할 것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튼튼해지지 않고 발육도 나쁠 것이기 때문이다.
8. 이제 참된 영적 삶으로 돌아와 보자. 이 삶은 나의 태내에 잉태되고, 내 피와 사랑과 숨으로 형성된다. 그런 다음 나는 내 젖을 먹이고 은총의 기저귀를 채워 준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진리로 걸음마를 하게 한다.
9. 하지만 내 계획은 같이 데리고 놀 아이를 기르는 데에 있지 않고, 나 자신과 완전히 같은 복사판을 만드는 데에 있다. 여러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니, 그것을 성년에 이르게 하여 참된 영적 삶에 내포된 모든 특은과 특권을 주기 위함이다.
10.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삶이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 같은 상태에 머물고 말아, 내 영예와 영광을 이루는 대신 내 고통과 수치가 될 것이다. 한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만 갓난아기로, 기껏해야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로 머물고 마는지! 나 자신의 복사판이 되려고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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