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시

II 52. 드고아 근처에서 예수와 이사악. 에스드렐로으로 출발하다

Skyblue fiat 2020. 3. 16. 17:29

 

 

“그런데 선생님께 말씀드리지만 제일 착한 사람들은 소박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상대한 사람들은 멸시와 무관심밖에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 유다의 하층민들!” 이사악이 예수께 말씀드린다. 모두가 강가 풀 위에 모여 있다. 이사악이 보고를 하는 것 같다.
유다가 끼어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목자의 이름을 부른다. “이사악, 나도 당신과 같이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시간과 믿음을 잃었습니다. 나는 포기해요.”


 “나는 포기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때문에 괴로워요. 나는 선생님이 중지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단념하지 않겠어요. 나는 진리에 충실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데에 여러 해 전부터 습관이 돼 있어요. 나는 권력자들의 뜻에 맞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 그 사람들이 제 초라한 불구자의 집에 얼마나 여러 번 찾아와서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예수님이 갓난 아기로 태어나신 구세주가 아니라고 말하면 저를 구제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아이고 ! 그건 틀림없이 거짓 약속이었습니다만- 저를 조롱했는지 아십니까? 그렇지만 저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제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고, 제 오직 하나인 바람을 죽이는 것이고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 주님인 선생님을 배척하다니 ! 어두운 제 비참 속에서 저는 항상 별이 총총한 하늘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고아로서의 제 인생의 유일한 기쁨인 제 어머니의 얼굴과 제 아내가 되지는 못했지만 제가 죽음을 넘어 사랑을 간직한 신부감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작은 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대단히 깨끗한 달과 같은 더 큰 별 둘이 있었습니다. 그 두별은 갓난아기와 보잘 것 없는 저희들 목동에게 미소를 보내는 요셉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의 하늘 한가운데에는 선생님의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거룩하고 또 거룩한 얼굴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것인 이 하늘을 물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존재할 수 있는 중에서 가장 깨끗한 그 하늘의 빛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축복받은 제 추억인 갓난 예수아기를 물리치느니보다 차라리 많은 고통 가운데에서 제 목숨을 버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악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미소지으신다.


유다가 또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계속하겠다는 겁니까?”


“나는 오늘 계속하고 내일 계속하고 또 언제까지나 계속할거요. 누군가가 오겠지요.”
“그 일이 얼마 동안이나 계속될 것입니까?”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앞쪽도 바라보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그날 그날 일하는 거지요.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성공했으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고, 그렇지 못했으면 ‘내일은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을 바라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현명하군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병 중에서 하던 일을 내가 받은 사명 중에서도 하는 것입니다. 거의 30년 동안의 불구, 이건 짧은 시간이 아니오.”
“그야 그렇지요 ! 나는 아직 나기도 전에 당신은 벌써 불구가 되었으니.”


 “나는 불구였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 세월을 세어보지 않았어요. 나는 ‘니산(Nisan)달이 돌아왔는데도 나는 장미꽃들과 같이 다시 꽃이 피지 못하는구나. 다시 티쉬리(Tisri)달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 쇠약한 채로 있구나’ 하고 말한적은 한번도 없었지요. 나는 그저 나 자신과 좋은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한 말을 하면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어요. 언젠가 어린아이들이었던 사람들이 혼인잔치 때와 그들의 아기났을 때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기 때문에 나는 세월이 가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 뒤를 돌아본다면, 늙은 내가 다시 젊어진 지금 과거에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그건 다 지난 일입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늘에는 이사악, 너를 위해 ‘모든 것이’있고 그 모든 것이 너를 기다린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한다. 즉 단행하는 것이다. 지겨워하지 않고 무기력도 인간의 교만의 뿌리이다. 서두르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왜 느린 것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지느냐? 그것은 교만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게 거절해? 나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 이것은 하느님의 사도에 대해 결례하는 것이다’ 하고. 그렇지 않다 이 세상 만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생각하여라. 사람의 발달을 생각하고 그 기원을 생각하여라. 우리가 있는 이 시간을 생각하고, 그보다 먼저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갔는지 계산해 보아라.

 

  창조된 세상은 조용한 창조의 결과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렇게나 우주를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단계적으로 진행하셨다. 현재의 인간은 참을성있는 진보의 결과이고, 지식과 능력이 점점 더 진보할 것이다. 그런데 그 지식과 능력은 사람들의 뜻에 따라서 거룩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루아침에 유식하게 되지 않았다. 낙원에서 쫓겨난 첫째 조상들은 모든 것을 천천히 점진적으로 배워야 했다. 가장 간단한 것까지도 배워야 했다. 어떻게 밀알이 가루가 되고 반죽이 되고 익혀지면 맛이 더 좋은지 따위. 짐승들의 털을 보고 옷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배워야 했고, 새둥지를 관찰하고 잠자리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배워야 했다. 본능의 충동을 받은 짐승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관찰하면서 풀과 물을 가지고 치료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별들을 관측하고 말들을 길들여서 사막과 바다를 건너 여행하는 것을 배우고, 강물 위에 떠 내려가는 호두껍질이 가르쳐주는 작은 배의 균형을 배워야 했다.

 

  성공하기 전에는 실패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 그러나 성공이 오고, 또 그 성공을 지나친다. 그렇다고 사람이 더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선보다는 악에 더 능란해지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는 할 것이다. 구속은 참을성의 일이 아니냐? 수많은 세월 이전에, 아니 시간의 한계 그 이전부터 결정되었는데도, 오랜 세월 이 준비한 시간이 지금에야 온 것이다. 모든 것이 참을성의 문제이다. 그런데 왜 초조해하냐?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눈깜짝할 사이에 만드실 수 있지 않았느냐? 하느님 손에서 나온 이성을 가진 사람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알 수 있지 않았느냐? 나는 또 긴 세월이 시작될 때에 올 수가 있지 않았느냐?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갑작스러워서는 안된다. 아무것도. 폭력은 언제나 질서와 반대된다. 하느님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질서이다. 하느님보다 낫게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지 말아라.”


 “그러면 선생님은 언제 알려지시겠습니까?”
“누구에게 말이냐, 유다야?”
“그야 세상에 말이지요 !”
“결코.”
“결코 알려지지 않으신다구요? 하지만 선생님은 구세주가 아니십니까?”


 “나는 구세주이다. 그러나 세상은 구원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 세상은 천에 하나의 비율로 나를 알고자 할 것이고, 또 만에 하나의 비율로 실제로 나를 따를 것이다. 이것마저도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내 친구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을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생님과 가까운 친구라면 선생님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 유다야. 그들은 나 예수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 예수로는 알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누구라는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잘들 들어두어라. 나는 내 모든 친구에게 알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안다는 것은 성실하게 덕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뜻이다.‥‥그런데 나를 알지 못할 어떤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장차 당신이 배반당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실 때에 항상 하시는 낙담한 체념의 몸짓을 하신다. 손을 펴서 손바닥이 바깥쪽으로 보이게 드신 채로, 사람도 하늘도 보지 않으시고 다만 배반당한 사람으로서의 당신의 미래의 운명만을 바라보시는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계시다.


“선생님, 그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하고 요한이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희들은 선생님을 점점 더 잘 알기 위해서 선생님을 따릅니다” 하고 시몬이 말하고 시몬과 같이 목자들도 말한다.
“저희들은 선생님을 아내와 같이 따르고, 선생님은 아내보다도 저희들에게 더 소중하십니다. 저희는 선생님을 아내보다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고 !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벌써 선생님을 하도 잘 알아서 선생님을 못알아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그러면서 유다는 이사악을 가리킨다) 선생님의 갓난 아기 때의 추억을 배반하는 것이 그에게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때에 갓난 아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어른으로서의 선생님, 스승으로서의 선생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선생님의 하시는 일을 봅니다. 선생님과의 접촉, 선생님의 숨결, 선생님의 입맞춤은 끊임없는 축성이고 끊임없는 정화(淨化)입니다. 선생님의 친한 친구가 되고 나서는 오직 사탄같은 사람이나 선생님을 배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야,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이다.”
 “그자에게 불행이 있으라 ! 저는 그에게 재판관이 되겠습니다.”


 “아니다, 재판을 하는 것은 아버지께 맡겨드려라. 너는 그의 구세주가 되어라, 사탄에게로 가는 그 영혼의 구세주가 되란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사악과 작별하자. 저녁이 되었다. 충실한 종인 네게 축복한다. 너는 이제 베다니아의 라자로가 우리 친구이고 내 벗들을 도와 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지. 나는 가지만, 너는 남아서 유다의 메마른 땅을 경작하여라. 그런 다음 내가 오마. 필요한 경우에는 나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알지. 내 평화가 너와같이 있기를 바란다. ”

그러시면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에게 축복하시고 그에게 입맞춤 하신다.

 

 

https://medjugorje.kr/?p=14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