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시(새번역)/영광

647. 복되신 동정녀의 별세, 몽소승천 그리고 충실함에 대하여

Skyblue fiat 2024. 3. 30. 05:32

647. 복되신 동정녀의 별세, 몽소승천 그리고 충실함에 대하여

 

1948. 4. 18.

 

마리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죽었었느냐? 그렇다. 만일 너희가 죽음을 영의 고상한 부분의 몸과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부른다면 말이다. 아니다. 만일 너희가 죽음을 살리는 영혼의 몸과의 분리, 더 이상 영혼이 살리지 않는 몸의 부패, 그리고 그 전에 음울한 무덤을, 그리고 이 모든 것들보다 죽음의 고통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내가 어떻게 죽었느냐?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어떻게 땅에서 하늘로, 먼저 나의 죽지 않는 부분으로, 그 다음에는 죽을 수 있는 부분으로 건너갔느냐? 죄의 얼룩을 알지 못했던 여인에게 합당하게 말이다.

그날 저녁 안식일의 휴식이 이미 시작되었었고, 나는 요한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수와 그의 일에 대해서. 저녁시간은 평화로 충만했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일하는 모든 소음들을 감소시켰고, 그 시간은 사람과 새의 모든 목소리를 감소시키고 있었다. 집 주위의 올리브 나무들만이 저녁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고, 천사들의 비행은 외딴 작은 집의 벽들을 스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아버지에 대하여, 하늘나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의 나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살아 있는 불로 타오르게 되는 것이고, 영혼의 신비한 비행들을 위하여 그것을 해방하기 위하여 물질의 끈들을 태워버리는 것이다. 만일 그 불이 하느님께서 그분을 섬기도록 사람들을 땅 위에 보존하시기 위하여 정하신 한계들 안에 들어 있다면, 그 열기 속에서 타버리지 않고, 생명의 완성을 발견하며, 살고 불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 한계들을 제거하시고, 하느님의 불이 무제한으로 영혼을 공격하고, 그것에게로 끌어당길 때 그때는 그 영혼도 무제한으로 사랑(the Love)에 응답하여 자신을 물질로부터 분리하여 사랑(the Love)이 그것을 촉구하고 초대하는 곳으로 날아간다. 그러면 그것은 귀양살이의 끝이고, 고향으로의 귀환인 것이다.

 

그날 저녁에 내 영혼의 억제할 수 없는 열정과 한없는 활기는 감미로운 무기력과, 물질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신비로운 느낌과 합쳐졌다. 마치 지친 내 몸이 잠에 빠져 들어가는 동안에 추론함에 있어 훨씬 더 생생해진 내 지성은 하느님의 광휘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모든 행동의 다정하고 신중한 증인인 요한은 그가 내 외아들의 뜻에 따라 내 양자가 되었을 때부터 작은 침대에서 쉬라고 나를 다정하게 설득했고, 기도하며 나를 지켰다. 내가 땅 위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리는 동정 사도인 요한이 속삭이는 말들이었다. 그것들은 나에게는 요람 곁의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묘사하기에는 너무 숭고한 내 영혼의 마지막 탈혼에 있어 나와 동행했다. 그것들은 나를 하늘까지 동행했다.

이 감미로운 신비의 유일한 목격자인 요한은 내 옷이나 베일을 바꾸지도, 내 몸을 씻거나 방부처리하지도 않고, 내 흰 겉옷으로 나를 감싸 자기 혼자 나를 처리했다.

 

성령강림으로부터 내 몽소승천에 이르는 이 주기의 두 번째 삽화의 요한의 말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영은 내가 부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사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었다. 순결하고, 다정하고, 하느님의 신비들과 멀리 있는 그의 동료들에 대하여 조심성 있는 그는 비밀을 지키고, 하느님의 다른 종들이 다시 나를 볼 수 있고, 그래서 그 보는 것이 그들의 임무들의 고통들과 역경들에 대한 위안과 도움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마치 그가 그들이 올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기다렸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은 달랐다. 그것은 항상 그렇듯 총애 받는 제자에게는 좋은 것이었고, 모든 신자들에게는 항상 그렇듯이 올바른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전자의 눈꺼풀들을 무겁게 하시어 잠들게 하심으로써 그로부터 내 몸도 빼앗아가는 것을 보는 고통을 면제해주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신자들에게는 일보 전진한 진리를 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육신의 부활과 의인들에게 주시는 영원하고 복된 생명의 보상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었고, 신약성경의 가장 강력하고 유쾌한 진리들, 즉 사람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혼례와 내 태 안에 심겨진 하느님의 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에 너희 모두를 복된 고향에서 영원히 가지기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인 내 심장이 뛰고 있고, 모든 이들, 의인들과 죄인들에 대한 애타는 사랑으로 참 하느님이시자 참 사람인 내 아들의 신적, 인적 본성 안에서의 내 원죄 없는 잉태(My Immaculate Conception)와 동정인 나의 하느님의 어머니 됨(My Divine virginal Maternity)을믿게 하시어 그들을 격려하시려는 것이었다.

 

내가 천사들에 의하여 작은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내 영이 이미 나에게 돌아와 있었느냐? 아니다. 내 영은 땅 위에 다시 내려오지 않아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흠숭하고 있었다.

그러나 땅, 유배지, 하나이시고 삼위이신 내 주님으로부터의 분리의 때와 장소가 영원히 버려졌을 때, 내 영(spirit)은 돌아와 내 영혼(soul)의 중심에서 빛나며 육체를 그 잠에서 끌어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의 경우와 같이 내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천사들의 도움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 신비하고 신령한 잠에서 깨어났고, 마침내 내 육체는 그때 영광스럽게 된 육체들의 완전을 얻었었기 때문에 날아갔다. 나는 사랑했다. 나는 내가 다시 만난 내 아들을 사랑했고, 한분이시오 삼위이신 내 주님을 사랑했다. 나는 영원히 사는 존재들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주님을 사랑했다.”

 

 

1944. 1. 5.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의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내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그 모든 향기를 발산한 다음 별들의 아래에서 몸을 숙이고 그 순백의 꽃받침을 닫는 피로에 지친 백합꽃처럼 그분의 작은 침대에 누워 하느님에 대한 마지막 고요한 묵상 안에서 잠심하시려고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하여 눈을 감으셨다.

그분의 수호천사는 하느님께서 명하신 시간에 그 영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키고 땅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키는 황홀의 절정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그분의 쉬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때 하느님의 감미로운 초대의 명령이 이미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한편 지상의 천사인 요한도 그 신비로운 휴식을 들여다보며 자기를 막 떠나시려는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숨을 거두신 것을 그가 보았을 때 그는 그분께서 불경하고 호기심어린 눈들에 의하여 침범당하시지 않고, 죽음을 넘어서도 그토록 평온하고 아름답게 주무시는 하느님의 티 없는 정배이자 어머니로 남아 계시도록 계속 그분을 지켜보았다.

토마스가 마리아의 유골 항아리를 열었더니 꽃들만이 거기 있었다고 전승은 말한다. 그것은 순전히 전설일 뿐이다. 어떤 무덤도 마리아의 시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에 따르면, 마리아께서는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돌아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의 시체는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분의 영과 분리되었을 뿐이었고,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몸은 그것을 앞서간 영과 다시 결합했다. 황홀이 끝나면, 즉 영이 그것의 통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면 탈혼도 끝나는 일반적인 법칙들과는 반대로 장례의 침대 위의 오랜 휴식 후에 영과 결합한 것은 마리아의 육체였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나는 내 능력 외의 아무런 다른 도움 없이 무덤 밖으로 나왔다. 마리아께서는 침울한 부패의 무덤의 공포를 경험하지 않고, 나에게로, 하느님께로, 하늘로 오셨다. 그것은 하느님의 가장 눈부신 기적들 중 하나였다.

만일 우리가 에녹과 엘리야가 주님께 소중한 사람들이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땅으로부터 납치되어 하느님과 하늘의 주민들에게만 알려진 장소가 아닌 다른 어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실 유일한 기적은 아니다.

그들은 의인들이었다. 그러나 성덕에 있어 오로지 하느님보다만 열등한 내 어머니와 비교하면 항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마리아의 시체와 무덤의 유물은 없다. 왜냐하면 마리아께서는 무덤을 가지지 않았고, 그분의 몸은 하늘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1944. 7. 8. 그리고 15.

마리아께서 말씀하신다.

“내 아들의 잉태는 황홀이었고, 그를 낳은 것은 더 큰 황홀이었으며, 내가 땅에서 하늘로 건너가는 것은 황홀들 중의 황홀이었다. 수난 동안만 어떤 황홀도 혹독한 내 고통을 견딜 만하게 해주지 못했다.

내가 거기서 하늘로 납치된 집은 예수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라자로의 헤아릴 수 없는 선심들 중의 하나였다. 그곳은 예수가 승천한 곳 가까이에 있는 겟세마니의 작은집1) 따라서 마리아와 요한이 에페소에서 사셨다는 전승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이었다. 그 집의 흔적을 찾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로마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그 집도 황폐하게 되었고, 그 잔해도 시대들이 흐르는 동안 흩어져버렸다.

 

1943. 12. 18.

마리아께서 말씀하신다.

“내 아들의 탄생이 나에게 하나의 탈혼이었고, 그 시간에 나를 붙잡았던 하느님 안에서의 황홀로부터 내가 내 아기를 품에 안고 나 자신과 땅으로 돌아왔듯이, 부적절하게 내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황홀이었다.

내가 성령강림의 밝은 아침에 받았던 약속에 의지하여 나는 사랑(the love)께서 나를 그분에게로 납치해 가시려는 그분의 마지막 오심의 접근은 내 안에서 항상 불타고 있었던 사랑의 불의 증가로 그 자신을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나에 관한 한, 시간이 갈수록 영원한 사랑 속에 융합되기를 바라는 내 소원은 더 커졌다. 나는 내 아들과 결합하려는 갈망으로, 그리고 나는 내가 하느님의 어좌의 발치에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작용하고 있을 때보다 그들을 위하여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는 확실성으로 추동되었다. 나는 점점 더 불타는 격한 몸짓으로 내 영혼의 모든 힘으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곤 했었다. ‘주 예수여, 오세요! 영원한 사랑이여, 오세요!’

나에게 시들어가는 꽃에 대한 이슬과고 같았던 성체는 실로 생명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내 마음의 억제할 수 없는 열망을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성체성혈의 형태로 하느님인 내 아들을 받아, 마치 내가 동정의 내 몸 안에 그를 가졌던 것처럼 그를 내 안에 지니는 것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나의 전체 자아는 삼일 하느님(the God One and Trine)을 원했다.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를 감추려고 내 예수가 택한 베일들 아래에서가 아니라 하늘의 중심에 계셨고, 계시고, 계실 그대로의 그분을 뵙기를 원했다. 내 아들 자신은 그의 성체 변모 안에서 무한한 갈망의 포옹들로 나를 불타오르게 했고, 그가 나에게 올 때마다 그는 그의 사랑의 힘으로 처음에는 내 영혼을 거의 뿌리 뽑았고, 그 다음에는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부르며 남아 있었다. ‘어머니!’ 그래서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있기를 열망한다고 느꼈었다.

나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내 지상 생활의 마지막 날들에 나는 신생의 교회를 보호하려는 소원마저 내 안에 있지 않았었다. 나는 하느님을 소유할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모든 것은 그분을 소유하려는 갈망 안에 사라졌었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런 전적인 사랑에 도달하려고 애써라. 모든 땅의 것들을 무가치하게 여겨라. 하느님만을 목표로 해라(Aim only at God).

욕망의 가난은 헤아릴 수 없는 재물인데 너희가 이것으로 부유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너희 영혼들 위로 몸을 숙이시어 먼저 그것들을 가르치시고, 나중에는 그것들을 취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그것들과 함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로 올라가 그분들을 알고, 복된 영원을 위하여 그분들을 사랑하고, 너희의 형제들을 위한 그분들의 은총들의 재물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더 이상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빛과 결합한 빛들이 될 때만큼 그들을 위하여 적극적이 될 수는 없다.

 

영원한 사랑(the Eternal Love)의 접근은 내가 바랐던 표징이었다. 모든 것은 내 영적 시각을 열어주시고, 내 영혼을 취하시기 위하여 내 위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빛과 목소리 안에서 그 빛과 색깔, 목소리와 존재를 잃었다.

사람들은 내가 그 시간에 내 아들의 도움을 받아 환호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다정한 내 예수는 사랑께서, 즉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제삼위이신 성령께서 내 삶에서 세 번째로 참으로 강력하게 하느님다운 입맞춤으로 나에게 입 맞추셨을 때 내 영혼은 마치 백합꽃의 꽃받침 안의 한 방울의 이슬이 햇볕에 증발되는 것처럼 그분을 관상하며 나 자신을 잃었을 때 진실로 성부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영과 함께 호산나를 노래하며 내가 항상 흠숭해왔던 삼위의 발 아래로 올라갔다.

그 다음에 나는 불의 받침 안의 진주처럼 적절한 순간에 나의 영원한 천국에서의 탄생에 있어 나를 돕기 위하여 왔었던 천사들의 영들에게 처음에는 도움을 받고, 그 다음에는 그들을 앞장서서 내 예수가 하늘의 문턱 앞에서 기다리고, 나의 지상에서의 의인 정배와 내 그루터기의 왕들과 족장들, 그리고 최초의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그 문지방에서 기다리는 가운데 끝없는 기쁨의 나라로 들어갔다.

나는 하느님의 보잘것없는 여종으로서 수많은 고통과 수많은 모욕을 겪은 다음 모후(Queen)로서 그리로 들어갔던 것이다. 하늘은 나를 가지하는 기쁨, 그 모후를 가지는 기쁨을 간직한 채 다시 닫혔다. 그 육체는 모든 사람의 육체 중 유일하게 마지막 부활과 최후의 심판 전에 영광스럽게 되었다.”

 

1946. 5. 1.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진짜 죽음에 의한 영혼과 육신의 분리와 일시적인 탈혼(contemplative rapture)이나 황홀(ecstasy)에 의하여 영의 육체로부터의, 그리고 살리는 영혼으로부터의 일시적 분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영혼의 육신으로부터의 분리는 진짜 죽음을 가져오는데, 탈혼적 관상(the ecstatic contemplation), 즉 영이 감각들과 물질의 경계들 밖으로의 일시적인 탈출은 죽음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단절되지 않고, 관상의 불 속에 잠기는 그것의 보다 나은 부분을 통해서만 분리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한 그들 안에서 죄나 의덕을 통하여 죽어 있거나 살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참된 관상(觀像, contemplation)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여 있는 동안에 육체를 살아 있게 하는―그런데 이 특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영혼이 그것 안에 더 고귀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영혼의 영혼, 또는 영의 영인데, 그것은 의인들 안에서는 매우 강하지만, 그들의 냉담이나 소죄들을 통해서라도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기를 멈추는 사람들 안에서는 그 당사자에게서 도달한 완덕의 정도에 따라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하느님을 관상하고 아는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약해진다.

한 사람이 그의 모든 힘과 모든 능력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길수록, 그의 영의 보다 고귀한 부분은 영원한 진리들을 알고, 관조하고, 통달할 수 있는 능력을 아는 그것의 능력을 증가시킨다.

이성적인 영혼을 부여받은 사람은 하나의 공간인데,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그분 자신으로 채우신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 다음으로 모든 사람들 중 가장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하느님, 그분의 은총들과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공간이었고, 그래서 모든 시대들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들 위에 시간의 끝까지 넘쳐흐르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사랑의 파도들에 잠겨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사랑의 대양이 되셨고, 그분의 사랑의 파도들을 그분께 충실한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분의 탕자들에게도 그들의 보편적 구원을 위하여 넘쳐흐르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1943. 12.

마리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내 겸손으로 인하여 그토록 많은 영광이 나를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생각 안에서 하느님을 모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된 내 인간 육체는 부패를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생명이시고, 그분께서 어떤 사람을 그분 자신으로 가득 채우실 때 그분의 이 행동은 죽음의 부패로부터 보존하는 향유와도 같기 때문이다.

나는 순결하고 생산력이 있는 포옹으로 하느님과 결합했을 뿐만 아니라, 내 태중에 숨어서 인간의 육체로 감싸지시는 데 골몰하고 계셨던 천주성의 발산들로 나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차 티 없는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정하신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그분의 여종을 위하여 내 아들의 손의 접촉을 내 몸에 다시 느끼고, 그의 포옹과 입맞춤을 다시 받고, 내 두 귀로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내 두 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는 기쁨을 마련하셨다고, 이것이 나에게 허락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었다. 이 지복들이 내 영에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했을 것이고, 그것은 내 자아를 복된 행복으로 가득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죽음 없이 지상낙원에서 천상낙원, 즉 영원한 나라로 건너가도록 정하신 사람에 관한 그분의 최초의 창조적인 생각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티 없는 내가 나의 지상의 삶이 끝나자마자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원하셨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생각하셨고 원하셨던 것의 확실한 증인이다. 죄를 모르는 무죄한 삶 후에 물질적인 몸과 영적인 영혼으로 만들어져 있는 완전한 그의 존재와 함께 하느님과 은총에 충실한 채로 남아 있었던 모든 사람이 가지게 되어 있는 하느님의 생각 안에 있었던 몸과 영혼 둘 다인 온전한 완전과 함께 하느님에 의하여 그에게 주어진 그의 자아의 완전성을 증가시키면서 어떤 사람이 한 집의 문지방을 지나 궁궐에 들어가는 것처럼 현세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조용히 건너가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늘에 있으면서 그것을 비추어는 그것을 가득 채우는 영원한 태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빛 안에서 이 완전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하늘의 영광으로 높여진 나를 성조들, 예언자들, 성인들, 천사들, 순교자들 앞에 세워놓으시고 말씀하셨다.

“여기 창조주의 완전한 작품이 있다. 이는 내가 사람의 모든 아들들 중 보다 참된 내 모습으로 나를 닮도록 창조한 하느님의 창조적 걸작의 열매, 우주가 오로지 한 존재 안에서만, 하느님처럼 영원한 영 안에서, 지극히 거룩하고 무죄한 몸 안에서 그분처럼 영적이고, 지적이고, 자유롭고, 거룩한 사람을 보는 우주의 경이이다.

창조계의 세 왕국들 2)이 세상, 연옥, 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안의 모든 다른 존재는 이 앞에 절해야 한다. 이는 사람을 위한 내 사랑의 증인인데, 나는 사람에게 완전한 유기체와 내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된 운명을 주기를 원했다. 이는 내가 삼위일체의 뜻에 따라 내 눈 앞에서 회복되고, 재창조되도록 허락한 사람을 내가 용서했다는 증거이다.이는 신비로운 시금석이고,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연결고리이며, 시대를 초기로 돌려놓아 하느님인 나의 눈에 내가 창조했던 대로의 하와를 바라보는 기쁨을 주고, 지금 그분께서는 내 말씀의 어머니이시고, 가장 큰 용서의 순교자이시기 때문에 훨씬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하게 된 하와를 바라보는 기쁨을 준다.

 

나는 어떤 얼룩도, 가장 작은 흠도 결코 알지 못했던 그분의 티 없는 마음을 위하여 하늘의 보고를 열고, 결코 교만을 알지 못했던 그분의 머리를 위하여 나는 내 광채로 면류관을 만들어 그분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 너희의 모후로 만든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나에게 가장 거룩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눈물이 없다. 그 영들이 울 수 있었다면 그들은 감격으로 인하여 흐르는 액체인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터이지만, 하느님의 이 말씀들 후에 빛들의 반짝임이 있었고, 광휘들이 더 생생한 광휘들로 변했고, 사랑의 불꽃의 불탐이 더 뜨거운 불로 변했으며,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영원히 복된 여종을 찬미하기 위한 능가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화음들이 있었다. 이 소리에는 내 아들의 목소리도 합쳐져 있었다.”

 

 

작품의 이유들. 작품과의 이별

 

1947. 4. 28.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작은 요한에게 삽화들과 내 말들을 비추어주고, 받아쓰게 한 이유들은 이 희생자 영혼에게 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해주는 기쁨 외에도 다양하다.이 모든 것들의 움직이는 영은 가르치고 싸우는 교회3)지상의 교회)에 대한 내 사랑과 완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영혼들을 도우려는 내 갈망이다. 나에 대한 지식은 올라가는 데 도움이 된다. 내 말은 생명이다.

 

나는 주요한 이유들을 말하겠다.

1. 1947. 1. 18. 받아쓰기에서 내가 언급했던 이유들을 작은 요한은 완전하게 여기 삽입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큰 이유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멸망해가고 있는데,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선물로 주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 거룩한 대리자 비오10세에 의하여 단죄된 현대주의가 타락하여 점점 더 해로운 사상들이 생겨나게 하는 이 시대에 내 대리자로 대표되는 거룩한 교회가 아래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싸울 더 많은 수단들을 가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교리들의 초자연성, 그리스도의 천주성, 그에 관하여 믿음과 역사(복음서, 사도행전, 사도들의 편지들, 성전)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실제적이고 완전한 하느님이자 사람인 그리스도의 진실성.

내가 말로 가르친 내 참 교리로서의 바오로와 요한과 니체아, 에페소, 칼체돈 공의회의 가르침.

하느님의 것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한없는 내 지식.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적인 교회의 교리들과 성사들의 신적 기원.

내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준 복음의 시간의 끝까지의 보편성과 영속성.

내 교리의 시초부터의 완전성, 연속적인 변형들을 통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형성되지 않고, 지급의 모습으로 주어졌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교리, 은총의 때의 교리, 신적이고, 완전하고, 불변하는 하늘나라의 교리와 너희 안의 하느님 나라의 교리, 하느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쁜 소식.

나는 너희가 일곱 개의 머리들과 열 개의 뿔들을 가지고, 그 머리에 일곱 개의 왕관들을 쓰고, 그 꼬리로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을 끌어당겨 그것들을 아래로 내동댕이치고―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그것들은 땅보다 훨씬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여인(the Woman)을 박해하는 붉은 용과, 그리고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기적들에 매혹되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는 바다의 짐승들과 땅의 짐승들과, 지금까지 덮여 있던 책장들도 활짝 펼쳐진 영원한 복음서를 들고 사람들이 그 빛을 통하여 그들을 그놈의 어둠 속으로 빠져서 죽게 하기를 원하는 일곱 개의 턱들을 가진 거대한 뱀의 똬리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가 돌아왔을 때 내가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믿음과 사랑을 다시 발견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사탄과 사람들의 작품이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게 하는 것보다 더 많게 하기 위하여 하늘 가운데에서 날아다니는 내 천사(My Angel)를 대립시키기를 바란다.

 

2. 사제들과 평신도들 안에서 복음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일깨우는 것, 무엇보다 내 어머니에 대한 새로워진 사랑이다. 그분의 기도들 안에 세상의 구원의 비밀이 들어 있다. 내 어머니이신 그분께서는 저주받은 용을 이기신 분이시다. 그분에 대한 너희의 새로워진 사랑과 그분에 대한 너희의 새로워진 믿음과 그분에 관한 지식으로 그분의 능력을 도와드려라. 마리아께서는 세상에 구세주를 주셨다. 세상은 다시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3. 영적 선생들과 지도자들에게 내가 살았던 세상의 다른 영혼들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사용했었던 다른 방법들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임무수행을 돕는 것.

왜냐하면 모든 영혼들에 대하여 유일한 방법만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완덕을 지향하는 의인을 그것으로 이끄는 방법은 죄 중에 있는 신자에게 사용되어야 할 방법과 이교도에게 사용되어야 할 방법과 다르다.

너희 선생이 판단했었던 것처럼 너희가 참 하느님을 권력과 오만의 우상들이나 황금의 우상들이나 음란의 우상들이나 그들의 지식의 교만이라는 우상으로 대체한 불쌍한 사람들을 이교도들이라고 성공적으로 판단한다면, 너희는 너희 가운데 많은 이교도들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개종자들, 즉 그리스도의 사상은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이 분리된 교회들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시민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써야 할 방법도 다르다. 아무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이 길 잃은 양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을 사랑하고, 유일한 양 우리로 그들을 다시 데려오려고 힘써 목자 예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라.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읽을 때 반박할 것이다. ‘예수께서 로마인들이나 그리스인들과 접촉하셨다는 것은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페이지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거나 복음사가들이 깨뜨릴 수 없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그들이 찬성하지 않았던 일화들 위에 드리웠던 침묵의 두꺼운 커튼들 뒤에 숨어 있어 겨우 추적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으냐! 너희는 내가 했었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가 내 공생활에 대한 이 삽화를 읽고 받아들인 후에도 너희는 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전해주기 위하여 작은 요한에게 모든 것을 알게 했다면, 나는 내가 임무를 수행했었던 모든 날들과 각 날들에 행했었던 모든 행동들을 기록하는 피로로 인하여 그녀를 죽게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분께서 하셨던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되어야 했을 책들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요한은 말한다.4) 요한21,25)

과장법은 제쳐두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만일 나의 모든 개별적인 행동들, 나의 개별적인 모든 가르침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한 나의 보속들과 기도들이 기록되어야 했다면, 나에 대하여 말하는 책들을 보관하는 데 너희의 도서관들 중 하나,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의 홀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나에 대한 일을 그토록 적게 알고, 그래서 거의 항상 음란과 이단으로 더럽혀진 인쇄물들을 그토록 경배하기보다는 너희가 그토록 무익하고 더럽고 유해한 지식을 불살라버리고, 내 책들을 위하여 방을 마련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4. 살과 피로는 아담의 진짜 자녀들인, 그러나 죄 없는 아담의 자녀들인 사람의 아들과 마리아의 모습들의 진실성을 회복하는 것. 만일 우리의 최초의 부모들이, 그들이 그러했을 것으로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의 완전한 인성―사람이라는 뜻으로, 즉 그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영적인 성질과 물질적인 성질의 두 가지 성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사람의 자녀들은 우리와 같았을 것이다.

완전한 감각들, 즉 그것들의 뛰어난 능률성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복종했을 것이다. 감각이라는 말로 나는 정신적인 감각들과 육체적인 감각들 모두를 포괄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육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 사랑의 유대만으로 결합된 자기의 남편에게, 그리고 자기의 아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가졌을 것이다.

극진한 사랑. 자기에게서 태어난 자녀에 대한 완전한 여인의 모든 사랑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하와도 마리아처럼 이렇게 사랑해야 했을 것이다. 즉 자기의 아들이 가져다주는 육체적인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이 창조주의 아들이고 인류를 번식시키라는 그분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위하여 사랑했어야 했다.

또한 마리아께서는 자기의 아들이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완전한 신자의 모든 열정으로 사랑하셨다. 나는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너무 다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마리아께서 누구신지 숙고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마리아께서는 죄 없는 여인이셨다. 따라서 하느님, 그분의 부모, 그분의 남편, 그분의 아들, 그분의 이웃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는 결함이 없었다. 그들은 어머니가 나를 자기의 태의 아들로 보는 것 외에 나에게서 무엇으로 보았는지 숙고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그리고 끝으로 나는 그들이 마리아의 국적을 숙고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그분께서는 히브리 민족, 동방 민족의 여인이셨고, 현대로부터 아주 오래 전의 시대의 여인이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소에서 너희에게는 과장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랑을 과장하는 어떤 말에 대한 부연설명들이 이런 요소들로부터 뒤따라 나오게 된다. 동방적이고 히브리적인 말투들은 보통 말에 있어서도 미사여구가 많고, 장중하다. 그 시대의 그 민족의 모든 글들이 그것을 증명하는데, 시대들이 흐르는 동안에도 동방의 말투는 아주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생활의 악이 그렇게도 많은 사랑을 죽여버린 20세기 후이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너희 시대의 메마르고 경박한 여자와 비슷한 나자렛의 한 마리아를 너희에게 주기를 기대하겠느냐? 마리아께서는 그분의 모습 그대로이며, 온순하고, 깨끗하고, 다정한 이스라엘의 처녀, 하느님의 정배, 하느님의 동정 어머니는 너희 시대의 지나치게 병적으로 흥분한 여자나 얼음처럼 이기적인 여자로 바뀔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너무 다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 하느님이 계셨고, 한분이시고 삼위이신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가 그분께 드린 고통으로 인하여 그분께 보상해드린 마리아를 사랑하심으로써 위로받으셨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분의 피조세계 안에서 그분의 하늘들의 주민들에게 다시 영광을 주실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말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사랑은 질서를 어길 때, 즉 하느님의 뜻과 지켜야 할 의무를 어길 때, 그때만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그들에게 말하겠다.

지금 생각해보아라. 마리아의 사랑이 그러했는가? 내 사랑이 그러했는가? 그분께서 이기적인 사랑으로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행하는 것을 막았는가? 혹시 내가 내 어머니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으로 내 사명을 거부했는가? 아니다. 두 사랑들은 하나의 갈망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뿐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그의 공적 가르침으로, 그리고 칼바리아의 십자가로 넘겨주시며 그에게 모든 작별인사들을 하셨고, 아들도 어머니에게 고독과 고통을 넘겨드리며 그분께 모든 작별인사들을 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가슴이 미어지지는 것을 느끼는 우리의 인성과 슬픔으로 부서지는 우리의 마음들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공동구속자(the Co-Redeemer)가 되실 수 있었다.

그것이 심약함이냐? 그것이 감상주의냐? 사랑할 줄을 알지 못하고 더 이상 사랑과 사랑의 목소리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 사람들이여,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다.

또한 이 작품의 목적은 일정 수의 상황들이 어둠으로 덮여 있고, 그래서 밝은 복음서의 그림에 어두운 부분들을 만들어놓은 어떤 점들과, 한 일화와 다른 일화 사이의 모호해지기만 한 점들, 그리고 다른 난해한 점들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해독하는 능력은 일어난 특정 상황들과 완고한 고집불통의 적대자들에 대한 나의 용서하려는 지속적인 권고들, 온유하고 겸손한 것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내가 가져야 했던 어떤 강한 태도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러나 너희 모두는 하느님께서도 그분의 모든 자비를 사용하신 다음에 그분께서 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관용을 이용하고 그분을 시험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그분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이제 그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조롱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지혜로운 말이다.

 

5. 나의 오랜 수난의 복잡성과 지속시간의 정확한 지식을 가지는 것. 그것은 몇 시간 동안에 완수된 피어린 수난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수년 동안 지속되었던 매일의 고통으로 나를 소모시켰고,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똑같은 기간 동안 심장이 고통의 칼에 꿰뚫린 내 어머니의 수난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가지는 것. 그리고 이 지식을 통하여 우리를 더 사랑하도록 너희를 추동하려는 것.

 

6. 내 말의 힘과 그것을 받는 사람이 선의의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느냐, 아니면 결코 옳지 않은 관능적인 뜻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사도들과 유다, 이것이 상반되는 두 가지 본보기들이다. 전자는 아주 불완전하고, 투박하고, 무식하고, 과격했지만, 착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후자는 그들 대다수보다 더 유식하고, 수도와 성전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련되었지만,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 전자의 선 안에서의 발전, 그들의 상승을 지켜보아라. 그리고 후자의 악 안에서의 발전, 그의 하강을 지켜보아라.

시각적, 정신적 잘못을 통하여 무겁고 모호한 힘들에 대한 어려운, 아주 어려운 싸움으로 성덕에 이르는 사람을 정열들과 감정들이 결여된 부자연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성인들의 실재를 곡해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착한 열한 사도들의 완전을 향한 이 발전을 지켜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공로는 무질서한 정열들과 유혹들에 대한 승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성취된 승리이고, 하느님을 영원히 누리는 것인 최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만 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기 위한 방법을 주시지만, 사람의 자유를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설혹 그가 다른 사람들이 회개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 말의 다양한 효과들을 검토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도 지켜보기 바란다. 영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도 말이다. 내 말은 그것이 착한 뜻으로 받아들여질 때 외적이고 내적인 완전으로 이끌어감으로써 그들 모두를 변화시킨다.

자신들의 무식과 내 겸손으로 인하여 사도들은 사람의 아들을 지나친 친근함을 가지고 대했고―나는 그들 가운데 있는 착한 선생이었을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때로 지나치게 무례하게 대해도 괜찮은 겸손하고 참을성 있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편의 불손함이 아니라 무식함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용서할 만한 것이었다―서로 잘 다투고, 이기적이고, 그들의 사랑과 내 사랑에 대하여 질투하고, 백성들에게 참을성이 없었고 ‘사도들'이기 때문에 약간 교만했고, 비상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군중들에게 그들을 보여주는 엄청난 능력들을 가지려고 열심이었는데,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새 사람들로 변하여, 처음에는 나를 본받고 그래서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그들의 정열들에 재갈을 물렸고, 그 다음에는 점점 더 나의 참된 자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를 하느님인 주님으로 보고 사랑하고 대할 정도로 그들의 태도와 사랑을 바꾸었다.

 

혹시 땅 위에서의 내 생애의 끝 무렵에도 그들은 여전히 초기의 피상적이고 유쾌한 친구들이었느냐? 특히 그들이 부활한 후에 사람의 아들을 한 친구로 취급하는 친구들이었느냐? 아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왕의 대신들이고, 나중에는 하느님의 사제들이다.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고, 완전히 변모했다.

사도들의 성격이 묘사된 대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을 부자연스럽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고려하기 바란다. 나는 까다로운 박사도, 교만한 왕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선생도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나는 아주 자주 내 지식의 향기를 잃은 그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선생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하여 가공되지 않은 재료들을 사용하여 형성하고, 빈 그릇들을 모든 종류의 완덕들로 채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 그분께서는 돌로부터 아브라함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을 만들어내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선생을 만들어내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원했다.

 

7. 마지막으로 유다의 신비를 너희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한 영혼의 실패의 신비이다. 너무 자주 되풀이되고, 너희의 예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가 되는 신비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하느님의 종들과 아들들로부터 변하여 마귀들과 은총을 죽임으로써 하느님을 죽이는 사람들이 되는지를 너희에게 알게 하여 그 지식이 너희로 하여금 심연으로 떨어지는 길들 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그것이 심연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는 무분별한 어린양들을 제지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너희에게 가르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의 지성을 기울여 한 복합체인 유다의 소름끼치지만 공통된 모습을 연구해라. 너희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싸워야 하는 모든 중대한 악덕들이 뱀들처럼 그의 안에서 꿈틀거린다. 그것은 너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선생들과 지도자들로서 너희의 직무에 있어 너희에게 보다 유익할 교훈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삶의 상태에서 자신들을 사탄에게 넘겨줌으로써 유다를 본받아 영원한 죽음을 만나는지!

 

일곱 가지 이유들이 있는 것처럼 일곱 부분들이 있다.

1. 숨은 생활(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무염시태부터 성 요셉의 죽음까지)

2. 공생활 첫 해

3. 공생활 둘째 해

4. 공생활 셋째 해

5. 수난의 준비(테벳 달에서 니산 달까지, 즉 라자로의 임종의 고통부터 베타니아에서의 만찬까지)

6. 수난(라자로와의 작별부터 내 매장, 그리고 부활절 새벽까지의 이어지는 날들)

7. 부활에서 성령강림까지

부분들의 구분은 위에서 지시한 대로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옳은 구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은? 너희는 너희의 선생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느냐? 너희는 나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마음속에서 말하고, 너희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너희는 작은 요한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 있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정의를 가지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리스도인 자매이자 하느님의 도구에 대한 사랑을 짓밟음으로써 작은 요한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내 도구가 된다는 것은 잔잔한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피로이자 노력이고, 모든 것에 있어 고통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가 선생에게 준 것, 즉 고통을 선생의 제자들에게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사제들, 특히 동료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들을 지고 나아가는 이 작은 순교자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이유는 너희는 너희 마음속에서 너희 자신들에게 말하며 교만, 질투, 불신 그리고 다른 불평의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불평들과 너희 분개한 놀람에 대하여 대답하겠다.

최후의 만찬의 저녁에 나는 나를 사랑했던 열한 사도들에게 말했다. ‘위로자께서 오실 때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주실 것이다.’ 내가 말할 때 나는 거기 있었던 사람들 외에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와 원하는 뜻을 가지고 내 제자들이 될 모든 사람들에게도 항상 유의하고 있었다.

그분의 은총으로 너희 안으로 하느님을 기억하는 능력을 주입해주시는 성령께서는 영혼들을 원죄의 무감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고, 그분의 시각과 영적 지식을 누리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영들의 광휘를 뒤덮고 있는 아담의 비참한 유산으로 인한 모호함들을 그들에게서 덜어주심으로써, 내가 말했던 것을 그분께 인도받는 하느님의 그분의 자녀들의 마음을 ‘일깨우심으로써’ 스승으로서의 그분의 일을 완성하신다.

이것이 복음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일깨운다는 것은 복음의 영을 비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복음의 영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love)인 복음의 영은 사랑(the Love)에 의하여, 즉 성령에 의하여 이해되게 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복음서의 참다운 저자이시고, 그것의 유일한 해설자(Commentator)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 작품의 저자만이 그것의 영을 알고, 설사 그가 그 독자들에게 그것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해도 자기는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완전은 결함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인 저자가 실패하는 것을 지극히 완전하시고 지혜로우신 성령께서는 성공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저자이신 성령만이 그것을 기억하시고,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혼들의 가장 깊은 곳들 안에서 그것을 해설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보내주실 성령, 위로자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해주실 것이다.’5) 요한14,26)

‘진리의 성령께서 오실 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그분의 생각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분께서 들으신 대로 모든 것을 말씀하실 것이며, 너희에게 미래를 선포해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나의 것을 취하여 그것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나의 것을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6) 요한16,13―15)

그 다음에 만일 너희가 성령께서는 복음서의 참다운 저자이신데, 왜 그분께서 이 작품에서 언급되었던 것, 그리고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마감하는 말로 사람들에게 이해시킨 그것을 성령께서 기억하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하느님의 생각들은 사람들의 생각들과 다르고, 그것들은 항상 옳고 비판에 노출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대답한다.

나아가 만일 너희가 계시는 마지막 사도와 함께 마감되었고, 그 사도가 계시록에서 ‘만일 누군가가 여기에 무언가를 덧붙인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재앙을 그에게 더하실 것입니다.’7) 묵시22,18)하고 말했기 때문에 덧붙일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계시의 마지막 완성이 요한에 의한 계시록이기 때문에 모든 계시에 대하여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이 작품으로 계시에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았고, 다만 자연적인 이유들과 초자연적인 뜻에 의하여 야기된 빈틈들이 채워졌다고 너희에게 말하겠다.그리고 만일 내가 마치 모자이크들에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돌려주기 위하여 손상되었거나 없어진 모난 유리들을 대체하여 그것들을 보수하는 사람처럼 내 숭고한 사랑의 그림을 복원하여 기쁨을 얻기를 원했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인류가 어둠과 공포의 심연으로 돌진하고 있는 이 세기에 하려고 결정했다면, 너희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느냐?

 

위로부터의 빛들, 목소리들, 초대들에 대하여 너희의 영혼들이 무감각해지고 약해지고, 귀머거리가 된 너희는 혹시 너희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너희는 너희가 가지고 있지만 너희가 더 이상 너희의 구세주를 ‘보기’에 불충분한 빛에 내가 새 빛들을 더해주는 데 대하여 참으로 나를 찬미해야 할 것이다. 길, 진리, 생명을 보고 내 시대의 의인들의 영적인 감정이 너희 안에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그리고 이 지식을 통하여 너희의 구원이 될 사랑 안에서의 너희의 영혼들의 쇄신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덕을 향한 상승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잠들었거나 졸고 있다고 말하겠다. 마치 겨울잠을 자고 있는 나무들처럼 말이다. 하느님인 태양이 너희에게 그 광채를 준다.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주는 태양을 찬미하고, 그것이 너희를 표면부터 너희의 내면 깊은 곳까지 덥힐 수 있도록, 그것이 너희를 일깨우고 너희를 꽃들과 열매들로 덮을 수 있도록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여라.

 

일어나라. 내 선물(My Gift)로 오너라.

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받아먹어라. 받아 마셔라.’

‘만일 네가 하느님의 선물과 ’나에게 물을 달라‘고 말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기만 했다면, 오히려 네가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너에게 살아 있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말한다. 박사들과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왜냐하면 이 양극단의 계급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 양극단 사이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서도 힘을 잃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하느님-사람에 대한, 선생님이고 구세주인 이에 대한 지식의 결핍으로 사람인 하느님이고, 선생이고, 구세주인 하느님을 알지 못하여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양식을 잃지 않기 위하여. 후자는 그들이 샘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멸망할 때 영혼들은 살아 있는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자와 후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 중죄인들은 아니지만 게으름, 미지근함, 성덕에 대한 그릇된 개념으로 인하여 아무런 전진도 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자기들은 지옥의 길을 가고 있지 않고 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피상적인 실천들의 미로 안에 갇혀가고 있는 것을 세심하게 살피면서도 아주 가파른 영웅주의의 길로는 감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살아 있는 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작품으로부터 최초의 자극을 받아 그 부동 상태에서 벗어나 영웅적인 길을 출발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 음식과 이 살아 있는 물의 음료를 준다. 내 말은 생명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나와 함께 생명 안에 있기를 원한다. 나는 영혼의 생명력을 죽이는 사탄의 독기와 균형을 잡아주기 위하여 내 말을 증가시킨다.

나를 물리치지 마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에게 나를 주기를 갈망한다. 내 갈망은 가라앉힐 수 없다. 나는 너희가 천상의 혼인잔치를 위하여 준비되도록 나 자신을 너희에게 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가 쇠약해지지 않기 위하여, 너희가 세상이라는 덫들, 가시덤불들, 뱀들로 가득한 이 사막에서의 고통을 극복한 후에 어린양의 혼인잔치, 하느님의 큰 잔치를 위하여 꾸며진 옷들을 입고, 너희가 너희 안에 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길 속으로 지나가도 해를 입지 않고, 뱀들을 밟고, 독약을 마셔도 죽지 않기 위하여 나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도 말한다. ‘집어라. 제발 이 작품을 집어라. 그리고 ‘그것을 봉인하지 말고’ 읽어라. 그리고 ‘때가 가까웠으니’8) 묵시22,10)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게 해라. 거룩한 사람들은 더 거룩하게 되게 해라.9)묵시22:11)’너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이 책 안에서 나의 다가옴을 보고 ‘주 예수여, 오소서!’ 하고 사랑의 부르짖음으로 자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촉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기를.”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특별히 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이 작품의 도입부에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를 쓰인 대로 다 삽입해라. 요한은 네가 이 책에서 말해진 모든 것들을 쓴 것처럼 그 말들을 하느님의 성령의 구술에 따라 썼다. 주의 기도와 최후의 만찬 후의 내 기도에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것처럼 여기에도 보태지거나 뺄 것이 없다.

이 점들에 대한 모든 단어들은 하느님의 보석이니 만져서는 안 된다. 이 점들에 대하여 할 일은 한 가지뿐이다. 성령께서 그것들의 모든 아름다움과 지혜를 너희에게 밝혀주시기를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네가 내 공생활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면, 너는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28절까지와 루카복음 3장 3절부터 18절까지를 전부 마치 그것들이 한 장인 것처럼 순서대로 써놓아라. 거기에는 과묵하고, 심한 고신극기를 하는 고행자인 선구자의 모든 것이 소개되어 있으며, 더 말할 것이 없다. 그 다음에 너는 내 세례를 삽입하고, 내가 너에게 그때그때 말해준 대로 계속 나아가라.

이제 네 피로는 끝났다. 지금은 사랑과 누려야 할 상급이 남아 있다.

내 영혼아, 그런데 내가 너에게 무엇을 말해야겠느냐? 너는 내 안에서 잃어버린 네 영혼으로 ‘주님,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는 당신의 종인 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나는 질그릇을 깨뜨려 그 정수를 추출하여 그것을 내가 있는 곳으로 가져가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둘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냄새인 너의 향기를 발산하기 위하여 잠시 동안, 약간만 더 여기서 너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나는 내가 요한에게 말했던 대로 너에게 말하겠다. ‘만일 내가 너를 데리러 올 때까지 네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남아 있는 것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내 작은 지칠 줄 모르는 목소리인 너에게 평화. 너에게 평화, 평화와 축복들. 선생님이 너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주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는 복되다.’ 예수, 네 예수가 너에게 말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우니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작은 요한아, 내 평화를 받아라. 내 가슴에 와서 쉬어라.”

 

이 말씀과 함께 작품의 편집에 대한 제안들도 끝났고, 마지막 해석들도 주어졌다.

 

1947. 4. 28. 비아렛지오에서

마리아 발또르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