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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4. “노인의 신앙은 젊은이 위한 삶의 ‘교리서’” 모세의 고별과 유산: 기억과 증거

Skyblue fiat 2022. 9. 5. 11:34

 

노년에 대한 교리 교육 

4. 모세의 고별과 유산: 기억과 증거

 

프란치스코 교황 2022년 3월 23일

“노인의 신앙은 젊은이 위한 삶의 ‘교리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성경이 전하는 늙은 모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모세의 노래”(신명 32장 참조)라 불리는 그의 영적 유언 다음에 이어집니다. “모세의 노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너희는 우리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라. 바위이신 그분의 일은 완전하고 그분의 모든 길은 올바르다. 진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신 하느님 의로우시고 올곧으신 분이시다”(신명 32,3-4). 이는 또한 하느님과 함께 살았던 역사의 기억이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빚어진 하느님 백성의 모험에 대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또한 당신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비통과 실망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신실하심이 백성들의 불충으로 끊임없이 시험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느님 앞에서 백성들은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백성들이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시험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신실하시고 당신 백성들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노래”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온 생의 여정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모세가 이 신앙고백을 할 때,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이자 삶을 떠나는 길목에 서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120세였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신명 34,7)고 전합니다. 이는 보는 역량, 실질적으로 보는 역량이자 상징적으로 보는 역량을 말합니다. 사물을 볼 줄 아는 노인들이 모든 것의 의미를 꿰뚫어 볼 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가진 안목의 생명력은 귀중한 선물입니다. 자신의 오랜 삶과 믿음의 경험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명석함과 함께 말입니다. 모세는 역사를 보고, 역사를 전합니다. 이처럼 나이든 사람들도 역사를 보고, 역사를 전합니다. 

 

노년에 허락된 이러한 명석함은 다음 세대를 위한 귀중한 선물입니다. 온갖 삶의 굴곡을 겪으며 살아낸 믿음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직접 듣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책으로 읽고, 영화로 보고, 인터넷을 뒤져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직접 듣는 것과는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노인에서 젊은이에게 가는 구체적인 전달이야말로 진정한 전승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전달이 몹시 부족합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날의 새로운 문명은 노인들을 버려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직접 전달하는 이야기에는 그 어떤 다른 수단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말투와 의사소통 방식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역사를 명료하고 열정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노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노인들의 이러한 선물을 인식하고 존중할 줄 아나요? 신앙을 전하고 삶의 의미를 전하는 데 있어서 오늘날 이처럼 노인들의 말을 경청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나요?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지난 1914년 피아베 강 전투에 참전하신 저의 할아버지로부터 전쟁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배웠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전쟁에 대한 분노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분이 왜 저에게 전쟁의 고통에 대해 말해주셨을까요? 이러한 것은 책이나 다른 방식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부모에게서 손주들에게 전수되는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노인은 버려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조부모들은 한 민족의 살아 있는 기억입니다. 젊은이와 아이들은 조부모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매우 “정치적으로 올바른” 우리 문화에서, 이 길은 가정, 사회,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방해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역사 교육을 폐지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이들은 역사 교육을 더 이상 현재와 관련 없는 불필요한 정보로 간주하고 현재에 관한 지식에서 자원을 앗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어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신앙을 전하는 데 있어서 종종 “살아 있는 역사”의 열정이 부족함을 봅니다. 신앙을 전하는 것은 “어쩌고저쩌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체험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영원한 사랑, 주어진 말씀에 대한 충실성, 헌신에 대한 인내, 상처 입고 낙담한 얼굴에 대한 연민을 선택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요? 물론, 인생 이야기는 증거로 바뀌어야 하고, 그 증거는 충실해야 합니다. 역사를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맞춰버리는 이데올로기는 분명 충실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을 돋보이게 하려고 역사를 각색하는 선동도 충실과 거리가 멉니다. 모든 과거를 단죄하고 모든 미래를 절망에 빠뜨리는 재판정으로 삼는 것도 충실하지 않습니다. 충실하다는 것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본 사람만이 잘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노인과 조부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그분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복음서 자체가 제자들의 잘못과 오해, 심지어 배신까지 숨기지 않고 예수님의 복된 역사를 솔직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이고, 진실이며,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원로들”이 그 기원부터 다음 세대에게 “손에서 손으로” 물려주는 기억의 선물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미래를 열어가는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의 원로들이 바통을 전달하는 방식, 이러한 방식으로 신앙을 전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제가 수차례에 걸쳐 말했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신앙을 어떻게 전하나요? “아, 여기에 책이 있습니다. 공부하세요.” 아니죠. 신앙은 그렇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친숙한 말(dialetto)로 전해집니다. 말하자면 조부모와 손자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친숙한 언어입니다. 신앙은 항상 친숙한 말로 전해집니다. 수년에 걸쳐 배운 친숙하고 경험적인 언어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가정 내 대화, 신앙의 지혜를 겸비한 조부모와 손주 사이의 대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저는 이상한 변칙성을 생각하곤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입문 교리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아낌없이 활용하고 교리와 신앙의 윤리와 성사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는 교회 공동체의 삶과 신앙의 생생한 역사를 듣고 목격함으로써 발생하는 교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교리 수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실과 글로벌 정보 매체를 통해 교회가 “습득됩니다.” 

 

신앙의 역사 서술은 “모세의 노래”와 같아야 하며,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증거와 같아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축복과 우리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교리 교육의 여정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면 좋을 것입니다. 곧, 노인들의 생생한 체험을 경청하는 습관,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솔직한 고백,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우리의 부족한 신실함에 대한 충실한 증거입니다. 노인은 젊은이에게 자신의 증거의 아름다운 입문을 제안하고 신앙의 역사를 친숙한 말로, 노인의 친숙한 말로 젊은이에게 전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모든 세대를 위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의 이끄심으로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그분의 생명과 사랑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모두 함께 말입니다. 친숙한 언어로 전해진 신앙이라는 이 큰 보화와 함께 가족 모두가 말입니다.

 

 

“노인의 신앙은 젊은이 위한 삶의 ‘교리서’” - 바티칸 뉴스 (vaticannews.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