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책/천상의책24-25권

천상의 책 25권 34장. 하느님 뜻의 절대권. 인간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인간의 뜻은 하느님 뜻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

Skyblue fiat 2023. 3. 13. 01:21

 

 

천상의 책 25권

34장

 

하느님 뜻의 절대권.

인간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인간의 뜻은 하느님 뜻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영광에 싸인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창조주를 소유하기로 되어 있었다.

1929년 3월 31일

 

1 내 안에 ‘거룩하신 피앗’의 계속적인 힘이 느껴지고 있다. 이 피앗이 위압적인 지배력으로 나를 뒤덮어, 거의 빈사 상태인 내 뜻이 극히 사소한 동작도 할 겨를이 없게 한다. 그리고 내 뜻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는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기기도 한다. 완전히 죽이면 인간의 뜻 위에서 작용하는 피앗 자신의 위세를 잃기 때문이다.

 

2 한편 인간의 뜻은 숨이 붙어 있는 한, 자진해서 ‘거룩하신 피앗’의 힘찬 생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또한 살아 있는 그 상태에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지극히 높으신 의지’께 자기의 목숨과 절대적 지배권을 드릴 수 있어서다.

 

3 그러면 이 지고하신 의지께서 자신의 신적인 권리로 의기양양하게 세력권을 확장하면서 사람의 죽어가는 뜻을 이긴 승리를 구가한다. 그러면 사람은 죽어 가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행복감을 느낀다. 영예롭게도 자기 자신의 영혼 안에 하느님 뜻의 활동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4 그런데 내가 그렇게 ‘거룩하신 피앗’의 절대적인 지배를 실감하고 있었을 무렵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이동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거룩한 뜻의 작은 딸아, 너는 알아야 한다. 내 ‘거룩한 피앗’의 절대권은 바로 이것이니, 사람의 각 행위마다 첫째가는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5 그러니 그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피앗’이 받아 마땅한 신적 권리를 그에게서 빼앗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피앗이 인간 뜻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딸아, 사람이 자기 창조주의 뜻에서 물러갈 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누가 너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6 보아라, 우리의 뜻에서 물러간 첫 사람의 한 행위만으로도 대대로 인간의 운명을 바꾸기에 충분하였다. ―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리 거룩한 뜻의 운명까지도!

 

7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바로 천상 아버지의 뜻이기도 한 ‘영원한 말씀’이 자기 천사군의 가시적 동반을 받으며 승리의 통치자로서 영광스럽게 이 세상에 왔을 것이다. 그 영광의 광채로 만물을 매혹하며 그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만인을 자기에게 끌어당겼을 것이다.

 

8 그는 또한 인류 가족의 왕이며 머리로서 왕관을 쓰고 왕홀을 손에 든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람이며 하느님이신 임금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큰 영예를 주었을 것이다.

 

9 더욱이, 사람이 내 거룩한 뜻에서 물러가지 않아 영혼이든 육신이든 아무런 병이 없었을 것이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네 예수가 사람이 허약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가련한 피조물을 고통의 바다에 빠져 죽을 지경이 되게 한 것은 그의 뜻이었으니 말이다.

 

10 하느님의 ‘피앗’은 원래 어떤 고통도 미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사람의 뜻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와서 보았을 것이다. ― 사람이 행복하고, 경건하고, 내가 그를 창조하면서 주었던 좋은 것들이 가득한 상태로 있는 것을.

 

11 하지만 사람은 자기의 뜻을 따라 행동하였다. 그렇게 한 탓에 우리 (성삼위)의 운명도 바꾸어 놓았고 할 수 있다. 내가 지상에 오는 것은 결정된 일이었고, 하느님의 결정은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지만, 오는 방식과 외양을 바꾸어 아주 비천한 모습으로 내려오기로 했으니 말이다.


12 즉, 나는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고통을 겪으며 눈물을 흘리고 사람의 모든 비참과 아픔을 짊어진 모습으로 왔다. 사람의 뜻이 나로 하여금 와서 사람의 불행을, 곧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따위 온갖 비참한 모습을 보게 한 것이다.

 

13 그 때문에 나는 사람의 병든 데를 고쳐 주려고 그들을 떠맡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을 그들 중의 하나로, 그들의 한 형제로 드러내면서 각자에게 필요한 치료제를 주었던 것이다.

 

14 따라서 사람의 뜻이야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거나 죄인이 되게 할 수 있으며, 건강하거나 병약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15 그러니, 보아라, 영혼이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거룩한 뜻을 실행하며 이 뜻 안에서 살기로 결단을 내리면 그 자신의 운명을 바꾼다. 그러면 내 거룩한 뜻은 그에게 달려가 그를 자기것으로 삼고 (모든) 조물의 입맞춤을 그에게 가져다준다. 그리고 외관과 태도를 바꾸면서 그를 가슴에 붙여 안고 이렇게 말한다.

 

16 다른 일은 다 제쳐 두고, 너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창조 초기의 때가 돌아오게 하자. 그러면 너와 나 사이의 모든 것이 행복일 터이니, 너는 우리 (성삼위)의 집에서 우리의 딸로서 네 창조주의 풍성한 재물을 누리며 살 것이다.’

 

17 내 ‘거룩한 뜻의 신생아’인 너는 귀담아들어라.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내 거룩한 뜻에서 물러가지 않았더라도 나는 지상에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왔을지 짐작이 가느냐? 내가 죽음에서 부활했을 때처럼 장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18 비록 나의 인성은 여느 사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나의 부활한 인성은 ‘영원한 말씀’과 일치해 있었으므로 영광스럽게 되었고, 빛을 옷 입듯 입었고, 고통이나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내가 참으로 하느님이며 승리자였던 것이다.

 

19 그 반면에 죽기 전의 내 인성은, 비록 자진해서 겪은 것이긴 하지만,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더구나 ‘고통의 사람’(이사 53,3)이기도 하였다.

 

20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뜻을 따르는 바람에 눈이 부신, 심한 약시(弱視) 상태로 있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만이 부활한 나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이 내 부활을 확증하는 증거로 쓰였다.

 

21 그 뒤 나는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는 사람에게 (내가 준) 치료제를 복용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건강이 회복되면 내 거룩한 뜻을 알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 마침내 자기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으로 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내가 내 나라의 자녀들 가운데에서 존엄과 영광이 충만한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었다.

 

22 그런 고로 부활은 Fiat Voluntas Tua가, 곧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하는 사건이다.

 

23 내 거룩한 뜻이 오랜 세기에 걸쳐 지상에 스스로의 나라와 절대적 통치권을 갖지 못해서 겪은 그 기나긴 고통 끝에, 내 인성이 그 거룩한 권리를 안전하게 지키며 내 뜻과 나의 원래 목적 피조물 가운데에 내 뜻의 나라를 세우는 것 ― 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던 것이다.

 

2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의 뜻이 어떻게 그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는지, 또 하느님의 뜻의 운명이 사람의 뜻과 관련하여 어떻게 바뀌었는지 더 잘 확인하려면, 너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온 세상의 역사 전체에 걸쳐 오직 두 사람만이 자기들의 뜻을 실행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만으로 살았는데, 이 두 사람은 바로 존엄하신 여왕님과 나 자신이었다.

 

25 그러니 우리 두 사람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거리 또는 차이가 무한정으로 커서, 우리의 몸이 지상에 남아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두 몸은 ‘거룩하신 피앗’의 왕궁으로 쓰였으니, 그들과 떨어져 있을 수 없음을 느낀 ‘피앗’이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면서 그 지배력으로 우리의 몸을 영혼과 함께 천상 아버지의 집으로 낚아채 갔던 것이다.

 

26 그 모든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느냐?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뜻이 단 한 번도 생명 활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내 거룩한 뜻의 활동 영역이며 현장이었으니, 이 거룩한 뜻의 권능은 한계가 없고, 그 사랑은 아무도 뛰어넘지 못하도록 큰 것이다.”

 

27 그 뒤 그분은 침묵을 지키셨다. 나는 ‘피앗’의 바다에 잠겨 있는 느낌이었는데, 오! 그래서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다정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피조물은 내 거룩한 뜻을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신적 왕권이 창조 사업 안에 유지해 온 질서에 혼란을 던져 넣었다.

 

28 피조물이 그렇게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타락하여 자기네 창조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하자 창조주께서 창조의 순간에 넘치는 사랑으로 그 안에 불어넣어 주신 신적 생명의 근원과 수단과 목적이 상실되고 말았다.

 

29 하지만 우리 (성삼위)는 그런 피조물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 안에 우리의 ‘거룩한 뜻’을 생명의 근원으로 넣어 주었고, 그로 인해 큰 기쁨에 싸이기를 바랐다. 그 안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의 권능’을, ‘우리의 행복’을, 끊임없이 울리는 ‘우리의 반향’을 감지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30 그런데 누가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느끼고 볼 수 있게 하겠느냐? 우리 안에 있듯 이 사람 안에도 동시에 공존하는 우리의 거룩한 뜻 자신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우리가 바란 것은, 현세에서나 영원 속에서나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창조주를 소유한 자를 피조물 안에서 보는 것이었다.

 

31 따라서 사람이 우리의 거룩한 뜻을 실행하지 않자, 우리는 우리의 작품이 뒤죽박죽 엉망인 것을 보는 뼈저린 고통을 경험하였다. 우리의 반향이 사라졌고, 큰 기쁨에 싸여 사람에게 새로운 행복을 주게 하던 우리의 황홀한 힘은 나약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일체가 거꾸로 뒤집혔던 것이다.

 

32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작품 안의 그러한 무질서를 참을 수 없어진 이유이다. 그리고 내가 내 ‘거룩한 피앗’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말을 한 것도 이 때문인즉, 우리가 사람을 질서 속에 위치시켜 그를 창조할 때 우리가 취한 첫 단계의 조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33 그것은 우리의 뜻이 사람 안에 생명의 수액처럼 흘러들어, 그를 다시금 우리를 소유한 자로, 우리의 지상 왕궁으로 기르면서 그와 우리의 행복을 이루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