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
제3권. 내적 생활에 대하여
2. 내적 집중과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는 법
대부분의 영혼들은 세상과 피조물의 잡음 속에서 너무나 혼란한 상태에 있으며 그로 인해 사랑에 가득찬 하느님의 음성을 영혼 안에서 듣는 데에 방해가 되게 한다. 영혼은 하느님의 이 음성을 통해 완전한 마음의 순결과 하느님의 사랑에로 불리움을 받고 인도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휴식과 고요와 은거와 고독이 결핍되며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그를 꾀어내어 빈 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호세아 2:16)
만일 우리가 외적인 일에 완전히 몰두하지 않고 좋은 의도하에서 하더라도 거기에 푹 빠져들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한다면 정신을 집중하고 명상에 잠겨있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탄은 내적 생활 가운데에서 완적이라는 크고 중요한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을 만한 속임수로 우리의 내적인 것을 파괴하려고 꾀한다. 현명한 사람은 꺠어 있고, 주로 그의 내적인 것을 보존하려 한다. 그는 그의 외적인 사무에 너무 몰두하지 않고 다만 그의 내적 생활이 손해를 입지 않는 한도내에서 그 일을 수행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적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생활이 숨겨져 있고,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준수성범의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께로 향하고 이 가련한 세상을 끊어라. 그러면 네 영혼이 고요할 것이다. 바깥 사물을 가벼이 보고, 영혼 사정에 주의를 다하는 공부를 하라.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가 네 안에 이르는 것을 보리라.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다” (로마서 14:17). 바깥 사물을 가벼이 보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속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그분의 아버지께 대한 열렬한 사랑과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을 가벼히 보는 것을 배우게 되리라. 예수그리스도의 마음 속으로 들어감과 그 안에 머물음은 (요한 15:4 참조) 힘있고 놀랍게 작용하며, 내적 생활의 진보를 힘차게 촉진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알려지지 않았으며 낯설고 잊혀진 것이다.
영혼은 갖은 단장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고 (시편 44:14), 그곳에서 하느님은 영혼과 친교의 기쁨을 누리신다. 만일 영혼이 하느님의 합당한 거처가 되어 그분의 형상 안에서 변화되었다면, 그분은 자신 안에서 -영혼 안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영혼의 깊숙한 곳에 계시다는 것과 하늘에서처럼 그곳에 그분의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분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신다(마태오 5:8 참조). 그분은 스스로 끝없는 지복과 영광을 누리시면서 한없이 즐기신다. 그러나 영혼이 이 충만함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때때로는 그분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줍듯이 (마태오 15:27) 드물게 영혼은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된다.
내적인 사람은 그의 마음을 홀로 하느님께만 열어보이고 모든 피조물에게는 굳게 닫힌 동산(아가 4:12)과 같다. 그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관상하며, 또 흠숭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의 기쁨으로 충만되어 경탄한다. 만일 네가 하느님의 외아들과 모든 면에서 닮고, 네가 그분처럼 가난하고 멸시받고 고통받게 된다면, 너의 마음도 그분의 것과 똑같은 기쁨으로 채워져 너는 그분과 같이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2 고린토 1:5).
내적인 사람은 그가 할 수있는 대로 항상 모든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잠심 중에 있도록 한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쉽게 들어올려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으며 큰 고요 가운데 하느님을 즐길 수가 있다. “네가 만일 외적인 위로를 업신여긴다면, 너는 내적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말하였다.
현세 생활의 타락된 처지는, 우리가 만사에 끊임없이 죽어야 함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피조물에 대한 즐거움은 우리를 쉽게 하느님에게서 떠나도록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그것을 멀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쾌락을 거절할 성실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타락함과 묵은 습과과 변천하는 사물에 대해 애착하는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하는 극기를 귀찮아 하고 그것이 끊임없는 십자가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느님을 즐기는 한순간이 모든 고통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그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세심히 관찰하는 내적 인간은 경험에 의해서 육욕과 이성의 빛을 은총의 빛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 은총의 빛으로 한번 꿰뚫어 보게 되면 그에게는 육욕과 이성의 빛이 암흑과 같이 보인다. 누가 한번 하느님을 그의 마음 속에서 맛보았다면 피조물 안에서 어떠한 풍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하느님 외에는 어디서도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끝없는 하느님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적 덕행의 우월함, 예수님 가르치심의 숭고함과 그를 따르기 위한 수련 등은 영혼을 대단히 자극하며 그에게는 다른 모든 것이 불쾌하고, 공허하고, 생각할 가치가 없게 된다.
만일 영혼이 그의 눈을 내적 생활로 향하는데 습관이 되면 그는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끊임없이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과 더이상 헤어질 수가 없게 된다. 이때 영혼은 그분 안에서 자기가 모방해야 할 덕행을 더 많이 발견하면서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 않고 그분과 점점 더 밀접하게 결합된다.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피조물을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너를 찾으시고 너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려 하시는데, 너는 그분에게서 왜 멀리하려고 하느냐? 피조물들은 자주 너를 거부하는데, 너는 자신을 그들에게 주려 하느냐? 피조물이 그의 하느님을 멀리 해서야 되겠느냐? 하느님께서 너를 소유하시고, 네 안에서 거하시고자 하시며, 네 안에서 너를 통해 장신 자신을 관상하고 사랑하고 현양하기 위해 너를 그분 안에서 거처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너의 하느님에게서 멀리하고, 조성된 피조물의 혼잡함 속에 기꺼이 너 자신을 주려 하느냐? 얼마나 크나큰 착각인가! 너는 감히 하느님을 자기 안에서 찾아내는 모욕을 하느님께 가하려고 하느냐?
<오, 나의 하느님!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당신을 떠나서 살았고, 또 이렇게 오랫동안 내 자신을 당신께 맡기기를 망설였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요! 이제 내가 당신을 발견하였으니, 아무것도 더 이상 나를 당신과 당신 사랑에서 떼어놓지 말게 하소서. 하느님! 내가 당신을 저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죽게 하소서. 왜 당신은 이 가련한 피조물을 찾습니까? 당신께 부족한 것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풍요 자체가 아니십니까?>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 요안느 베르니에 루미니 지음/ 성 글라라 수도원 / 크리스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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