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 관상기도회 (1)
2014년 4월 1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문호영 프란치스코 신부
<지금 방금 우리가 들은 천상의 책 2권 50장은 짧은 내용이지만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해도 우리 마음 안에 자꾸 남을 나쁘게 판단하고, 비방하고, 험담하고 그러한 일들을 계속 우리가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결심하고 다짐하고 고해성사를 보고해도 남의 그 험담하는 것 또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쁘게 판단하는 것 이게 너무 비일비재하게 우리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또 우리 어떤 신자들은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하니까 아예 그것은 죄라고 생각도 안하고 고해성사도 안보는 신자도 있습니다. 아예 고해성사를 안봅니다. 고해성사를 안 본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안보는 경우가 있고, 고해성사를 봐봤자 계속 똑같은 죄를 지으니까 아예 안 본다. 이렇게 해서 안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남의 험담을 하고, 남을 나쁘게 판단하고, 나쁘게 생각하고, 추측하고 이런 일을 계속하는 한 영적인 진보는 없습니다. 제로입니다. 제로. 오히려 퇴보합니다. 잘해야 본전 그렇지 않으면 퇴보.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피정을 많이 하고 그래도 계속 남을 나쁘게 판단하고 있는 한 왜, 우리가 영적 진보를 못하는가하면 내가 남을 나쁘게 판단하고 있는 한 하느님께서도 나를 나쁘게 판단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나쁘게 판단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은총을 주고 어떻게 영적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판단이 정말 우리에게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가? 그때 이제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남에 대해서 험담하는 것은 정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속임수에 자꾸 빠지게 되는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하고 어떤 행위나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지성으로 그것에 대해서 분석하고 추측해서 판단을 탁 내리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구분을 못합니다.
그다음에 또 우리가 구분을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객관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한 잘못된 행위하고, 그 사람이 원래 지니고 있는 인격의 소중함하고 이것은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그 죄와 잘못과 함께 그 사람의 인격의 소중함까지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완전히 이렇게 죄와 동일시한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멋있는 집이 있습니다. 아주 골조를 튼튼하게 했고 하자도 생기지 않고 튼튼한 집입니다. 아름답고 잘 꾸며진 집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아서 먼지가 많이 끼었습니다. 그리고 벌레들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을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곰팡이도 절대로 끼지도 않고 썩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까 먼지가 너무 많아서 너무 지저분합니다. 그리고 벌레들도 많아서 냄새도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집을 싹 청소를 하면 원래의 모습이 됩니다. 바로 우리 인간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거룩하고 그렇게 곰팡이 피지 않고 그런 상태인데 죄라고 하는 먼지가 이렇게 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먼지만 털면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그 아름다운 그 집에 들어가서 먼지가 막 쌓여있고 냄새가 나니까 이 집은 못 쓰겠어, 이집은 다 부숴버려야 돼 그렇게 생각하고 집을 부순다고 하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이것과 똑같다고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기본으로 먼저 생각을 해야 되고, 그다음에 2절을 한번 보시죠.>
천상의 책 2권 50장 (1899년 7월 30일) : 이웃에 대하여 올바르게 행동하는 가장 안전한 길
1 매사가 거의 다르지 않게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는 것처럼 오늘 아침에도 나를 몸 밖으로 나오게 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로 갔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네 행위는 보지 않고 남들의 행위를 판단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2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웃에 대하여 올바르게 행동하는 가장 안전한 길은 그가 하는 행위를 아예 보지 않는 것이다.
보는 것,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판단하는 것 - 이는 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이웃을 봄으로써 너 자신의 영혼을 속이게 되고, 따라서 너 자신에게도 네 이웃에게도 또 하느님께도 올바른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천상의 책 2-50,2)
<예수님께서 남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얼핏 이해가 안갈 수가 있습니다. 아니 내가 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보지 말라는 것인가? 눈을 감고 살라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소리가 들리는데 죄짓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이것을 안 들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저절로 보여 지는 것, 저절로 들려지는 것 이것을 하지 말라는 그 뜻이 아니고 우리가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보려고 들으려고 하지마라 이 뜻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삶을 한 번 돌아봅시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나쁜 행동을 합니다. 나쁜 행동을 지금 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우리 귀에 나쁜 행동이 다 들어오면 우리가 즉시 눈을 돌리고 귀를 막습니까? 아니면 나쁜 행동이 딱 들어오면 계속 그것을 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계속 보는 것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보지 말라고 하는 지 한번 볼까요. 부끄러운 이야기를 조금하겠습니다.
이렇게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이 옷을 다 벗고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이 잠깐 열려서 지나가다가 문이 열린 틈으로 그 사람이 싹 보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빨리 얼굴을 돌려야지요. 빨리 돌려야 됩니다. 보인다고 그것을 계속 보고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목욕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옷을 벗었는데 그 사람은 지금 창피하지요.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면 창피하지요. 그 사람은 왜 창피한 것일까요? 육신의 창피함입니까? 영혼의 창피함입니까? 육신의 창피함이죠. 다른 사람이 이렇게 창피함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보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영혼의 부끄러움이죠. 그런데 그것을 파헤치고 보려고 그러느냐? 그때는 보지 말아야 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그러한 부끄러운 것을 몰래보려고 하는 것이나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잘못할 때, 그것을 끝까지 이렇게 보려고 하는 것이나 같은 이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예 보지마라!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보려고 할 때는 우리 안의 어떤 나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다음과 같은 글을 제가 읽은 적이 있는데 판단과 관련해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셨다. 우리 모두는 심판자의 위치에 있지 못할 뿐 아니라 남을 비판할 만큼 완전치 못하다. 오히려 내 결점이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판은 형제에 대한 살인 행위와 같으므로 남의 일을 말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이 난무하는 이유는 허물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며 비난하면서 쾌감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비행을 숨기거나 정당화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엔 아픔이, 사랑엔 희생이, 봉사엔 수고가 따르지만 비난은 빈말만 갖고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비난을 격려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을 할 때, 그때 판단은 무슨 판단인가 하면 인격적 판단입니다. 우리가 판단과 사실을 확인하는 것 이것은 구분을 해야 됩니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하고 인격적으로 판단하는 것하고 어떻게 구분하느냐?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난 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가지고 아, 누가 불을 냈겠구나? 라고 추측을 하면 그때부터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도둑질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것을 봤습니다. 일부러 보려고 본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봤는데 그 사람은 분명히 도둑질을 했습니다. 도둑질 한 것이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둑놈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도둑놈하면 이미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을 해야 합니다. ‘내가 도둑질 하는 것은 봤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도둑놈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 사람이 정말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남의 물건을 훔칠 수도 있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자기는 정말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물건을 훔칠 수도 있고 혹은 연극하기 위해서 훔칠 수도 있고 모르는 것입니다. 장난으로 할 수도 있고 잠깐 골탕 먹이기 위해서 놀리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고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단순하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욕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곁에서 볼 때 ‘이 새끼야!’ 하고 막 욕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 저 사람이 욕을 하는 것을 난 들었는데 저 사람이 욕쟁이인지 아닌지는 난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욕하는 것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은 욕쟁이구나! 이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학생 시절 때, 우리 형님이 계셨는데 친한 친구들이 집에 많이 놀러옵니다. 제가 옆에서 들어보면 서로 아주 굉장히 친합니다. 그런데 말을 할 때, 이 새끼 저 새끼예요. 야, 이 새끼야! 이렇게 그것은 서로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만약에 눈으로 직접보지 않고 문 밖에서 그 말을 들으면 어, 싸움을 하고 있나?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우리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사실의 확인과 판단.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판단을 말라고 하셨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에 대한 인격적 판단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그런 권리를 갖고 계시고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은 외적인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모르는 일을 아는 것처럼 하니까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우리 인간은 그런 판단을 못하느냐? 아니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성을 주셔서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판단 능력은 어떤 판단 능력이냐? 비인격적 조물에 대한 판단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이 좋다 나쁘다. 아, 저것은 나에게 유익하다. 유익하지 않다. 이런 것을 판단할 수 있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즉 인격을 가진 존재, 천사도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 인간에 대해서 그 인격 자체가 나쁘다 이렇게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좋다 라고는 판단할 수 있느냐? 좋다. 라고 판단하면 그게 잘못 판단할 수 있지만 남을 좋게 판단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좋게 판단하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데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보실 때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자, 법정에서 죄인을 고발당한 사람, 나쁜 일을 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을 변호사라고 그럽니까? 판사라고 그럽니까? 판사죠. 판사만이 판결의 권한이 있습니다. 변호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가능하면 판사가 형을 조금씩 하도록 가능하면 무죄를 선고하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판사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변호사입니다. 우리는 변호사 역할을 해야 됩니다. 변호사가 판사가 되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된다. 이것을 우리가 잘 생각을 해서 이와 같은 것은 우리가 한번 하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세상을 마치는 순간까지 계속 우리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원수가 생겼습니다. 나에게 엄청난 해를 끼친 원수, 그럼 저 원수도 나쁘게 판단하지 말아야하는가?
그와 같은 경우에서도 역시 제가 말씀드린 두 가지 구분 그 원수가 행한 일은 사실이죠. 그 사실은 확인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원수를 인격적으로 나쁜 죄인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도 얼마든지 새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어떤 은총으로 또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해서만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53장으로 갑니다.>
4 “딸아, 나는 네가 내 말을 간직하며 존중하기 바란다. 내 말은 내가 영원한 것처럼 영원하고 내가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까닭이다. 이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활용한다면 너는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말로부터 영원한 광채를 상급으로 받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 영혼에 하나의 빈틈이 생길 터이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게 빚진 상태로 머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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