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Confession) - 가경자 풀톤 쉰 대주교
오늘은 고해성사에 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여러분은 죄가 없으니 고해성사가 필요 없을 것이기에 중요부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이야기로서 시작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몰란 신부님께서 어느 저녁 고해성사를 주고 계실 때, 한 어린 소년이 고해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오후에 어린이들 고해성사를 주고 있을 때 왜 오지 않았니?" 신부님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어서 죄를 지을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청중 웃음)
캐나다에서 벌목꾼 한 무리가 고해소에 가기로 했는데, 그들은 최근 몇년간 성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대담한 이를 골라 고해소에 먼저 들여보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살인을 했습니까?" "그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양심성찰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이니 고해소 밖에 가서 다시 성찰하고 오십시오."
그는 고해소 밖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동료 벌목꾼들에게 말했다.
"가자구. 이 신부님은 살인죄만 취급하신대." (청중 웃음)
언젠가 내가 고해성사를 주고 있었는데, 고해소에 한 소년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말한 것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땅콩을 늪에 밀어넣었어요." 나는 그 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죄를 다 이해할 만큼 내가 신학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소년이 들어와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 소년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약 열명에서 열두명 정도가 들어와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소년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너도 땅콩을 늪에 밀어넣었다고 말할 것 같은데?"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땅콩이예요!" (청중 웃음)
여러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군요. 하지만 하루종일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 이제는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죄의식과 죄를 부인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환자일 뿐입니다. 통회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캔사스의 메닌저 연구소(역자 주: 미국의 유명한 정신의학 연구소)의 칼 메닌저 박사는 "죄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라는 저서를 저술했습니다.
윤리신학자들과 교리문답은 죄를 저버리는데 이 정신과 의사가 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학자들이 죄를 저버리면서, 변호사들이 이를 가져갔고, 이는 일종의 "범죄"가 되었습니다.
원칙주의자들이 죄를 저버리면서, 정신과 의사들이 이를 가져갔고, 이는 "콤플렉스"가 되었습니다.
죄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와 죄책감을 억누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봅시다.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고,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여성들도 똑같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 그리고 때로는 신체에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표면으로 떠올려 인식하지 않고, 주님께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여러분은 신장, 심장 등 인체의 장기이식이 부적합으로 실패한 예를 아실 겁니다. 이는 우리 몸의 항체(抗體, antibody)로 인해 이식되는 개체가 동화(同化, assimilate)되지 않아 인체가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비슷합니다. 영혼에도 항체가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죄가 들어오면 우리는 불안해지고, 마음은 불행합니다. 이는 마치 부러진 뼈에서 통증이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기에 아픈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불편해집니다. 술이나 다른 유희로 이를 잊으려 할 수도 있겠지만, 고요한 가운데, 죄책감은 그대로 있습니다.
유명한 세익스피어의 희극 "맥베드"에서 죄책감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봅시다.
정신의학이 등장하기 수백년 전 세익스피어는 이미 맥베드를 통해서 정신증(psychosis)을, 그리고 맥베드 부인을 통해 신경증(neurosis)를 각각 그려내고 있습니다.
맥베드는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왕을 살해한 후 자신의 눈앞에서 늘 단검이 떠다니는 것을 봅니다. 이는 정신증으로서 그의 죄의식이 분출되는 방법이었습니다. 맥베드 부인은 손에 묻은 피를 씻기 위해 매 15분에 한번씩 손을 씻습니다. 세상의 모든 바닷물조차 그 피를 씻어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죄의식을 억압한 마음의 영향입니다.
나는 아무런 이유없이 건강이 쇠약해지는 한 남자를 그 동생의 부탁으로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꼭 헌금통에 돈을 넣을 때마다 그 액수를 다시 채워 넣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돈을 훔친 적이 있는지 물었고, 그는 깜짝 놀라며 부인했지만 결국 인정했습니다. 그는 3천불을 도둑질했고, 그의 행동은 그 죄책감을 억압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훔친 돈을 돌려주자 그의 건강은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미국에서, 수많은 여성들에게서 낙태로 인한 죄책감이 오랜 시간이 지나 표면화될때 얼마나 많은 정신이상을 호소하는 여성들을 우리가 가지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수년이 지나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죄책감은 드러날 것입니다. 당장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구약성서의 다윗의 경우에서도 매우 명확합니다.
다윗왕은 어느 오후 궁전에서 산책 중 건너편 저택에 있는 밧쎄바를 보게 되어 그녀를 그의 궁으로 불러 정을 통하였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밧쎄바의 남편 우리야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는데, 다윗왕은 밧쎄바의 잉태의 원인을 남편에게 돌리기 위해 전쟁터에서 우리야를 불러내 아내에게 가라고 합니다. 그는 전쟁중이라는 이유로 거부했고, 다윗이 그를 만취시킨 상태에서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를 최전방에 배치하여 전사하게 만들었고, 그 후 밧쎄바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다윗은 약 6~7개월 후 예언자 나단이 찾아올 때까지 이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왕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작은 양 한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옆집에 사는 부자가 이 양을 훔쳐서 자신의 부자 친구들에게 대접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왕은 갑자기 사회정의에 투철해져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오. 그는 목숨으로 그 댓가를 치르고 훔친 것의 4배로 배상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단 예언자는 "그대가 바로 그 사람이오! 당신은 우리야에게서 밧세바를 빼았았소" 라고 합니다. 이때가 다윗이 유명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로 시작하는 시편 50편(혹은 51편)을 쓴 때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안의 부족한 정의(want of justice)를 사회정의에 대한 커다란 사랑으로 은폐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시몬의 잔치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왜 이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유다가 주님을 공격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나는 산상설교에서 선생님이 가난한 자들은 복되다고 한 것을 들었는데, 제리코와 예루살렘의 길에서 판자집에서 사는 가난한 이들과, 가파르나움의 가난한 어부들을 잊었습니까? 선생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은 어디로 갔습니까?"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사도들의 공금을 횡령하고 있었고, 그는 이를 사회 정의의 표출로서 은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책감을 억압하면, 용서받기 전까지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받으면 죄책감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주님의 자비와 믿음의 충만함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죄가 용서받습니까? 고해성사를 통해서입니다.
고해성사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벌거벗음(nudity)입니다. 모든 핑계와 가식과 게으름과 거짓을 벗어버리고 주님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성찰과 고해성사를 뒤로 밀어놓는 것과 비례해서 동시에 세상에서 신체적인 벌거벗음이 증가하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를 잠시 연구해 봅시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있었을때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수치스러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몸이 하느님의 은총의 기운(aura of grace)으로 둘러싸여 밝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떨어지면서 그들은 은총을 상실했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옷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수치가 어떻게 가려졌습니까? 하느님께서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1. 하느님께서 손수 무언가를 하셨고, 2. 동물이 죽었으며, 이는 대리적(代理的, vicariously)으로 이루어졌고, 3. 피가 흘려졌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전 구약성서를 다 동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간관계상 하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들은 은총을 상실했기 때문에 벌거벗은 상태에서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현대에 우리 사회는 벌거벗음을 다시 들여오고 있습니다. 이는 갈바리 동산을 오르지 않고서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고해성사란 무엇입니까? 일종의 벌거벗음입니다. 현대에 유행하는 피부가 아닌, 도덕적인 나신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 상태에서 "주님, 이것이 저의 본모습입니다. 저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해성사를 할때 인간 쓰레기(human garbage)의 재활용(recycling)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오늘날 쓰레기 재활용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 쓰레기 재활용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고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사제를 통해 죄를 사함받을 때마다 항상 나타나는 죄의 효과(effect)가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 있는 어린이들이 엄마의 말을 듣지 않는 등 무언가를 잘못할 때마다 나무판에 못 하나씩을 박아야 한다고 해 봅시다. 이후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엄마가 그 잘못을 용서해 주면서 "이제 그 못을 뽑아라" 한다면 무엇이 남습니까?
네, 맞습니다. 못으로 뚫린 구멍이 남습니다. 이것이 죄의 효과입니다. 따라서 죄가 용서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배상하는 행위를 해야 하며, 이것이 못으로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보속을 받는 이유입니다.
고해성사로 인하여,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함으로서 인생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영국 런던의 성 패트릭 성당에 오던 어느 남자가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내가 성당 문을 열면 그는 아침 7시쯤 나와 뒷자리에 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책도 없이 기도를 하다가 9시가 넘으면 영성체를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밤에 성당 문을 닫을 때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하고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몇 달동안 이를 관찰한 후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전에도 지금처럼 이렇게 착하게 살았습니까?" 이는 그를 실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가 "예"라고 한다면 나는 그가 전혀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받은 은총에 비하면 나는 예전에 비하여 몇 천배나 더 나쁩니다."
그리고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신발을 저당잡히고 술을 마실 정도로 심한 중독이었으나 매번 재의 수요일이면 술을 끊기로 맹세하고 부활절까지 그를 지켰습니다. 그는 몇년동안 이를 지켰습니다. 그러던 중 "내가 40일동안 술을 끊고 착하게 살 수 있다면, 40년동안 착하게 살 수도 있을텐데" 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40년동안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성당에 들어가서 신자석 앞줄에 앉아서 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런던 코벤트 가든 구역에서 성당구역까지 들어가는데는 세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성광을 들고 성체 강복을 시작하려는 순간, 그에게는 평생 그에게 닥쳤던 유혹을 합친것보다 더 큰 엄청난 술과 악에 대한 갈망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는 고통이 너무 커서 참을 수가 없어서 신자석을 뛰쳐나가 중앙통로를 달려 그 세 개의 계단위에서 비틀거렸습니다. 성체 강복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는 마음을 찢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고해성사를 보겠습니다."
그 때 고해를 한 후 그는 지금까지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기도합니까?" "18시간 정도 합니다."
"(기도가) 잘되는 날은?" "24시간이요."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을 때와 같은 허름한 곳(dive)에 살고 있었는데, 많은 밤들을 무릎을 꿇고 세상의 모든 알콜중독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 쓰레기의 재활용입니다. 주님께서 "99명의 의인보다 1명의 죄인의 회개를 천국에서 더 기뻐한다"고 하신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밤 사제관에 찾아온 두명의 소녀로부터 뉴욕 허드슨 강 옆의 아파트로 즉시 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키티가 죽어가고 있어요" "키티가 누구인데?" " 그앨 모르세요? 모든 사람이 그앨 알아요."
나는 그녀의 병에 대해 물었고, 그들은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종부성사를 위한 성체와 성유를 가지고 우중충한 5층 계단을 올라, 내가 평생 본 중 가장 더러운 방 중 하나에 들어섰습니다. 고기와 기름, 종이와 걸레가 바닥에 나뒹굴었고, 한쪽 구석의 더러운 간이 침대(cot)에 매우 아파 보이는 한 소녀가 누워 있었습니다.
"너 괜찮니?" "네, 모든 사람이 절 알아요." "키티, 이제 주님과 화해를 할 준비가 되었니?"
"아니요, 왜냐면 나는 뉴욕에서 가장 나쁜 여자애거든요."
"아니야, 키티. 왜냐면 뉴욕에서 가장 나쁜 여자애는 자기가 뉴욕에서 가장 착한 아이라고 할테니까."
나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거부했습니다.
"안돼요. 나는 너무 썩었어요. 시퍼렇고 검은 이 팔을 보세요. 남편의 짓이예요. 내가 거리에서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나를 때리거든요. 그 사람이 나에게 독약을 먹였어요. 난 독살되어 죽어가요."
나는 복음서에서 주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었고, 마침내 그녀는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성유 도유는 하지 못하였는데, 그녀에게 주님의 자비를 확신시키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 사이 독약은 그녀의 뇌의 여러 부분에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녀는 자기의 신체 기관들을 잃어버린다는 생각 속에서 자기 어머니에게는 귀를, 친구에게는 눈을, 다른 친구에게는 혀를 준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유를 도유하자 그녀는 곧바로 회복하였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미안해, 키티.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구나."
그녀는 말했습니다. "네, 제가 좀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지요."
그 이후로 그녀는 그가 함께 일하던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토요일 밤 고해성사를 위해 앉아 칸막이를 열면, "신부님, 이 애가 키티가 말씀드린 그 여자애예요"
"이 애가 키티가 말씀드렸던 남자애예요." 하면서 아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밤 사제관에 있는데 키티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지금 사람을 죽인 여자애가 하나 있어요" "어디 있는데?" "성당안에 있다고 했거든요"
"거긴 잠겨 있는데?" "그렇다면 길 건너편의 현관에 앉아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문으로 가서 그 아이를 오도록 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죄를 용서받은 후 자비의 사도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고해성사의 혜택을 누려왔습니다. 우리의 짐이 무거워질 때 주님께 갈 수 있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외부적 표지까지 받습니다. 이 외부적 표지들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부인(denial of sin)입니다.
내가 장님이면서 빛이 없다고 믿으면 내가 영영 볼 수 있겠습니까?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면서 소리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내가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죄악보다 더 나쁜 것은 죄의 부인이며 이것이 우리의 생을 대하는 현대의 태도입니다.
그리하여 영혼이 어지러울 때, 주님께로 가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고, 당신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좋은 목욕만큼 생기를 주는데 좋은 것이 없는 것처럼, 죄의 용서만큼 영적으로 생기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고해성사의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무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께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위로가 되는 이 한 마디를 남기겠습니다.
여러분이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결코 구세주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멘.
(transcribed & translated by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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