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3~5ㄱ)
여기서 '세월이 흐른 뒤에'에 해당하는 '와예이 믹케츠 야임'(wayei miqets yaim;
in the course of time)을 직역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으로부터 이 일이 있었다'이다.
'세월'은 '한 날'에 해당하는 '욤'(yom)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야임'(yaim)이며,
이러한 '날들'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끝'에 해당하는 '케츠'(qets)가
있음을 보여 준다.
'흐른'으로 번역된 '믹케츠'(niqets)는 '끝'이란 뜻의 '케츠'(qets)에 '~으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이 결합한 형태로 '~의 끝으로부터'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심판을 다루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창세6,13; 에제7,2.3; 이사9,6).
그러므로 창세기 4장 3절은 단순히 세월이 흐른 어느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카인과 아벨을 평가하고 심사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카인과 아벨이 각각 자신의 수고에 따라 힘써 일하고 보냈던 날들이 마감되고,
하느님 대전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에 지켜볼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전개될 사건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정해진 때,
즉 카인과 아벨이 자신들의 수고에 따라 일한 것들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 검증받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물'에 해당하는 '미느하'(minha; offering)는 반드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선물을
나타낼 때에도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바치는 선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이 단어는 카인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존경과
감사를 돌려 드리기 위해 바치는 것이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카인의 제물을 하느님께서 굽어 보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제물을 바치는 대상인 하느님 당신께 대한 진정한 존경과
감사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히브11,4참조).
사람은 보통 겉모습을 보지만, 전지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의 정성을 보시고 이러한 제물을 굽어보시고 기꺼이 받아주시는 것이다
(1사무16,7참조).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직역하면, '그의 양 첫 새끼들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을'이다.
여기서 '맏배들'에 해당하는 '뻬코라'(bekora; some of the firstborn)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서 아벨은 새끼양 한 마리만을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여러 마리를 바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뻬코라'(bekora)가 '맏배'(첫 새끼; firstlings) 외에도 모든 '처음 난 것'을
가리키거나 그 말 속에는 '가장 뛰어난 것'이나 '우두머리'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리고 '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eb; fat portions)는 일차적으로 '지방'을
뜻하지만, '살찌고' '기름지며' '아름다운' 것이란 뜻도 들어 있다.
그래서 본문은 '그의 양 떼의 첫 새끼 몇 마리로부터 얻은 기름진 부분들'이나
'그의 가장 좋은 어린 양들로부터 얻은 고기의 기름진 조각들'과 같이
의역되기도 한다.
어쨌든 아벨은 형식적인 제사를 바친 카인과는 달리 정성을 다해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아벨의 태도는 하느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이며,
하느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겸손의 표현이다(히브11,4).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에 해당하는 '와이샤'(waisha; and looked with favor on;
and had respect)는 '기쁘게 받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아'(shaah)의 뜻은
'응시하다','둘러보다'이다.
특히 이 단어는 상대방을 돕기 위해 둘러본다는 뜻이 있으며,
'돌이키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응시하신 대상이 단지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 그 자신까지도 포함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아벨을 제물보다 앞에 단어를 위치시켜서
아벨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응시하심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정성껏 제물을 바치는 아벨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 보시는 것을 의인법적으로 더 친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유를 생각할 때 자신의 자유만 생각하지 하느님의 자유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카인과 아벨, 둘 중의 제물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는 당신의 절대선에서 나오는 무한히 완전한 자유요,
그르침이 없는 자유입니다.
카인의 죄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카인은 이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먼저 깨어졌으므로
형제간의 관계가 폭력과 살인으로 깨어지는 것입니다.
야휘스트 저자는 깨어진 형제 간의 관계를 복원하려면,
먼저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임언기 신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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