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노래의 설명
1. 사랑이 이 경지에 이른 영혼은 마치 기진맥진한 병자 같다. 이런 병자는 미각도 식욕도 잃고 어떤 음식에도 싫증을 느끼고 모든 일이 그에게는 귀잖고 초조하게 여겨진다. 떠오르는 생각 모두와 온갖 것 안에서 그는 오직 하나의 욕구 단 하나의 소원만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건강에 관한 것인데 이에 연관이 없는 것은 전부 그에게는 성가시고 답답하다. 그러므로 영혼도 하느님 사랑에 병 들었기에 다음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무슨 일을 만나도 어떤 일을 다루든 그에게는 언제나 회복하고 싶어 갈망하는 것은 건강이니 즉 자기의 애인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그 일들에 연관을 가졌었다고는 하난 그 마음은 늘 애인 안에 있다. 거기에서 둘째 특성이 생긴다.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맛들일 수 없다. 더구나 또 셋째 특성도 여기서 이어진다. 즉 온갖 것이 그에게는 성가시고 어떠한 교제도 짐스럽고 짜증스럽다.
2. 이 이유는 모두 앞서 말한 사정에 기인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혼의 의지의 미각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맛스러운 음식을 만지고 또한 그것을 맛보았기에 그 결과로 어떤 일을 만나든 무슨 일에 관련되든 그 가운데서 다만 오로지 애인을 찾고 이를 즐기려 하면서 다른 어떠한 즐거움도 이득도 아랑곳 없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타 주님을 동산에서 찾아 만났을 적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이며 그는 주님을 보았을 때 동산지기라 생각하고 별로 관심도 없이 “당신이 저 분을 옮기셨으면 어디 모셨는지 말해 주세요. 제가 모셔가겠습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이 영혼도 같은 초조에 얽히어 온갖 것 안에서 애인을 찾는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금방 그분을 찾아 만날 수는 없고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가 된다. 그러므로 이미 어떤 것에도 맛스러움을 못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그에게 괴로움이 되고 따라서 때로는 매우 심한 고통이 된다. 사실 이러한 영혼은 남들과 사귀는 일이나 그밖에 일에 관계함을 몹시 괴롭게 느낀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하기 때문이다.
3. 아가의 신부는 애인을 찾는데 위에 말한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을 찾았건만 전혀 만날 수 없고 성안을 돌고 있던 야경꾼들이 나를 만나 때리고 상처 내고 성벽의 파수병은 내 겉옷을 벗기었소”(5, 6.7) 성안을 돌고 있던 야경꾼들이란 세상과의 교섭을 뜻한다. 하느님을 찾는 영혼이 그런 것과 만나면 슬퍼하고 고민하고 싫증의 상처를 많이 입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 중에는 사랑하는 분을 찾아 만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것 때문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성벽의 파수병들은 악마나 세속적 일을 상징하고 그런 것은 관상의 성벽을 감시하고 있어서 영혼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사랑에 충만한 관상의 평화와 고요의 겉옷(망또)을 빼앗는다. 사랑에 타는 영혼은 하느님을 안보고는 이 지상에 머무는 한 이런 것에서 피할 방법이 전혀 없음을 보고 애인에게 계속 애원하며 다음 노래로 말한다.
제 10 노래
당신 아닌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사모친 내 한을 당신이 꺼주어요
그리고 내 눈을 보게 해주셔요
당신은 그의 빛이시오니
당신만을 위하여 나는 그를 간직하려오
해 설
4. 이 노래 가운데서 영혼은 그 초조나 고민의 끝장을 내달라고 그의 애인에게 계속 간청한다. 그분 밖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에 그리고 영혼은 그 내적 눈으로 그 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그 분만이 그의 눈의 빛이요, 그는 그 눈을 오직 그 분을 위해서만 쓰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한다.
당신 아닌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5. 사랑의 욕정은 앞서 말했음 같이 의지가 사랑하는 이에게 관계없는 것과 적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영혼을 피로케 하고 괴롭히고 초조하게 하고 무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의지가 원하는데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과 또한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고민스러운 소원을 여기서 한이라고 하는데 애인을 소유하는 것 외에 이것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때문에 영혼은 애인에게 마치 한 더위에 괴로워하는 이의 고통을 찬물로 식혀주듯 당신의 현존으로 이 한들을 온통 풀어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푼다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 때문이다. 즉 자기가 사랑의 불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사모친 내 한을 당신이 꺼주어요
6. 영혼은 애인을 감동시키고 더욱 잘 설득하여 자기 소청을 들어주시게 하려고 그 분 밖에는 그 누구도 그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없기에 그의 한을 끄는 것은 그 분이 할 몫이라고 한다. 어느 영혼이 하느님 밖에는 부족도 즐거움도 갖지 않고 또 찾지 않게 될 때 하느님은 매우 빨리 이 영혼을 위로하고 그 필요를 채워 주시고 고민에서 구해 주신다는 것에 유의하자. 그러기에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런 즐거움도 갖지 않는 영혼은 애인의 방문을 받지 않고 오래 그대로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내 눈을 보게 해주세요
7. 이것은 곧 내 영혼의 눈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내가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당신은 그의 빛이시오니
8. 하느님은 영혼의 눈의 초자연적 빛이어서 이것이 없으면 영혼은 암흑 속에 있게 되는데 그러나 그 때문에만 아니고 애정 때문에도 영혼은 여기서 하느님을 자기의 눈의 빛이라고 한다. 흡사 사랑하는 이가 자기의 애정을 드러내기 위해 애인을 일컬어 내 눈의 빛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시구 가운데 영혼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내 영혼의 눈은 본질상으로도 사랑으로도 당신 밖에는 빛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제발 내 눈이 당신을 보도록 해주세요. 당신은 모든 점에서 그 빛이니까요.”라고
다윗이 “내 눈의 빛마저 내게는 없다.”고 서글프듯이 말한 것은 이 빛이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토비트 역시 “어둠 속에 앉아 하늘의 빛을 못 보는 내가 무슨 기쁨인들 맛보리오.”하고 말했다. 그가 원한 것은 하느님의 뚜렷한 직관이었다. 왜냐하면 천국의 빛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 요한이 묵시록에 “도성에는 그것을 밝혀 줄 해나 달이 필요 없었다. 하느님의 영광이 도성을 밝혀 주고 어린 양이 도성의 등불이었기 때문이다.”(21,23)하고 말한 대로이다.
당신만을 위하여 나는 그를 간직하려오
9. 여기서 영혼은 그 눈의 빛을 보여달라고 하늘의 신랑께 조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기는 다른 빛을 안 갖고 어둠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외의 다른 것을 위해서는 눈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하느님 이외의 것에 갖고자 하는 정신으로 의지적으로 눈을 멈추는 영혼에게는 이 시적 빛을 주시지 않음은 당연하다. 시작이 다른 것에 쓰여지므로 하느님의 빛을 받는 것을 스스로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하느님께만 그 눈을 열기 위해 다른 일체의 것에 눈감는 이는 이 빛을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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