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시(새번역)/4권 공생활 둘째해(하)

하사시4권 [233.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에 대한 세 일화에 관한 고찰]

Skyblue fiat 2025. 5. 15. 16:34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제4권 공생활 둘째 해(하)1  p31~p39 

 

 

233.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에 대한 세 일화에 관한 고찰

1944. 8. 13.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지난 1월에 내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너에게 보여주었을 때부터 너와 너의 영적 지도자는 막달라의 마리아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마리아에게 한 말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했다. 7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너희를 기쁘게 해주고, 영혼에 나병이 든 여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규칙을 부여하고, 악습의 무덤 속에서 질식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도 초대하기 위하여 과거의 이 책장들을 너희에게 드러내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선하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척도들로 재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사죄(死罪)들을 구별하지 않으신다. 죄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분을 슬프시게 한다.


뉘우침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서 기꺼이 용서하시고 싶어지게 만든다. 은총에 대한 저항은 그분을 융통성 없이 엄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정의는 회개할 수 있도록 받은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겠다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회개(nonconversion)의 50퍼센트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사십 퍼센트는 회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태만이 그 중요한 원인이다. 그 태만이란 사람의 마음을 구하기 위하여 시궁창으로 내려가지 않고, 자신의 피신처에서 안락하게 있으려는 진정한 이기심과 교만을 은폐하는 과녁을 빗나간 거짓 열성에 있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깨끗하고, 존경 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타락이 있는 곳, 사람들이 나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곳에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정직한 사람들, 옛 계명에 따라서만 정직한 사람들뿐 아니라 세리들과 창녀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쓰여 있는 복음서를 읽지 않느냐? 그는 교만은 생각(the mind)의 더러움이고, 사랑의 결여는 마음(the heart)의 더러움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느냐?

 

네가 멸시당할 거라고? 하느님의 아들인 내가 너보다 먼저, 너보다 더 많이 멸시당했다. 더러움이 있는 곳에서는 깨끗한 겉옷을 입어야 한다고? 나는 그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이 새로운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기 위하여 내 두 손으로 그 더러움을 만지지 않았더냐?

 

너희는 내가 너희의 첫 선배들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가 어느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든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그의 집에 머물러라.’ 세상은 모든 것에서 악을 보려는 경향이 있기에 그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덧붙였다. ‘너희가 집들로―나는 ‘집들’이라고 말했지 ‘한 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들어가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해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다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나는 회개하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까지는 너희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다음 말로써 내 가르침을 마무리했었다. ‘누군가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너희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면, 그 집들과 고을에서 나올 때에 너희 신발에 묻은 먼지까지도 털어버려라.’죄는 먼지에 불과하다. 죄는 불거나 털기만 해도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먼지와 같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영혼들을 그분을 항구하게 사랑하는 매끈한 수정 입방체와 같이 만드신다.


진실로 착하게 되어라. 너희는 영원하신 관대함(Bounty)과 완전히 결합해라. 그러면 어떤 부패도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신발 바닥 위로 올라와서 너희를 더럽힐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은 아주 높이 있다! 나는 착하고 하느님과 완전히 결합한 영혼을 말하고 있다.

그런 영혼들은 천국에 있다. 어떤 먼지나 더러움도 그리로 올라갈 수 없다. 분노하여 사도의 영에게 먼지와 오물을 던진다 해도 말이다. 먼지나 더러움이 육체를 때릴 수는 있다. 다시 말하여 악이 선을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를 박해하거나 너희를 모욕함으로써 육체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너희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는 것이냐? 나는 모욕당하고, 상처 입지 않았느냐? 그들이 그 주먹질과 욕설들을 내 영에 각인시켰느냐? 그들이 내 마음을 흔들었느냐? 아니다. 마치 거울 위에 뱉은 침이나 과일의 액즙 섬유를 맞힌 조약돌처럼 그것들은 뚫고 들어가지 않고, 미끄러졌거나 뚫고 들어갔다 해도 속껍질에 들어 있는 씨앗은 손상시키지 못하고, 표피만을 뚫고 들어가 오히려 싹이 더 쉽게 트게 한다. 상처입지 않은 핵보다는 갈라진 덩어리에서 싹이 트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하여 밀알은 싹 트고, 사도는 능동적이 된다. 때로는 육체적인 죽음을 통하여, 또는 은유적인 매일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를 부서뜨림으로써 그렇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다. 영은 인간성의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다.

마리아는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모르는 한가한 여자의 일시적인 변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에게 왔었다. 자기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그녀의 관능성을 찬미하며 유혹하는 자들의 거짓된 아첨으로 그녀는 거의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진리(Truth)의 분명하고도 엄한 목소리를 들었다. 멸시받거나 이해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진리의 목소리 말이다.

합주하는 연회의 종(鐘)들처럼 모든 목소리들이 말씀(Word)에 섞였다. 맑고 푸른 하늘아래에서 노래하여 골짜기들과 산들, 평야와 호수 위로 퍼져나가며 주님의 영광과 그분의 축제를 기념하려는 목소리들이다.
너희는 평화로운 시절에 주님의 날을 그토록 즐겁게 만들어주었던 장엄한 축제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큰 종이 그 추로 신성한 율법의 이름으로 첫 번째 소리를 냈는데,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심판자이자 임금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 다음에는 더 작은 종들이 화음을 이루며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신다.’
그것들은 은구슬 같은 천사의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분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용서하라고, 관대하라고 강권하고, 용서가 분노보다 유익하고, 동정이 강직함보다 위대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이처럼 나는 죄인에게 짓밟힌 율법을 상기시킨 다음 마치 짙은 그늘 속의 청록색 비단 스카프처럼 죄의 어둠 속에서 용서의 희망을 흔들어주었다. 희망이 그 위로의 말들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말이다.

용서! 그것은 죄인의 타는 목마름 위에 내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다. 이슬은 화살처럼 찌르고, 땅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면서 꽃들을 죽이는 우박과 같지 않다. 이슬은 살포시 내려와 가장 연약한 꽃도 그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꽃잎에 이슬이 내려와 앉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꽃은 이슬의 상쾌한 수분을 마셔 원기를 회복한다. 이슬은 뿌리 근처 타는 듯한 땅거죽에 내려와 토양 속으로 스며든다…

그것은 눈물의 수분, 별들의 눈물, 목마른 자녀들 위에 떨어지는 엄마의 사랑의 눈물이다. 그 눈물은 그 달콤하고 너그러운 유분과 함께 자녀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준다. 오! 사람이 쉴 때에도, 죄 지을 때에도 작용하는 자연 요소들의 신비!

용서는 그런 이슬과 같다. 용서는 깨끗함만이 아니라 생명의 즙도 가져오는데, 그것은 자연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서 취해진 것이다.

용서의 약속 다음에는 지혜가 무엇이 적법한 것인지, 무엇이 부적법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꾸짖고, 흔든다. 그것은 냉혹함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어머니의 근심으로 인한 것이다.

너희는 너희를 굽어보는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철옹성처럼 완고해지고 불순종했느냐! 사랑이 너희에게 말할 때 너희는 얼마나 자주 도망쳤느냐! 너희는 얼마나 자주 사랑을 비웃었느냐! 너희는 얼마나 자주 사랑을 미워했느냐!
만일 너희가 사랑을 대하는 것처럼 사랑도 너희를 대한다면, 너희의 영혼들은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너희도 보다시피 사랑은 너희를 찾아가는 지칠 줄 모르는 보행자(the Untiring Walker)이다! 너희가 가장 캄캄한 소굴 속에 숨어 있어도 사랑은 너희를 찾아낸다.

내가 왜 그 집에 가기로 결정했겠느냐? 내가 왜 그 집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겠느냐? 그것은 내가 사도들에게, 세상의 시시한 일들을 초월할 정도로 드높은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편견과 비판을 무릅쓰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내가 왜 유다에게 그런 말을 했겠느냐? 사도들은 여전히 아주 인간적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인간적이고, 이 세상의 성인들도 정도는 덜하지만 그렇다. 완전한 영혼들 안에도 약간의 인간성(humanism)이 남아 있다. 그들은 아직 완전하지 못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인간적인 추론이 팽배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성의 무게가 그들을 다시 끌어내렸다. 나는 그들이 가능한 한 적게 내려가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올라가는 길에 무언가를 놓아두어 그들이 거기서 멈추어 묵상하고 휴식한 다음에 다시 종전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게 해야 했다.

나는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다. 그들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일, 자연의 요소들에 대한 승리, 기적들, 변모(transfiguration), 부활, 다처소재(ubiquity)가 그것들이었다.

나는 내가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방에 있을 때 엠마오로 가는 길에도 동시에 있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토론할 때 내 다처소재(多處所在, ubiquity, 한 존재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있거나 나타나는 현상)야말로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향한 노정으로 그들을 이끈 가장 큰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나는 이미 죽음을 품고 있었던 유다보다는 열 한 사도를 위하여 말했다. 나는 교만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형성(formation)을 위하여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하느님이자 선생님이었다. 이 단어들은 나를 그 말대로 정의한다. 나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나 자신을 드러냈고, 마음속으로라도 악한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하나의 덕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깨끗한 마음에 내려와 거기서 거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보셔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 집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겠느냐?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은 그분의 숭고한 위엄에 대한 존경을 위하여 깨끗한 환경을 요구한다는 것을 만인이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 입술로 말하지 않고, 더 깊은 말로 그녀의 죄 많은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불쌍한 여자야, 알겠느냐? 너는 너무 추악하여 네 주위의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 너는 그 남자보다 더 추악하다. 왜냐하면 너는 남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자신들의 의무에서 일탈하게 만듦으로써 하와의 범죄를 반복하고, 네 열매를 많은 아담들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사탄의 종이다.’
그러나 내가 왜 절망에 빠진 그 남자의 어머니가 마리아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을 원치 않느냐? 어떤 이유도 모욕과 증오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소유하는 데 요구되는 첫째 조건은 악의를 품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우리와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셋째 조건은 은총을 받은 다음에 영원하신 아버지에 대한 정의로 감사하고, 충실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은총을 얻고 나서 은인을 기억하는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가 조각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잠깐 바라보고는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나는 내가 구원하기를 바랐던 ‘산 사람들’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마치 마리아가 죽은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명 없는 대리석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외관상으로는 그녀를 무관심하게 대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구속하기를 원했던 그녀의 가엾은 영혼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은 한마디 말도, 하나의 몸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모욕하지 않는다. 너도 모욕하지 말고,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해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마라’는 내 마지막 말은 꽃들의 끝이 서로 이어져 있는 화환처럼, 내가 산에서 말한 첫 번째 말인 ‘용서는 원한보다 더 유익하고, 동정은 엄격함보다 유익하다’는 최초의 말과 합쳐졌다.

이 말들이 가엾고 불행한 여자를 선의 향기가 풍기는 시원한 벨벳 원으로 감싸 그녀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사탄의 잔인한 노예생활과 얼마나 다르고, 죄의 악취와 비교해볼 때 하늘의 향기가 얼마나 감미로우며, 마귀 들린 것보다 거룩하게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평안한지를 깨닫게 했다.

주님의 뜻이 얼마나 온건한지를 보아라. 주님께서는 즉각적인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마음이 절대적이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고, 만족할 줄 아신다. 그분께서는 길을 잃었던 그 여자가 길을 찾고, 미친 여자가 이성을 되찾기를 기다리시는 한편, 어쩔 줄 모르는 그 어머니가 그 여자에게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하신다.

나는 그 어머니에게 ‘당신은 용서할 수 있어요?’ 하고 묻기만 했다. 만일 내가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행동했다면 나는 그 어머니를 기적을 얻기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질문들을 해야 했겠느냐!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너희의 힘을 헤아린다.
절망한 그 어머니가 진실로 용서한다면, 그것은 이미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에는 그 여자에게 그것밖에 요구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나는 아들을 그 여자에게 돌려주고 나서 ‘거룩하게 사시오. 그리고 당신 집을 거룩하게 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가 애통해하는 동안에는 그 죄인을 용서해주라는 것밖에 요구하지 않았다. 너희는 바로 직전까지 어둠 속에 있었던 사람에게 모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 어머니는 그 후 자기의 며느리와 손자들과 함께 완전한 빛으로 왔다. 그때 당장은 눈물로 소경이 된 그 여자의 눈에 빛(the Light)의 최초의 여명이 비추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 여명이란 하느님의 날의 여명인 용서이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나는 유다나 내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한 사람만이 빛을 향하여 오지 않으려고 했다. 사도들이 헛수고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너희는 그 실패로 인하여 낙심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체해서는 안 된다. 사도 앞에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반대세력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문어의 발처럼 사도가 그들에게서 빼앗았던 먹이를 다시 움켜잡는다. 그러나 그 사도의 공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아무도 회개시키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 가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사도는 불행하다. 이런 사도는 거의 무가치한 사도이다.


천 명 중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 해도 가야 한다. 사도의 하루는 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천 명을 얻은 것만큼이나 유익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고,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하여 상 주시기 때문이다. 회개시켜야 할 사람이 너무 견고하게 사탄에게 붙잡혀 있고, 사도의 힘은 해야 할 노력에 비하여 약하기 때문에 그가 회개시킬 수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다는 것도 너희는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보다 크냐?

사도가 절대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다른 한 가지는 사랑이다. 분명한 사랑이다. 형제들의 마음을 향한 은밀한 사랑만이 아니다. 이런 사랑은 착한 형제들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나 사도는 하느님의 일꾼이기에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도 해야 한다. 그는 사랑으로, 큰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 엄격함은 사도의 일을 마비시키고, 빛을 향하여 가는 영혼들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엄격함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악한 열정의 불길로부터 너희를 보호해주는 불연성 옷이다. 사랑은 인간적이고 악마적인 부패가 너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포화상태의 방부제이다. 영혼을 얻으려면 너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영혼을 얻으려면 너희는 그 영혼을 사랑으로 이끌어야 한다. 선을 사랑하고, 그것의 시시한 죄 되는 사랑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마리아의 영혼을 원했다. 작은 요한아, 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선생의 강단에서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죄의 길로 그녀를 찾아 내려갔다. 나는 내 사랑으로 마리아를 뒤쫓고, 그녀를 핍박했다. 다정한 핍박(kind persecution)이었다! 순결 자체인 내(I-Purity)가 부정 자체인 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따라갔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어떤 추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자비(Mercy)이기 때문에 분개할 수 없었다. 자비는 죄를 보고 울지만, 그 죄에 분개하지는 않는다. 분개하고, 추문을 피하여 숨어들어가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영혼을 버리는 목자는 불행하다!

영혼들이 육체들보다 더 쉽게 다시 일어서고, ‘자매여, 네 유익을 위하여 일어서라’고 말하는 연민어린 사랑의 말이 자주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나는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 행동은 하느님의 눈앞에서 정당했고, 착한 사람에게 이해되었다.

 

부패한 마음에서 발산하는 악이 부글거리는 악한 사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에게서도 잘못을 찾아내고, 자기 자신만을 완전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세 가지 측면은 다음과 같다.

말문이 막힐 염려 없이 말할 수 있으려면, 철저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정직해야 한다. 우리의 신비한 배 주위에 모여 있는 군중에게 사도로서 우리가 한 말이 퍼져나가는 물결처럼 점점 멀리 퍼져서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데 무관심한 채 진흙 속에 누워 있는 진창의 해변에 이를 때까지 이르러 결국 전체 군중에게 전해지게 된다.

이것이 단단한 땅을 파서 그 땅이 씨를 받아들이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맨 처음에 할 일이다. 이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나 그 일을 당하는 사람에게나 가장 어려운 일이다. 말은 날카로운 보습 날처럼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들에게 상처 입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착한 사도의 마음은 열기 위하여 상처 입혀야 하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상처입고 피 흘린다. 그런데 그 고통 역시 생산적인 것이다. 사도의 피와 눈물로 불모지가 기름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자질은 자기의 사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망치는 곳에서도 일하는 것이다. 사도는 가라지와 개밀과 가시나무를 제거하고, 땅을 깨끗하게 하고, 갈아엎어,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관대하심이 그 위에 태양처럼 빛나게 하려고 허리가 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재판관과 의사처럼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워, 멈추어 기다리고 영혼들이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고 숙고하고 마음을 정할 시간을 주고, 기다리는 동안에 의연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셋째 측면은 이것이다. 침묵 중에 뉘우친 영혼이 자기의 잘못을 슬퍼하고 숙고하면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머뭇거리며 사도에게 감히 오기만 하면, 사도는 바다보다 더 넓고, 어머니의 마음보다 더 자상하고, 신부의 마음보다 더 사랑하여 그 영혼이 마음을 활짝 열어 다정함의 물결이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만일 너희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너희 안에 모시고 있다면, 영혼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사랑의 말을 쉽게 찾아낼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 안에서 너희를 대신하여 말씀하실 것이고, 벌집에서 흘러나오는 꿀처럼, 병에서 흘러나오는 향유처럼 사랑이 입맛을 잃은 바싹 마른 입술과 상처 입은 영혼에 도달하여 위로와 약이 되어주실 것이다.

죄인들이 영혼들의 교사인 너희를 사랑하게 만들어라. 영혼들이 천상의 사랑의 풍미를 맛보게 하고, 그것을 열망하게 하여 다른 음식을 찾지 않게 해라. 영혼들이 너희의 다정함에서 참으로 위안을 느껴 그들의 모든 상처에 그 위안을 찾게 해라.

너희의 사랑이 죄인들에게서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야 한다. 오늘 네가 읽은 사도의 편지에 있는 것처럼 ‘두려움은 징벌을 가정하며,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에 있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요한4,18) 두려움의 대상인 사람도 완전하지 못하다. 너희는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고 말하지 말고, ‘가라’고 말하지도 말며, ‘너는 좋은 사랑을 맛볼 수 없다’고도 말하지 마라.그 대신 내 이름으로 ‘사랑해라, 그러면 나는 너를 용서해주겠다’ 하고 말하고, ‘오너라, 예수께서는 두 팔을 벌리고 계신다’ 하고 말하고, ‘이 천사의 빵과 이 말씀을 맛보고, 지옥의 송진과 사탄의 비웃음을 잊어라’ 하고 말해라.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짊어져라. 사도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짐을 자기의 십자가와 남의 십자가와 함께 져야 한다. 상처 입은 양들을 메고 나에게 올 때 그 길 잃었던 영혼들을 안심시키며 말해라.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이 잊힌다.’

그리고 말해라. ‘구세주를 무서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너를 위하여, 바로 너를 위하여 하늘에서 오셨다. 나는 너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분께 너를 데려가는, 회개에 따른 사죄(赦罪)의 강의 한쪽에 놓여있는 다리에 불과하다. 그 다리는 여기 이 땅에서 시작되어 자양분이 풍부하고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천국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해설이다. 이것은 착한 목자에게 충실한 양들인 너희에게는 별 해당사항이 없다. 그러나 작은 신부(新婦)인 너에게는 신뢰가 더해질 것이고, 신부(神父)에게는 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의 빛 안에서 그의 빛이 더해질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으로 오게 하는 자극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며들어가고 영양을 주어서 시든 꽃들을 다시 똑바로 서게 하는, 내가 말해온 이슬이 될 것이다.

네 머리를 들어라. 하늘은 저 위에 있다. 마리아야, 평안히 가거라. 주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