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 관상기도회 (3)
2014년 4월 1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문호영 프란치스코 신부
천상의 책 11권 64장 (1913년 10월 2일) :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결합되면 영혼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형성된다.
하느님 뜻을 소유함은 전부를 소유하는 것.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의 일치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말씀들인데 4절을 보면>
1 평소의 상태대로 머물러 있노라니, 복되신 예수님께서 나의 내부에 계신 당신의 모습을 보도록 해 주셨다.
2 그런데, 그분께서 얼마나 나와 하나로 결합되어 계신지, 나의 눈 속에서 그분의 눈을, 나의 입 속에서 그분의 입을, 마찬가지로 그분의 온 몸을 볼 수 있었다.
3 내가 이와 같은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었을 때에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 “딸아, 내 뜻을 행하는 영혼과 내가 얼마나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지 보아라.
내 뜻이 이 영혼의 안팎에 있으므로 나 자신이 바로 그의 생명이 된다.』(천상의 책 11-64,4)
<생명이라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을 살아 있는 것이냐 라고 말을 하느냐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상태가 아닌 것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 그랬을 때 우리는 설명을 할 때 우리는 두 가지로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죽은 생명, 살아있는 생명 그런데 사실은 죽은 생명이라는 것은 말이 좀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국말이 그렇게 표현할 뿐이지 죽은 생명이라는 것은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살아있다, 생명이다. 라는 것은 활력을 가지고 있고 활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생명이 사실은 모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도 생명이 모든 것이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생명 때문에 이렇게 지상 생활을 하는 것이고 생명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또 이렇게 기도회를 하는 것도 생명 때문에 우리의 영혼 생명, 영원한 생명 때문에 그런데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고 또 그 생명의 원리이고 원천이시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순간 그 뜻이 그것을 향하는 사랑 속으로 들어와서 그 모든 것의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사실 하느님의 뜻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또 하느님의 뜻을 행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그 순간에 하느님의 뜻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자동차 핸들은 파워핸들이 아닙니다. 요즘 젊은 분들은 파워핸들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요즘은 다 파워핸들이니까 옛날에는 큰 트럭만 파워핸들이고 작은 소형차는 처음 차가 움직이려고 그럴 때 핸들을 꺾을 때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핸들을 돌리는데 힘이 들어서 여자들은 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파워핸들이라고 어떤 장치를 해서 손가락으로 이렇게 해도 핸들이 싹 움직이도록 지금 모든 차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핸들이 파워핸들이 아닐 때 핸들을 돌리는 것이 왜 어렵냐 하면 바퀴가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핸들을 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바퀴가 굴러가면 핸들을 움직이기가 쉽습니다. 이게 어떤 원리하고 똑같은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하느님의 뜻이 동시에 오는 것이고 또 하느님의 뜻이 와야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뭐하고 똑같으냐하면 우리가 엔진을 켜서 핸들을 돌리려고 하는 그 순간하고 바퀴가 돌아가는 그 순간하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핸들을 움직이려고 그럴 때 바퀴는 돌아가고 바퀴가 돌아가려고 그럴 때 내가 핸들을 움직이는 것이고 그래야 핸들을 쉽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바퀴는 안돌아 가는데 내가 핸들을 돌리려고 하면 너무 힘이 듭니다. 이 두 가지의 관계가 바로 하느님의 뜻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순간 하느님의 뜻이 와야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또 내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그 순간 하느님의 뜻이 오는 것이고 누가 먼저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온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생명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5 이 뜻은 그가 숨쉬는 공기와 같아서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6 그러니 모든 것을 보고 깨닫게 하는 빛과 같고,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하고 비옥하게 하며 자라게 하는 열과 같다. 그것은 또한 고동치는 심장이요, 일하는 손이며, 걸어 다니는 발이다.』(천상의 책 11-64,6)
<6절은 하느님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빛이고, 열이고, 고동치는 심장이고, 일하는 손이고, 걸어 다니는 발이다. 이런 설명이신데 빛은 보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이 보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이 빛이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보려면 하느님의 뜻이 와야 된다. 또 이 말은 우리가 올바로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왔기 때문이다. 이만큼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소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열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은 에너지입니다. 사물이 움직이거나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에너지가 되어서 모든 사물을 움직이게 하고 생명체에게는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래서 ‘생명이신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소서.’ 이렇게 할 수가 있고 아까 같은 경우는 ‘빛이신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소서.’ 그렇게 또 심장은 생명체에 피를 공급하는 펌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심장이 고동친다는 것은 생명체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피가 순환된다는 뜻인데 바로 하느님의 뜻이 바로 심장이 되어서 생명체를 살게 하고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이 된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심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심장이 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해야 살아있을 권리가 있는 것인데 하느님의 뜻을 많이 안하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있지 않을 때는 죽었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아 있게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눈을 딱 감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과거에 못했던 하느님의 뜻을 이제 몇 배로 하라고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손과 발, 이것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일차적인 도구가 손과 발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표시가 되는 것이 손과 발입니다. 손과 발을 제일 먼저 움직입니다. 중풍에 걸린 병자가 누워 있을 때 사람들이 야, 발을 움직여봐 손을 움직여봐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살아있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느님의 뜻이 손과 발이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주체가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라는 것을 지금 6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음 7절에>
『7 인간의 뜻이 나의 뜻과 하나가 되면 나의 생명이 그 영혼 안에 형성되는 것이다.”』(천상의 책 11-64,7)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순간이 바로 인간 뜻과 하느님의 뜻이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 오지 않으면 혹은 내가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 왔을 때 내가 하느님의 뜻으로 들어갔을 때, 그때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뜻으로 행하기는 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오직 하나 뭐가 드러나느냐? 하느님의 뜻만이 드러납니다.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만이 드러나니까 하느님의 뜻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하느님 뜻의 생명 이것이 우리 영혼 안에 형성된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마다 하느님 뜻의 생명이 내 안에 계속 형성된다. 우리가 좋은 영양분을 먹을 때마다 영양분이 제 안에 축척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마다 하느님 뜻의 생명이 우리 안에 계속 형성된다. 이런 뜻이 됩니다. 그다음에 9절에>
8 나중에 영성체를 한 다음 내가 예수님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씀 드렸더니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9 “내 딸아,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그러면 ‘예수님, 저는 당신 뜻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하여라.』(천상의 책 11-64,9)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 뜻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여라.
우리가 그냥 ‘하느님,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하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고 누구의 힘으로 사랑합니까? 하느님의 힘으로 혹은 하느님 뜻의 힘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니까 그 효과가 비교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때든지 거기 ‘하느님의 뜻으로’ 이것을 붙여야 됩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라는 것을 붙여야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으로’ 싸움을 할 때도 ‘하느님의 뜻으로’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간에 싸움을 안하게 됩니다. 욕심을 부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욕심을 부리면 나중에 욕심을 못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으로’ 라는 것을 붙이는 것 이것은 하느님 뜻 영성을 사는 사람은 아주 이것을 습관을 붙여야 됩니다. 인사할 때도 ‘안녕하세요.’ 이것보다 ‘하느님 뜻으로 안녕하세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느님 뜻으로 축하합니다.’ ‘반갑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느님 뜻으로 반갑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내가 인사를 ‘하느님 뜻으로 안녕하세요.’ 그럴 때 나뿐만이 아니라 그 안녕을 받는 그 사람에게도 하느님 뜻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10 내 뜻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으므로 너의 사랑이 어디서든지 나를 에워쌀 것이고, 너의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하늘 저 높은 데까지 또 땅 밑 저 심연의 밑바닥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11 그런즉 네가 ‘당신을 흠숭합니다. 찬양합니다. 찬미합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고자 한다면 내 뜻과 일치하여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흠숭과 찬양과 찬미와 감사로 하늘과 땅을 채우게 된다. 내 뜻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어마어마한 결과를 내는 말이 되는 것이다.
12 나의 뜻이 전부다.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 속성들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내 뜻의 단순한 현동(現動)일 따름이다.
13 그러므로 정의, 선성, 지혜, 굳셈과 같은 속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나의 뜻이 이들을 선행하고 동반하면서 움직일 태세로 있게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속성들은 나의 뜻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다.
14 이런 이유로 나의 뜻을 소유하는 사람은 전부를 소유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삶은 끝났다고,나약과 유혹과 격정과 비참은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15 내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모든 것이 권리를 잃게 되는데, 그것은 내 뜻이 모든 것을 지배하며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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