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건 부제의 열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7월 23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을 신부님,
저는 모든 준비를 끝낸 후 11명의 신자와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이들 가운데 4명만 사공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바다를 구경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비밀리에 급히 추진하다 보니 유능한 사공을 구할 수도 없었고 그 밖의 요긴한 물건들도 장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음력 3월 24일에 돛을 펴고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신자들은 바다를 보고 매우 놀라면서 수군거렸으나 감히 저에게는 묻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제가 하는 일에 대하여 질문하지 말라고 미리 금지해 두었던 때문입니다.
처음 하루 동안은 순풍을 만나 무사히 항해했으나 그후 갑자기 비를 동반한 폭풍우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폭풍우로 말미암아 강남과 상해에서는 30척 이상의 배가 유실되었다 합니다. 우리가 탄 배는 바다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작은 배였는데 폭풍우가 점점 심해지자 파도 때문에 몹시 까불리고 무섭게 내팽개쳐져서 거의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 뒤편에 끌고 오던 종선 줄을 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위험이 여전히 계속되므로 두 개의 돛대를 베어버리고 마침내 식량까지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가 조금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폭풍이 부는 대로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려 요동을 쳤습니다.
신자들은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극도로 탈진하였고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보고 절망하여 "이제는 다 끝났다.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겠다." 하고 서글피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로 가능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저 역시 신병중이라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서 일을 보았고 마음속의 두려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으뜸 사공으로 채용한 사람은 벌써부터 영세 준비를 하고 있던 외인이었기에 저는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거센 물결에 키가 부러져 떠내려갔고 배는 폭풍과 파도에 까불리며 대양으로 떠밀려 갔습니다. 그래서 물결을 막으려고 돛들을 묶어가지고 배 뒤에 달아매어 물에 띄었는데 그것마저 그만 줄이 끊어지면서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배 밑에 깔았던 나무토막을 멍석에 싸 묶어 띄웠으나 그것 역시 파도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우리의 희망을 오직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의탁하고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비도 그치고 풍파도 약해져 있었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우리는 기운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든 이에게 음식을 먹고 주님 안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라고 명했습니다.
이렇게 원기를 회복한 후 우리는 항해를 계속할 준비를 하려 하였으나 돛대도 없고 돛도 없고 키도 없고 종선도 없어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영화로우신 우리 동정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배에 남아 있던 나무를 있는 대로 다 거둬 돛대와 키를 만들었습니다. 대략 닷새 동안 역풍을 거슬러 항해하였더니 우리는 강남성 해안에 도착하였고 멀리 산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돛대도 변변치 않고 항해하는 데 필요한 물건도 부족하여 상해까지 갈 수가 없어서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구원을 청하거나 적어도 길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으나 종선이 없어 그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한테 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보고 피해 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인간의 구원을 바랄 수가 없게 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산동 배 한 척이 나타났는데 우리를 보고서는 두려워하여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저는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다가오려 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는지 우리한테로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배에 올라가 선장과 인사하고 나서 우리를 상해까지 인도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설명도 간청도 들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와 함께 산동으로 가서 관례에 따라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되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북경을 거쳐 귀국하고 싶지는 않고 배를 고치기 위해 반드시 상해로 가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돈 천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겨우 저의 청을 승낙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배를 그 배에 달아매고 대략 8일 동안 줄곧 역풍을 거슬러가다가 또 폭풍우를 만났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고 가던 선장의 배는 파선하여 한 사람만 살고 그 외에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 폭풍우가 지나고 다시 항해를 하는데 이번에는 해적들이 우리에게 달려들며 선장을 향하여 "조선 사람들의 배를 끌고 가지 말라. 우리가 그들을 약탈하련다."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선장에게 그들을 폭파시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해적들은 우리를 떠나 달아나 버렸습니다.
약 7일 후에 오송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국 관장이 경찰관들을 우리에게 보내어 어디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왔느냐고 심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조선 사람들인데 큰 폭풍우를 만나 여기까지 표류하여 왔고 상해로 가서 배를 수리할 작정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 영국 함선의 함장들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우리는 조선 사람들이며 선교사 신부님을 찾아왔노라고 설명하고는 우리를 중국인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또 영사관으로 안내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친절했고 저의 청을 기꺼이 승낙할 뿐 아니라 포도주와 고기도 내어주고 또 저를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송구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그곳 관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관장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우리 사정을 황제께 보고하여 육지로 조선에 되돌려 보내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두 나라 사이의 관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육지로 해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여기에 온 사실을 황제께서 아시게 되는 것도 원치 않으니 보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우리 사정을 황제께 보고하든지 말든지 우리에게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배를 수리한 다음에 조선으로 되돌아갈 터이니 아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우리가 다만 귀국 해안에 상륙해서 이 지방 땅을 밟고 이 지방 물을 마시는 것뿐임을 알고 계시면 넉넉하겠습니다. 나는 오직 완전한 자유를 가지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상해의 관장에게 조선 배한 척이 수리하러 그곳으로 간다고 통지하여 주십시오. 우리 배 때문에 상해의 관장이 조금이라도 귀찮거나 걱정되는 일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곤란하거나 불안한 일을 당하지 않고 상해에 머물러 있게 허락하여 주도록 그 관리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중국 관장은 제가 영국인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영국인들과 절친한 친구처럼 지내고 영국말까지 알아듣는가." 하고 말하면서 대단히 놀라워하였습니다.
오송구에서 출범하여 상해 항구로 들어갔습니다. 두 명의 영국인들이 와서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배를 중국인 안내자에게 맡기고 영국인들의 종선을 타고 상해 시가지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영국인들에게 저를 영사에게로 인도해 줄 안내자를 구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아서 존 엠슨이라는 영국인이 프랑스어를 할 줄 알므로 저를 위하여 영사에게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저는 영사관에 들어가 매우 환대를 받고 우리가 필요한 모든 사정을 영사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를 중국인들의 손에서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이 우리가 갈 거라고 영사에게 미리 말씀해 두셨고, 보호해 주도록 부탁해 두셨기 때문에 영사는 벌써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중국인 신자 집으로 가서 이틀 동안 유숙하고 있는데 강남 전교지의 전교사인 고틀랑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그 신부님에게서 5백10원을 받았는데 그 중에 4백 원은 우리를 인도해 준 중국인 인도자에게 주고 약 30원은 신자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는 동안 상해의 중국 관장이 경찰관을 우리 배에 보내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 파수꾼을 두어 밤에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시장도 몸소 경찰관을 거느리고 와서 배를 보고 돌아가더니 쌀 20말과 고기 20근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배로 돌아오니 신자들이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국 관장이 여러 가지로 심문하고 또 수천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던 까닭입니다. 중국 관장은 제가 배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다시 경찰관을 보내어 무슨 이유로 여기 왔으며 각 사람의 성명, 연령, 거주지 등을 조사하였습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대답을 한 후 중국 관장에게 더 이상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쌀과 고기를 돌려보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한두 번 중국 관장을 면회하였습니다.
상해의 관장은 우리에 대한 모든 사실을 송광부의 상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관은 자기가 저를 알고 있으며(아마 제가 세실 함장과 함께 있었을 때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대로 상해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답서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한갓 호기심으로 너무나 많이 몰려들었으므로 저는 작대기로 그들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제게 너무 무례하게 행동한 경찰관을 엄히 책망하였는데, 그들은 관장한테서도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해 주민들은 저를 큰 인물로 여기고 있으며 중국 관장은 제가 영국인과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체불명의 이상한 존재라 하여 많은 의혹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 번은 관장이 경찰관을 보내어 우리보고 언제 떠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는 배를 고치기 위하여 여기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하오. 그뿐 아니라 당신들의 상급 관장한테서 들은 말인데 얼마 후에 세실 함장이 여기 온다고 하니 나는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도 더 머물러 있어야 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중국 관장은 우리 때문에 관직을 잃을까 봐 두려워 우리가 출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모든 사정을 다 설명드릴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그럴 시간도 없어서 이만 줄입니다. 이미 배는 수리하였고 지금은 종선을 만드는 중입니다. 저희 모두는 주님의 은혜로 잘 있습니다. 조선 대목구장 주교님의 도착을 날마다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경하올 베지 주교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길에서 병이 나셨다고 합니다. 남경에서는 작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영국 영사도 안녕하시고 우리 사정을 지극히 잘 주선해 주고 계십니다.
사공들과 조선 선교지를 위해 수고를 많이 한 신자들에게 선사하기 위해 상본과 패를 보내주시기를 신부님께 청합니다. 특히 성학자 토마스, 성 가롤로, 우리 주님의 양부이신 성 요셉, 성 요한 사도의 상본과 십자고상 상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부님께 드리려고 조선 물건 몇 가지를 가지고 왔으나 지금은 보내드릴 적당한 방법이 없어 주교님이 오실 때 보내드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선교지로 보내실 물건들은 모두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여러 신부님들께 편지하실 때 저의 인사도 전해주시 기를 바랍니다.
벌써 신부님께 편지를 올렸어야 마땅한데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지내느라 못 올렸습니다. 더구나 고틀랑 신부님이 여기 있는 보고서를 한 번씩 읽어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상서가 늦었습니다.(김대건 부제가 가지고 온 보고서는 그가 서울에서 1845년 3월과 4월에 쓴 조선 초기 교회사와 1839년 박해 때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에 가서 팔 수 있는 물건들은 여러 가지 색깔, 특히 흰색 서양포목과 여러 가지 색깔의 명주, 여러 가지 색, 특히 붉은색과 푸른색의 중국 포목과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곳 신자들이 모두 신부님께 인사드립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하고 무익한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추신 : 1845년 7월 23일 저는 페레올 주교님께 짧은 편지를 올렸습니다. 만일 주교님이 거기(마카오)에 안 계시고 출발하셨다면 신부님께서 그 편지를 읽으시고 원하시는 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출처: 한국성지와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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