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카를로스신부님-피정

제 33강의 : 정릉4동 성당 특별강의 미사강론 (2010. 9. 18)

Skyblue fiat 2015. 2. 10. 12:43

정릉4동 성당 특별강의 미사강론

(2010. 9. 18. 정릉4동 성당)

 

 

  33. 미사강론

 

 친애하는 이범주 신부님, 서 요셉 신부님, 박 수녀님, 그리고 여기 모인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묵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 제가 청합니다. 오늘 이 토요일에 여러분 모두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성모님께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자매 루이사 피카레타에게도 우리를 위해서 전구해 달라고 청합니다. 루이사의 도움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 뜻의 무한한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여러 번 부탁하셨습니다.

 “주의를 기울여라. 주의를 기울여라. 그리고 모든 것, 모든 행위들을 다 내 뜻 안에서 행하여라. 내 거룩한 뜻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내 뜻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리고 내 뜻 안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이 또 내 뜻 안으로 돌아와야 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루이사와 함께 여러분께서 모든 것을 주님의 뜻 안에서 하도록 또 부탁합니다.

 

 저는 신부님들 피정을 위해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 피정을 조직해 주신 이범주 신부님, 백 제랄드 신부님, 서 요셉 신부님에게도 감사드리고 그 피정을 통해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나게 된 것, 여기 온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날들을 가질 수 있게 지금 우리 뒤에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부님들 피정 또 우리의 이 모임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다른 경우에도 보통 교회 안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신부님들만 많이 모여서 피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쉬운데 신부님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신부님들은 다 본당을 맡으셔서 사목하시고 또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바쁘신데 그런 바쁘신 신부님들이 한 곳에 모여서 피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하느님 뜻의 피정을 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피정을 우리가 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느님 뜻의 큰 선물에 대해서 아시는 신부님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신부님들도 하느님 뜻에 대해서 알기 시작하시는 중입니다. 저는 우리 신부님들이 모여서 하느님 뜻에 대한 피정을 하는 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아는 유일한 한국말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멕시코에서 온 카롤로스 마씨에 신부입니다. 저는 멕시코 사람이지만 니카라과의 레온 교구에 속한 교구 사제입니다. 그런데 그 레온 교구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제일 먼저 생긴 교구입니다. 레온 교구가 제일 처음 교구가 되어서, 레온 교구에서 중앙아메리카가 선교가 되고, 또 카리비안 지역에도 선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레온시는 아주 더운 곳입니다. 일 년 내내 덥습니다. 추운 날이 없습니다. 일 년 내내 섭씨 35도에서 36도이고 겨울에도 평균 32도입니다. 레온시는 그렇게 더운 곳입니다. 그런데 저는 멕시코시티 출신인데 멕시코시티는 아주 높은 고지대입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난 제가 너무나 더운 레온에서 사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땀을 흘리면서 삽니다.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가끔 쓰기도 하니까 24시간 계속 땀만 흘리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항상 땀을 많이 흘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멕시코 사람인데 왜 레온 교구에 속하는 교구 사제가 되었는지, 그리고 레온 교구와 하느님 뜻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멕시코 사람으로서 멕시코에서 살면서 멕시코시티에서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기술자였습니다.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35년 전에 루이사의 글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루이사의 글에 대해서 알게 되고서는 이것이, 하느님 뜻이 영성생활에서 가장 훌륭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제가 제일 처음 깨달았던 것, 즉 하느님 뜻이 영성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계속해서 확실해졌습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루이사의 글을 알게 된 지 몇 달 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태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루이사의 고향인 코라토에 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코라토에서 2년 반 동안 살았습니다. 저는 멕시코 사람이니까 스페인어는 할 줄 압니다. 루이사의 글은 이태리어입니다. 그래서 이태리어로 되어 있는 루이사 글을 이태리어 사전을 가지고 파고들어서 전부 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코라토에서 2년 반을 살다가 다시 멕시코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엔지니어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저의 마음속에 자꾸 새로운 것이 막 일어났습니다. 사제가 되어야 되겠다는 성소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사제가 되어야 되겠다는 부르심이 점점 확실해져서 제가 어떻게 하면 사제가 될 수 있는지, 신학공부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런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저의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서 마음의 결정을 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멕시코에는 멕시코 신부님들로 이루어진 수도회 같은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들어갔습니다. 그 공동체는 수도회는 아니지만 사제들의 공동체를 창설하신 분이 그때까지 아직 살아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가 스페인에 분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창설자 원장 신부님이 저를 보고 스페인에 가서 철학공부와 신학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페인의 톨레도라는 곳에 가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톨레도를 아시는지 모르지만, 스페인의 톨레도는 아주 유명하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역사적인 보배도 많고 또 도시 전체가 하나의 보배입니다. 몇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제일 첫째가는 교구였습니다. 톨레도에 있는 신학교가 스페인에서 제일 좋은 신학교였는데 제가 그 제일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 신학교의 교수님들도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수님 중의 한 분은 지금 시복 과정 중에 있으십니다.

 

 1989년에 제가 신학공부를 끝내고 그리고는 멕시코로 돌아와서 멕시코시티에 있는 과달루페 대성당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8월 4일 마리아 요한 비안네 성인의 축일에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4년 동안 100여 명이 공부하는 멕시코시티의 외곽에 있는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 신부로 일했습니다.

 

 멕시코에는 ‘게레따로’라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서 일했습니다.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2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 신학교에서 영적지도 신부로 일하는데 1990년부터 주님께서 저를 하느님 뜻의 일을 하라고 아주 강력하게 미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르치는 신학생들과 하느님 뜻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신학교에서만 그렇게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그 도시 안에 있는 여러 본당의 신자들하고도 함께 하느님 뜻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저의 장상 신부님이 저에게 로마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레고리안 대학이라고 제일 유명한 좋은 대학이었는데 거기서 영성신학을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하느님 뜻에 관련된 저의 사도직과 저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마의 그레고리안 신학교 개강 전에 로마에서 가까운 치비타 베키아라는 도시에 갔습니다. 치비타 베키아는 로마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할 수 있는 조그만 항구 도시입니다. 40년 전부터 제 친구인 다른 신부님이 저하고 그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파블로 마르틴이라는 신부님입니다.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이라는 조그만 본당에 계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특별한 역사적인 그 얘기 아시지요?

  본당 이름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이라고 그랬는데, 거기서 옛날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아주 어려운 신비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묵상을 하면서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바닷가에서 조그만 어린 아이가 조개껍질로 물을 떠서 모래 구멍에 넣으면서 노는 것을 보았던 그 일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 성당의 이름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입니다. 그리고 제 친구인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이 그 성당의 본당 신부님이었고 그때 제가 거기에 묵은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이 마리아 넬라라는 분이 지금 코라토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으로 우리를 방문하러 온다고 그러셨습니다. 마리아 넬라는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사시는 분이었는데 그 여자 분이 이태리 코라토에 와서 루이사와 루이사의 글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니까 코라토에서는 그분을 내가 묵고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으로 보낸 것입니다. 파블로 마르틴 신부님께서 루이사에 대해서 아주 유명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넬라가 우리한테 와서 파블로 신부님과 저에게 하느님 뜻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설명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넬라는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루이사의 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하고, 하느님 뜻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한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넬라가 파블로 신부님과 저에게 마이애미에 와서 루이사에 대해서, 하느님 뜻에 대해서 가르쳐 달라고 초대를 했습니다. 피정 지도도 해주고 강의도 하고 자신들의 의문점에 대해서 설명도 해달라고 초대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에 영성 신학 공부를 하려고 로마에 왔잖아요. 그리고 로마의 신학교가 개강하기 전에 치비타 베키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에 간 것이었는데, 마리아 넬라가 거꾸로 미국 마이애미에 오라고 초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넬라에게 ‘제가 로마에서 공부를 해야 되니까 저의 장상 신부님이 허락해주시면 방학 동안에는 제가 마이애미에 가서 일하겠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로마에서 공부하는 2년 동안 방학 때마다 저는 미국으로 갔습니다. 로마에서는 여름 방학이 깁니다. 제가 방학 때마다 미국으로 가서 마이애미에서 피정을 지도하고, 뉴욕과 중앙아메리카 등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피정 지도를 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렇게 영어로 말씀을 드리지만 그때는 영어를 잘 못하고 스페인어밖에 못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스페인어로 강의를 하면, 지금 박 수녀님처럼 마리아 넬라가 스페인어를 전부 다 영어로 통역을 했습니다. 그렇게 피정 지도를 했습니다.

 

  마리아 넬라와 제가 하느님 뜻을 전파하는 그런 특별한 사도직을 1993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마리아 넬라는 마이애미에 살면서 제가 마이애미에 가면 온갖 종류의 피정과 강연들을 많이 조직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조직하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리아 넬라는 처음부터 이 하느님 뜻을 전파하는 일에서 영혼의 핵심과 같은 역할을 해 온 분입니다. 여자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참 잘합니다. 남자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하는데 여자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너무나 잘합니다.

 저는 피정 지도를 하나 맡으면 그 피정 지도를 잘하려고 막 애쓰고 있는 동안에 마리아 넬라는 벌써 4~5개 피정을 더 조직하고 그렇게 앞서갔습니다. 그렇게 마리아 넬라가 마이애미에서 일을 많이 하고 저는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방학 때 미국에 가서 도와드리고 있는 중에 루이사의 시복 조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1994년 3월에 코라토의 당시의 대주교님이었던 카사티 대주교님께서 바티칸으로부터 루이사의 시복 조사를 시작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인 1994년 11월에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루이사의 시복 조사가 교구 차원에서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또 코라토의 카사티 대주교님께서 마리아 넬라와 저에게 아메리카에서 하느님 뜻에 대한 국제적인 대회를 조직해서 개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1995년 11월이나 12월에 루이사의 시복 과정을 시작한 1주년 기념으로 이렇게 국제대회를 하자고 요청하셨습니다. 이 국제대회가 하느님 뜻에 대해서 열리는 첫 번째 국제대회였습니다.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코스타리카라는 나라의 수도 산호세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그 대교구에 있는 대신학교에서 국제대회를 거행했습니다. 전 세계 17개국에서 온 500여 명의 사람들이 참가했습니다. 루이사의 고향인 트라니 대교구의 대주교님과, 루이사의 시복 조사에 대한 재판을 할 때 그 재판에 관계되는 모든 분들이 전부 이 대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그 후로 계속해서 루이사의 시복 조사 시작한 것을 기념하고 시복 추진을 위해서 해마다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국제대회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코스타리카에서 국제대회를 했을 때 카사티 대주교님께서 돌아오는 길에 교황 베네딕토 16세이신 라칭거 추기경님을 만난 일입니다.

 

 카사티 대주교님께서 국제대회에서 돌아오시면서 라칭거 추기경님을 만난 것은 시복 조사를 시작하고 1년 후입니다.

 이렇게 루이사의 시복 조사가 시작됐을 때 절대적으로 제일 중요한 점은 루이사가 쓴 것은 모두 다 모아서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복 조사에서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은 루이사의 글은 전부 다 빠짐없이 조사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시복 조사를 시작한지 1년이 됐을 때 그 당시에는 하느님의 종 루이사의 글은 모두 로마 바티칸의 문서 보관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938년에 바티칸에서 메신저 두 사람을 코라토로 보내서 코라토에 있던 루이사를 방문하여 루이사의 글들을 몽땅 다 받아서 바티칸으로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러니까 루이사가 손으로 쓴 모든 것의 원본은 전부 다 1938년부터 바티칸 문서 보관소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코라토 교구에서 루이사의 시복 조사를 하려고 해도 루이사의 모든 글들이 다 로마에 있으니까 조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1년 동안 여러 가지 다른 준비를 한 후에, 로마에 가서 트라니 교구에는 루이사의 글이 하나도 없고 전부 다 로마에 와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트라니 교구에서 루이사의 시복 조사를 계속하기 위해서, 트라니 교구 대주교님인 카사티 대주교님이 라칭거 추기경님에게 로마에 있는 루이사의 글 원본과 또 포토 카피 해놓은 것을 다 주십사고 개인적으로 청했습니다. 트라니 교구에서 교구 차원으로 먼저 조사를 다 해야 하므로 교구 차원에서 조사를 할 수 있게 자료를 다 달라고 라칭거 추기경님에게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바티칸에서 카사티 대주교님에게 누군가를 로마로 보내서 루이사의 글을 전부 다 포토 카피를 하라고 연락 하셨습니다. 여러 규정 때문에 그냥 다 내어줄 수는 없었나 봅니다.

 

 트라니 교구의 교구 신부님으로 옮겨오신 미국 신부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신부님은 트라니 교구의 시복 조사 재판의 재판원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트라니 대주교님께서 이 신부님에게 다른 신부님 한 분과 로마에 가서 루이사의 글을 전부 다 포토 카피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트라니 대주교님으로부터 이 명령 받으신 신부님은 죤 브라운 신부님인데 우리하고 아주 가까운 친구입니다. 다른 신부님 한 분은 마이클 아담스 신부님입니다.

 

  루이사의 글이 10,000페이지인데 10,000페이지를 포토 카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브라운 신부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시성성에서는 한정된 시간 안에 그것을 다 복사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한정된 시간에 10,000페이지를 다 복사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또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브라운 신부님이 마리아 넬라와 저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또한 마리아 넬라에게는 경비를 부담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경비는 마리아 넬라가 다 부담을 해서 우리는 로마에 갔습니다.

 

 신부님 두 분과 저와 마리아 넬라, 우리 4명이 바티칸에 드나들 수 있는 바티칸의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만약 허락을 못 받으면 허락받을 때까지 로마에서 꾸준히 기다리기로 하고 4명이 함께 로마에 가서 바티칸에 드나들면서 복사를 할 수 있는 허락을 청하고 기도를 바치면서 그 허락을 기다렸습니다. 다행이 바티칸에서 우리에게 루이사의 글이 있는 문서 보관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1996년 1월말, 1주일 동안 일을 해서 주님 봉헌 축일인 2월 2일에 포토카피를 끝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신부님 두 분하고 토마스 페히라는 평신도 한 분하고 또 다른 신부님 한 분, 이 네 사람들은 10,000페이지를 포토 카피 하고, 마리아 넬라와 나는 이 10,000페이지를 전부 다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사진으로 찍었더니 사진이 5,000장이 나왔습니다. 두 페이지를 사진 한 장에 넣어 찍었더니 5,000장이 나온 것입니다. 낮 동안에는 문서 보관소에서 사진을 찍고 밤에는 코닥현상소로 가서 필름을 현상했습니다. 그렇게 사진을 현상한 것은 10,000페이지에서 어떤 페이지가 빠졌는지, 어떤 페이지가 제대로 안 나왔는지 그것을 다 조사하느라고 전부 다 현상을 한 것입니다.

 

 바티칸의 문서 보관소는 일반 도서관 같지 않습니다. 일반 도서관같이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이렇게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바티칸의 문서 보관소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 들어갈까 말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허락이 나서 드나들었지만 이것이 우리 일생에 단 한 번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다 사진을 찍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복이 되려면 일을 완전히 확실하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라고, 코닥현상소에서 현상된 사진을 받아서 우리는 페이지마다 깨끗하고 확실하게 나왔는지 확대경을 가지고 그것을 조사하느라고 그 한 주일 동안을 꼬박 한 잠도 못 잤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진을 찍고 이런 조사를 하는 동안에 신부님 세 분과 평신도 한 분인 네 명은 10,000페이지의 포토 카피를 전부 다 두 장씩 복사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 그 기간이 우리 일생에서 정말 특별하고 대단한 날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우리가 루이사의 글의 내용을 19권까지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권까지는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신부님께서 출판허가를 받아서 출판을 하신 것입니다. 1927년에 안니발레 신부님께서 19권을 출판하셨는데, 그런데 그렇게 출판을 하시고는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다음에 나머지 글들은 하나도 출판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진 찍고 복사하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출판되지 않는 그 나머지 보배들을 다 보게 된 것입니다. 루이사의 글 전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을 하면서 우리가 아주 기가 막힌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안니발레 성인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루이사가 주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니발레 성인은 하늘나라에서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안니발레 신부가 나의 하느님 뜻의 첫째 사도이다. 안니발레 성인은 하늘나라에서도 이 일의 계속을 위해서 도와주고 있다.”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성인들의 동상 큰 것이 하나 씩 서 있는데, 안니발레 성인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축복을 받고 베드로 대성전의 바깥쪽에 서 있는 성인들의 동상 중의 한 분입니다.

 

 이렇게 루이사의 글은 다 포토 카피했고 사진도 찍어서 완전히 끝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바티칸에서 포토 카피하고 사진 찍은 루이사의 글을 전부 다시 다 옮겨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는 트라니 교구에서 신학자들이 그 글을 다 검토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다 필사를 했고 2005년 8월에 신학자들이 루이사의 글을 다 조사하는 것을 끝냈습니다. 그 조사한 모든 결과가 로마의 시성성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더 조사하고 나서 바티칸의 시성성에서 새로운 두 신학자들에게 또 다시 루이사의 글을 전부 다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938년에 루이사의 글들을 코라토에 와서 바티칸으로 다 가지고 간 것은 그때 문제가 있어서 그랬는데, 이제는 그때의 그 문제도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두 분의 신학자 중의 한 신학자는 벌써 1년 전에 루이사의 글에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고, 지난 7월에는 나머지 신학자 한 분이 또 루이사의 글이 전부 아주 완전하고 문제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시복과정인데, 신학자들이 루이사의 글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결을 내리면, 그다음에는 루이사가 얼마나 영웅적인 덕행을 살았는지를 또 조사해야 됩니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더 걸릴 것입니다. 앞으로는 아주 깊이 심오하게 잘 조사해야 됩니다. 이제부터는 루이사의 영웅적인 덕행의 실천을 여러 전문가가 조사를 해야 되는데, 이 여러 전문가들이 조사를 해서 정말 루이사가 영웅적인 덕으로 살았다는 판결이 나오면 이제는 루이사는 가경자가 될 겁니다. 그리고 교황청이 루이사로 인해서 기적이 하나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러니까 덕행을 잘 살았다는 판결이 나오고 기적이 하나 있으면 시복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시복이 될 것 같습니다.

 

 즉 시복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 전문가들이 루이사가 덕행을 아주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줘야 되고, 교황청이 인정해주는 기적이 하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완전히 되어야지만 이제 시복을 청할 수 있습니다.

 

 

 이제 루이사의 시복 과정에 대한 설명을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저와 마리아 넬라가 하느님 뜻 집을 통해서 하느님 뜻 사도직을 하고 있는 그 활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996년에, 우리가 루이사의 글을 포토 카피하고 사진 찍고 그럴 때, 마이애미에 하느님의 뜻 집이라는 신자들의 단체가 생겨났습니다. 비영리재단과 같은 식으로 하느님 뜻 집이라는 신자들의 단체가 생겨났습니다. 시복 조사 재판소와 트라니 교구의 카사티 몬시뇰 대주교님의 권위 하에서 제가 온 세상에 하느님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느님 뜻 집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2000년에 카사티 대주교님이 은퇴하시면서 저에게 “카를로스 신부님, 내가 지금까지 신부님과 함께 하느님 뜻을 전파하는 일을 했는데, 내가 지금 은퇴하니까 옛날 같이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의 소속 공동체로 돌아가십시오. 내 후계자로 오는 새로운 주교님이 나와 같은 식으로 계속해서 신부님하고 일하고 싶다고 하시면 그 새 주교님이 신부님의 장상과 다시 이렇게 계약을 해서 이 일을 해야 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트라니에 새 주교님을 보내셨는데, 새 주교님은 옛날 카사티 대주교님처럼 루이사의 일을 계속하라고 나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새 주교님은 나를 직접 불러서 교구의 일을 계속 같이 일하자고는 하지 않으셨지만, 나하고 마리아 넬라가 설립한 하느님 뜻 집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아주 전적으로 지지해 주신다고 새 주교님께서 하느님 뜻 집 앞으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니카라과에 있는 레온 교구의 주교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레온 주교님께 그 동안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우리는 주교님의 도움을 원합니다. 주교님이 루이사와 하느님 뜻을 잘 아시므로 주교님께서 우리 일을 지지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을 청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주교님의 이름은 세살 보스코 비바스 주교님이십니다.

 

 그랬더니 주교님께서 “카를로스 신부님과 마리아 넬라씨, 레온 교구는 당신들의 교구입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이 하느님 뜻에 관해 일하는 것을 도와주고 하느님 뜻의 신자들의 단체를 교구의 공식 기구로 인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편리하게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 교구 신부가 되고 싶으시다면 나는 신부님을 환영해서 우리 교구 신부님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달 후에 저하고 마리아 넬라가 레온 교구의 세살 보스코 비바스 주교님께 하느님 뜻 집을 교회 안의 공식적인 단체로 설립을 인정하는 문서를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200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에 이 공식 단체가 설립되었고 1년 후 8월 15일에 저는 레온 교구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레온 교구의 교구 신부가 되면서 저를 스페인과 로마에 공부시키러 보내주셨던 우리 사제들의 단체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3년부터 저는 레온 교구의 교구 신부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2004년 9월 15일 성모 통고 축일에 마나과와 교구에 또 하느님 집이 아름다운 설립 취지문과 함께 설립되었습니다. 다음 해에 미국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 대교구에 하느님 뜻 집이 설립되었습니다. 2009년 이태리 베네벤또에 또 하느님 뜻 집이 설립되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이 탄생한 그 교구입니다. 그 성인이 나신 그 베네벤또에 하느님 뜻 집이 설립된 것입니다. 금년에는 성지 예루살렘에 또 하느님 뜻 집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곳에서 생긴 하느님의 뜻 집들은 사람들 사이에 하느님 뜻을 전파하는 것이 첫째 의무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뜻 집들의 사명입니다.

 

 마리아 넬라가 하느님 뜻 집 안에 또 하나 새로운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하느님 뜻 흠숭자라는 단체입니다. 수도회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 넬라가 '지속적인 하느님 뜻 흠숭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아직 완전히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은 아니지만, 주교님의 축복 하에 이제 수도회가 되려고 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때가 되면 공식 수도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8월 22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에 지속적인 하느님 뜻 흠숭자라는 여자들의 제3회 같은 단체가 생겼습니다.

 그다음에 작년에 '하느님 뜻으로 사는 신부님들의 사제 형제회'가 생겨났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하느님 뜻으로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 하느님 뜻으로 사는 사제들의 형제회 같은 것입니다. 이번에 피정을 같이 했던 신부님들, 이범주 신부님, 문 신부님, 백 신부님, 서 신부님 모두 다 이 사제 형제회의 회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씨와 그 씨를 받은 토양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주님과 성모님께 우리 모두를 위해서 모든 은총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 좋은 토양이 되어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하느님 뜻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기가 막힌 씨앗을 우리 토양 안에 받아들여서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제자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귀를 열어야 되고, 우리의 몸의 귀를 열뿐만 아니라 마음의 귀를 열어야 되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하느님 뜻의 사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성모님께서 몇 년 전에 스테파노 곱비 신부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한국이 아시아 대륙 전체를 복음화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전체를 복음화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