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들의 가르침 (20) 몬타누스주의 / 하성수 박사
‘생활규범 쇄신’극단적 예언 운동
▲ 몬타누스주의를 매우 적대시한 교황 인노첸시우스 1세
몬타누스주의는 2세기 중엽 몬타누스가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에서 종말에 관한 희망과 임박 기대를 바탕으로 교회의 생활규범을 극단적으로 쇄신하려고 한 예언 운동이다. 이미 2~3세기부터 여러 교회 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받은 이 운동은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몬타누스주의」, 발생지에 따라 「프리기아 사람들의 이단」, 운동의 성격에 따라 「새 예언」으로도 불린다.
이 운동의 창시자 몬타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프리기아의 여신 키빌레 신전의 사제였다. 그는 자신을 주님께서 교회에 보내기로 약속한 진리의 영, 협조자의 도구라고 여기며, 그 당시 교회의 매우 절박한 문제에 대응하려 하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멀리할 것과 종말을 준비할 것을 권고하면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열정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다.
몬타누스파의 특징은 계시이다. 몬타누스와 그와 함께 활동한 여예언자 프리쉴라와 막시밀라는 무아경에 빠져 받은 신탁으로 계시를 선포하였다. 특히 이 세 사람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이 은사는 더 이상 계승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끝난다고 주장하였다. 막시밀라는 『내 뒤에는 더 이상 어떤 예언자도 오지 않을 것이며, 종말의 완성이 올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전파한 내용은 전적으로 종말론적이다.
그들은 예언적 영의 선물을 임박한 종말에 관한 기대로 여기는 사도 2, 17. 20을 바탕으로 임박기대를 화두의 실마리로 삼았다. 몬타누스파는 임박기대가 실현되는 장소를 제한하면서, 묵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과 천년왕국이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마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신자들에게 단식, 독신생활, 성생활의 자제, 생식, 자선, 순교를 권하였다. 더구나 몬타누스파는 스스로 선택된 이들이라는 자의식에 차 중죄를 지은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의 교회가 예언자들과 영의 소유자들에게 나타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열정은 시든 채 세속화되어 가자 이에 맞서 엄격한 극기를 행하였고,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하여 여성의 성직도 허용하였다. 예언자들과 여예언자들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언과 연계되었으며, 예언적 교회가 제도적 교회에 맞섰다.
막시밀라가 197년 사망한 뒤에도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자, 새 예루살렘에 대한 임박기대를 주장한 몬타누스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몬타누스주의는 예언이 중심이 된 프리기아 지방의 종교, 지리적 특성을 넘어 널리 전파되었다.
몬타누스는 조직을 관리하고 구성하는 데 뛰어났기 때문이다. 서방의 일부 공동체는 새 예언이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와 달리 그리스어권 그리스도인은 새 예언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몬타누스주의는 갈라디아, 시리아, 흑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 200년경 프로클루스는 로마에서 몬타누스파를 대변하였으며,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몬타누스 사상에 호의적이었던 듯하다.
교회의 많은 주교들은 몬타누스파의 예언이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감지하였기 때문에 몬타누스파의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주교들은 몬타누스파의 극단적인 순교 열망에 영향받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며,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보다 더 높아지고, 그때 형성되던 신약성서 경전이 몬타누스파 에언자들의 신탁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현실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몬타누스파의 핵심적인 유설을 논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몬타누스파가 주장했던 세상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고, 당시의 뛰어난 저술가들인 밀티아데스, 아폴로니우스가 정통 신앙을 변증함으로써 교회의 정통신앙은 점차 그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더구나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2~3세기경 몬타누스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교회회의를 모집하여 몬타누스파의 여예언자와 추종자들을 단죄하고 공동체에서 쫓아냈다. 마침내 티아테이라를 제외한 프리기아 지방의 중부와 남부 도시들은 정통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 뒤로 이 운동은 급속도로 쇠퇴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몬타누스주의는 프리기아의 일부 지역과 특히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에게서 지속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아프리카 지방의 대표적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임박한 종말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고취시킨 몬타누스주의가 영의 활동을 북돋운다는 사실에 매료된다.
207년부터 그는 새 예언의 가르침을 옹호하면서 모교회를 「타락한 영혼의 교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적대자로 변신하였다(이는 칼 라너 같은 신학자가 여호아의 증인으로 개종하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는 211~217년경에 저술한 마지막 작품들에서 이 운동의 사상과 일치하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과부의 재혼은 간통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성령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박해를 받을 때도 결코 피하지 말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순교할 것을 권하였다. 몬타누스주의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사망한 뒤로는 아프리카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4세기 아프리카 교회의 도나투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4세기 이후의 몬타누스주의에는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 새 예루살렘이 페푸자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몬타누스파는 여러 직급, 곧 주교, 장로, 봉사자 외에 코이노노이와 총대주교로 이루어진 교계제도를 만들었다.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그들의 미사는 활기에 넘쳤으며 종종 열광적으로 거행되었다고 한다. 둘째, 이들은 부활절 축일을 그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정하였는데, 부활축일 산정은 태양력에 바탕을 두었다.
교황 인노첸시우스 1세(401~497년)는 몬타누스주의를 매우 적대시하였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선포한 이단 법령은 서방에서 몬타누스주의가 쇠퇴하는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이로부터 150년 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년)가 이 종파를 추종하지 못하게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몬타누스주의는 동방에서도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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