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
저자: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
제 6 장 증거자들
3.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마르 16, 20)
사도들은 그들이 처음에 머물러 있었던 장소를 바꾸었다. 처음에 그들은 각자의 고향 지역으로 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캐오가 케다르 쪽으로, 타대오가 바르톨로메오의 조국으로, 토마가 사마리아로 그리고 요한은 에페소 쪽으로 갔다. 그 밖의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한 이집트의 국경에 위치한 어떤 곳에도 한 명이 파견되었는데, 그곳은 마카베오 시대에 신앙심이 두터운 피난민들에 의해 건설된 곳이었다. 베드로는 요빠와 리따 사이에 있는 어떤 곳과 사로나 근처의 지역에 나가 있었다. 그는 시카르 출신의 신자인 실바노를 데리고 있었다.
나는 작은 야고보를 포함하여 사도들이 다시 서로 다른 지역으로 파견되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는 사마리아를 거쳐 다시 요빠 부근에 있는 사로나를 향해 갔으며 안드레아는 그와 함께 있었다. 유다인들이 아무것도 이룩할 수 없었던 국경 지역과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도들이 파견되었다.
베드로는 모든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그는 악령을 몰아내었으며 죽은 자를 다시 깨워 놓았다. 나는 베드로 앞에 있던 한 천사가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회개를 해야 하며 베드로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도 이미 베드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아직 개종하지 않고 있었다. 스테파노가 투석으로 처형되기 전에 사도들이 모두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게 될 것이며, 그들이 다시 흩어진 후 베드로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면 고르넬리오의 개심이 있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세번째로 요빠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는 죽은 다비타를 살려 내었고, 보자기에 많은 음식들이 담긴 환영을 보았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왜냐하면 베짜타 교회 공동체를 그들이 여전히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54) 성모 마리아와 다른 모든 여인들 그리고 베로니카도 베다니아에 있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지 약 일년 후에 돌로 쳐죽임을 당하였다. 아름답고 당당한 여인인 베로니카도 라자로와 그의 자매들이 박해를 받을 때 다른 여인들과 함께 혹독한 고통을 당하였다. 그들은 피해 달아났으나 체포되었다. 베로니카는 사람을 굶겨 죽이는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다. 그 감옥은 그녀가 생전에 남 모르게 드나들며 음식을 갖다 주었던 곳이었다. 나는 베로니카의 수건을 보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목에 두르거나 종종 반으로 접어 어깨 위에 걸치고 다니는 수건이었다. 그 수건은 거룩한 여인들에 의해 보관되었다. 마르타와 막달레나가 마르세유로 추방당했을 때는 천주의 모친께서 그 수건을 보관하셨으며, 다시 그것은 사도들에 의해 로마로 옮겨지게 되었다.55)
막달레나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곧바로 세례자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 약간 남쪽에 위치한 광야로 갔다.56) 그 후 그녀는 바위들만 있는 황량한 지역에서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된 채 계속 동굴 속에서 살았다. 이 동굴은 죄 없는 영아들을 살해했던 시기에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과 함께 피신했던 곳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지 삼사 년 후에 사도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들은 초창기부터 교회에 관련된 모든 일들에 대해 규율을 세우고 이끌어 갔다. 그때 라자로와 마르타가 유다인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막달레나도 그녀의 언니인 마르타를 방문하러 가는 도중에 길에서 붙잡혔다. 그때 라자로는 이미 사제가 되어 있었으며 그의 제자인 막시민과 그 외에 기억이 나지 않는 다른 한 사람도 그와 함께 체포되었다. 또한 이전에 막달레나의 시녀였던 마르셀라와 마르타의 시녀57)도 함께 붙잡혔다. 이렇게 해서 모두 일곱 명, 곧 세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여자가 체포되었다. 나는 그들이 유다인들로부터 학대를 받으며 해안에 있는 한 작은 배 위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그 배는 노도 없고 돛도 없었으며 온통 물이 새는 배였다. 그들은 이 작은 배를 더 큰 배에 연결시킨 후 그들을 넓은 바다로 끌고 나가서 풀어 놓아 버렸다. 이 작은 배는 그들이 찬미가를 부르는 동안 프랑스의 어떤 해안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물결이 잔잔하게 밀려와 육지를 적시고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내렸으며 그 작은 배를 다시 밀어냈다. 나는 그들이 어느 큰 도시를 향해 한 시간 이상을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그렇게 빨리 걸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사람들이 언제나 지니고 다녔던 작은 물단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으며, 그것으로 원기를 북돋우고자 하였다. 나는 그들이 큰 도시인 마실리아(Massilia)58)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막달레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어져서 도시에서 꽤 멀리 떨어진 광야로 갔다.그녀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 어려운 어떤 동굴 속에 살면서 깊이 통회하였다. 나는 종종 어떤 사람이 길의 중간에서 만나 막달레나에게 성체를 배령시키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막시민 같았다.
그녀가 사는 동굴은 황량한 산맥 가운데 있었는데, 이 산맥의 봉우리는 멀리서 보면 마치 두 개의 탑이 비스듬히 경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동굴은 자연적으로 자라난 버팀목 기둥에 의해 받쳐져 있었는데, 벽면에는 물건을 놓을 수 있는 구멍들이 자연적으로 파여 있었다.59)
나는 마르타가 죽기 바로 얼마 전에 막달레나가 죽은 것을 보았다. 그녀는 죽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는데, 잎사귀로 만든 옷이 덮여 있었다. 그녀는 수도자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머리카락을 머리 주위로 둘러싸면서 단지 한 부분만을 아래로 늘어뜨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으며 양팔을 모은 손에는 나무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마르지 않았고 오히려 강인해지고 풍만하였으며, 날씨 탓으로 약간 그으른 피부로 다부지게 다져져 있었다. 나는 두 은자가 큰 덮개가 끈으로 부착된 두 개의 장대를 갖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시신을 깨끗이 감싼 후 성 마르타가 있는 수도원을 향해 그것을 운반했는데, 그곳은 동굴로부터 꽤 먼거리에 있었다.
그 동굴 곁에는 막시민에 의해 교회가 지어졌으며, 막달레나의 시신은 그 동굴 안에 보존되었다. 그 시신은 턱뼈가 없었고 머리 한쪽 부분에 아직 살점이 약간 있었으며, 그 밖에 팔과 머리카락 그리고 흙이 담긴 그릇도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마르타는 마르셀라와 다른 시녀와 함께 더 멀리 동쪽에 위치한 황량한 바위 지역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곳에는 다른 여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바위 동굴 곁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것은 점점 번창해져서 나중에는 수도원이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근처에 아크방이라고 불리는 도시가 있었다.60)
나는 마르타가 자주 그 지역의 넓은 평야나 강어귀에서 많은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그녀를 따르는 여인들과 함께 돌로 놓은 단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돌을 계단 모양으로 쌓았는데, 그 안쪽은 둥근 지붕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 계단 위쪽에 그들이 설 수 있는 넓은 돌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 일을 매우 열성적으로 했고, 배치를 정성껏 잘했기 때문에 벽돌장이보다도 더 잘해 내었다. 그들 동료들 중의 한 사람은 팔레스티나 출신의 사제로서 그들을 방문하여 성체를 배령하게 했는데, 내 생각에 그는 젊은 막시민으로 여겨진다.61) 마르타는 실천과 가르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육 년째 되던 해의 초에 유다인들은 라자로와 그의 자매들을 바다에 내던져 버렸으며, 그 일이 있은 뒤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에페소로 모시고 갔다.62)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삼 년간은 시온에서 사셨고 뒤이어 삼 년간은 베다니아에서 사셨으며 그 후 아홉 해 동안은 에페소에서 사셨다. 에페소 지역의 부근에는 성모 마리아와 친근하게 지내는 여인들이 이미 정착해 있었는데, 성모께서는 바로 그 지역에서 사셨다. 마리아께서 거주하시는 지역은 예루살렘 방향에서 올 경우 에페소의 왼쪽에 있는 산까지 약 세 시간 반이 걸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 산은 에페소 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산의 남동쪽에서부터 접근해 올 경우 에페소는 확연하게 이 산과 빗대어 있는 듯이 보였으나 다시 계속 가게 되면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에페소로부터 남쪽으로 무성한 잡목들이 우거진 거칠고 좁은 산길이 나 있었다. 그 산의 높은 지역을 향해서 평지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걸어서 대략 반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그곳은 구릉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그들의 거주지가 시작되었다.63) 요한은 성모 마리아께서 거처하실 집을 미리 건축해 놓은 후에 그분을 이곳으로 모시고 왔는데, 이 지역에는 이미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의 가족들과 거룩한 여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주어진 자연 환경들을 그대로 곧 동굴과 공터들을 그들의 은신처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거주지는 고독했으며, 대부분 십오 분 정도의 거리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성모께서 사시는 작은 집은 숲 근처에 있는 매끄럽고, 피라미드 모양의 나무들 사이에 있었다. 그곳은 매우 조용하고 한적하였다. 다른 가족들의 거주지도 모두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분산되어 있었다. 성모께서는 이곳에서 시중을 들어드리는 나이 어린 사람과 시녀와 함께 사셨으며,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식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은 아주 깊고 고요한 평화 속에서 살았다.
그 집 뒤에는 산 위쪽으로 향한 길이 나 있었는데, 성모께서는 그곳에 일종의 십자가의 길을 만드셨다. 성모께서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이래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이제까지, 주님께 대한 애련의 눈물 속에서 주님의 수난의 길을 오고 가시는 일을 중단하신 적이 없으셨다. 성모께서는 예수께서 고통받으시던 모든 장소들을 발걸음으로 측정하시고 그 위치에서 주님의 수난을 끊임없이 묵상하셨는데, 그분은 주님께 대한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드러내지 않고서는 살아가실 수가 없었다.
나는 성모께서 이 지방에 도착하시자마자 곧 집 뒤편의 산 위쪽에 길에 마련하신 수난처의 길을 매일같이 걸으시며 묵상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길은 숲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성모께서는 그 숲속의 한 구릉을 갈바리아 언덕으로 표시해 놓으셨으며, 다른 구릉에 있는 작은 동굴에는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표시해 놓으셨다. 그분은 십자가의 길에 고난의 장소들을 열두 곳(處)으로 정해 놓으신 후 깊은 묵상 속에서 시녀와 함께 그 길을 걸으셨다. 모든 수난의 장소들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그 장소가 의미하는 고난의 신비를 마음에 새롭게 되새겼으며 애련(哀憐)의 눈물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찬미하였다. 그리고 나서 성모께서는 그 장소를 더욱 잘 정돈하셨다. 나는 성모께서 수난처로 표시된 돌 위에 석필로써 그 장소의 의미와 주님께서 걸으신 걸음의 숫자와 같은 것들을 기록하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성모께서는 주님께서 묻히신 무덤으로 표시해 놓은 그 거룩한 동굴 무덤을 깨끗이 치우시어 편안히 기도할 수 있게 정돈하셨다. 나는 성모 마리아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길을 걸으며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 지내신 지 삼년이 되었을 때 성모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애타는 향수를 느끼셨다. 그래서 요한과 베드로는 그분을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갔다. 그곳에는 많은 사도들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집회 장소로 기억되는 곳에서 토마를 보았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사도들에게 조언을 해주시며 그들을 도우셨다. 나는 그들이 어둠이 깔리고 있는 저녁 무렵에 그곳에 도착하여, 도시로 들어가기 전에 올리브 산과 갈바리아 언덕과 주님께서 묻히셨던 거룩한 무덤과 예루살렘 주위의 모든 성지들을 방문하는 것을 보았다. 천주의 모친께서는 주님의 수난을 애련히 여기시는 마음의 고통과 슬픔이 너무나 크셨기 때문에 거의 똑바로 일어서실 수가 없으셨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그분의 팔을 부축해 드려서 모시고 다녔다.
예루살렘에서 집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성모 마리아께서는 조언을 통해 사도들을 도우셨다. 그들은 사도 신경을 고백했으며 모든 일에서 질서를 세웠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내어 놓고 나누어 썼으며 교회 공동체를 주교 관구로 분할하였다. 그리고 나면 이제 그들은 헤어져서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이교도 지역을 향해 떠나게 된다.
나는 열두 명의 사도가 그들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사람들은 여행할 차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서로 포옹했으며 각자 다른 이에게 손을 얹어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축북의 기도를 드릴 때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서로 헤어졌다.
나는 그때 그들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께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함께 모였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뉘어서 더욱 먼 지역으로 끝닿을 때까지 나아갔다.
주님께서 그들을 에페소로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안티오키아 지역에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마태오도 그곳에 있었다. 베드로는 XLIV년 겨울, 1월 18일에 제자인 마르티알리스와 아폴리나리스 그리고 하인 마르시온과 함께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먼저 박해가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그곳으로부터 나폴리와 여러 다른 지역을 거쳐 로마로 왔다. 렌투루스64)는 베드로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해 받고 그를 마중 나왔다. 나는 그가 베드로와 그의 동행인들을 자기 집으로 안내한 후, 그들의 발을 씻기고 깨끗한 옷을 건네 주며 그들을 공손하게 접대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다른 집으로 가서 거주하다가 나중에는 푸뎅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 집은 그곳에서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렌투루스는 교회를 위해 많은 것들을 헌납하였다.
베드로는 아흔아홉 살이 되었다. 그는 서기 69년에 순교했는데, 안티오키아에서 일곱 해를 그리고 로마에서 이십오 년을 지냈다. 서기 43년에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로마로 와서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성모 마리아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로마에서 에페소로 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나는 안드레아의 생활 장소가 기적들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자주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 그리스와 아시아에 머물렀다. 그는 베드로보다 나이가 더 들었고, 더 작았으며, 땅딸막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정직하고 단순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유달리 신실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첫번째로 모든 재산을 버린 사도였다. 예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간이 도래하기 전에 잠시 사도들을 떠나시어 아라비아와 이집트에 계셨을 때, 어느 누구도 안드레아만큼 교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사려 깊게 자기 소유물들을 나누고 재산을 헌납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안드레아가 아카이아에서 체포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마태오가 제자들과 다른 육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멀리 떨어진 어떤 도시에서 붙잡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마태오의 눈에 독약을 넣어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다. 그의 두 눈은 온통 붉게 충혈된 채 부어올라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의 두 눈을 도려 내지는 않았다. 그가 체포된 도시는 홍해 건너펀 이디오피아에 소재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 도시는 산악 지대와 인접하고 있는 큰 하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주민들은 모두 흑인들이었으나 다른 지역에는 백인들도 살고 있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사는 외곽 지역으로부터 내륙 쪽으로 이동해 왔다. 안드레아는 마태오에게 가라는 주님의 계시를 영적으로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여행자들 틈에 끼어 승선하었다. 그 배는 신속하게 그를 그 도시로 운반해 주었으며 그는 육지를 향해 갔다. 나는 그 도시가 위치한 하구의 한쪽에서 그를 보았는데, 곧바로 다시 그가 다른 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마태오와 다른 사람들을 묶어 놓은 밧줄을 풀어 주고 마태오를 치료한 다음, 그 도시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안드레아는 니케아에도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개처럼 짖는 악령 일곱을 그 도시의 무덤들에서 추방시켰다. 나는 또한 그가 짐승들 앞에 내던져지는 것과 다시 풀려 나오는 것을 보았다.
큰 야고보는 몸집이 크고 어깨가 넓었으나 둔하지 않았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과 약간 갈색의 수염을 지니고 있었는데 얼굴빛은 희었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쾌활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큰 야고보는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각기 다른 나라들로 흩어졌을 때 스페인에 처음으로 간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 년이 조금 넘는 기간을 스페인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전교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성모 마리아께서 지시하신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스페인을 떠났다. 그는 이 여행 중에 에페소에 계신 성모 마리아를 방문하였다. 성모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있게 될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셨으며, 그가 강건해지도록 위로를 주셨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여러 차례 구속되었으며, 회당 앞에 세워졌다. 나는 그가 부활절을 얼마 앞두고, 예루살렘의 언덕 위에서 가르치는 도중에, 체포당하는 것을 보았다. 과월절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도시 주위에는 숙박 시설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야고보를 감옥에 오래 놓아 두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시던 그 법정에서 그도 유죄 선고를 받았다.
나는 그가 갈바리아 언덕 쪽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강론을 베풀었으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였다. 그의 두 손이 묶일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의 두 손을 묶을 수는 있으나 주님의 은총과 생명의 호흡은 묶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높은 곳에 내세워졌으며, 그의 죄목과 판결의 내용이 큰소리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바위 위에 앉혀졌으며, 두 손이 바위의 양쪽으로 묶인 후 두 눈이 가리워진 채 목이 잘렸다. 큰 야고보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약 팔 년이 지났을 때 이렇게 순교하였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그 보다 훨씬 뒤에 돌아가셨다. 그동안 사람들은 작은 야고보를 그의 집에 감금시켜 놓았다. 예루살렘에는 그 밖에 마태오와 하제드와 그녀의 신랑인 나타나엘이 머물고 있었다.
야고보가 처형당할 때에 큰 소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 야고보의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많은 돌발적인 우여 곡절 끝에 그들은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 부근에 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박해 때문에 그들은 그 거룩한 시신을 남 모르게 배로 옮긴 후 스페인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보존시켰다.65)
나는 요한이 활동하는 모습들도 많이 보았는데, 그 가운데 많은 부분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질서 있게 정리할 수가 없다. 나는 그가 로마에서 끓는 기름 속에 놓여지는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나는 요한이 언제나 성모 마리아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이 살아계시는 동안 그분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나는 또한 그가 성모께 거룩한 성체를 건네 드리는 것과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요한은 성모를 축복해 드렸으며, 다시 성모께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요한은 아들과 똑같이 성모를 섬겼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친밀하게 그분을 모셨다. 나는 요한이 에페소의 어떤 장소에서 체포되어 죄수처럼 두 명의 경비병에 의해 감시를 받으며 어떤 건물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이탈리아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체포되어 기름 속에 내던져졌다. 그는 파트모스 지방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그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개심하였다. 그는 그 지역으로부터 그의 감시자들과 함께 종종 다른 지역으로도 전교 여행을 했으며, 이따금 에페소 지방에도 들렀다. 나는 그가 로마에서 순교 상황에 처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나는 그가 허름한 담벽으로 둘러싸인 어느 둥근 마당에서 옷이 벗겨진 채 채찍질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도, 온화하고 다감한 청년처럼 보였다. 그는 성문 밖의 원형으로 된 넓은 장소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아래쪽에 공기통이 부착되어 있는 돌로 된 둥근 화덕 위에 폭이 좁고 높은 솥이 놓여져 있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조롱받으셨을 때 입으셨던 옷과 비슷하게 생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겉옷은 가슴 위쪽 부분이 기워진 넓고 밋밋하게 생긴 옷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싼 채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겉옷을 벗겼다. 채찍질로 인해 붉게 멍든 그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요한을 그 솥 위로 들어 올리려고 하자, 요한은 스스로 그 위로 올라갔다. 솥에는 기름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들은 거무튀튀한 나무 토막들을 다발채 가지고 와서 그것을 화덕 속에 넣어 솥을 더욱 가열시켰다. 요한은 그 속에 던져졌으나, 고통스럽거나 상처를 입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요한을 끄집어 냈는데, 그의 몸에는 화상을 입은 곳이 한군데도 없었으며, 오히려 채찍질로 받은 모든 상처들이 치유되어 생기가 돌고 있었다. 요한은 다시 어디론가 끌려갔다.
에세네파 사람인 바르톨로메오는 모습이 준수하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넓은 이마와 하얀 피부 그리고 큰 눈과 물결치는 듯한 검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고, 보기 좋게 배치된 짧고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체격이 건장했으며, 모든 사도들 가운데서 외모상으로 가장 준수하였다. 그는 아주 공손했으며, 그의 행실에는 매우 고상한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는 매우 민첩했고, 아주 곧은 자세로 걸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 중에서 교육을 아주 잘 받은 귀족 청년처럼 보였다. 다른 사도들, 특히 그중에서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처음 그들의 외모를 대할 때 무엇인가 수줍음과 투박함 같은 것이 있었다. 사도들이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파견될 때, 나는 바르톨로메오가 우선 동쪽 방향에서 가장 외곽 지대에 위치한 인도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지역 사람들은 부모를 매우 공경했는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게 그를 대해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켰으며, 제자들도 남겼다. 그다음에 그는 토마가 어물렀던 일본으로 거쳐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 후 그는 인도에서 북쪽 지방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르침을 베풀며 머물렀다. 그곳으로부터 그는 아랍을 경유하여 홍해를 건너서 아베시니아로 갔다. 그곳에는 그가 개종시킨 왕이 있었다. 그 왕의 이름은 폴리미우스라고 불리었는데, 그는 궁성과 많은 백인들을 거느렸다. 그러나 그의 국민은 무어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바르톨로메오가 어떤 도시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은 아베시니아로 기억된다.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은 도시 밖으로 호송되었다.
토마는 작은 체구에 적갈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거룩한 삼왕을 찾는 삼년의 여행 이후, 사도 타대오, 제자인 카이사르, 실바노, 백인대장인 기스칼라 출신 아키아스의 아들 그리고 다른 두 명과 함께 삼왕의 나라에 오는 것을 보았다. 토마는 그가 방문하는 모든 곳에서, 심지어는 이교도들의 도시인 케다르에서도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동산으로 둘러싸인 갈대아에서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 뒤 성모 마리아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타대오가 페르시아로 가는 길에 그곳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토마는 가는 곳곳 어디에서나 위대한 기적을 일으켰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어 갈 교사를 지명해 주었으며, 제자도 한 사람 남겨 놓아 그들을 돕게 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국경 부근인 중국 상부 북쪽 지역에 사는 매우 거친 사람들과도 함께 지냈다. 박트리아 지방과 조로아스터교(Zoroaster는 기원전 900년경에 고대 페르시아에서 종교를 창설하였음 – 역자 주)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특히 모든 일들이 잘 되었다. 그는 티베트 지방에도 갔다.
나는 타대오와 실라가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예수께서 방문하셨던 모든 길들을 찾아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또한 타대오가 무어 사람들과도 함께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내 생각에 그 지역은 아프리카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는 그때 유딧이 살았던 지방에 있는 달산맥(Mondgebirge)을 그곳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정부 당국에 의해 지하 감옥에 처넣어진 그를 강제로 풀어 내주기도 하였다. 나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그 감옥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사도들이 각기 여러 지역으로 파견된 후 시몬과 타대오 두 형제가 동행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마지막 전도 여행을 하실 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던 곳에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 그들은 헤어져서 시몬은 흑해와 시티아 쪽으로 갔고, 타대오는 동쪽 지역으로 갔다.
54)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집의 부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성 야고보는 관례적으로 강론을 했다고 전해진다(편집자 주).
55) 다른 곳에서의 그 수건에 대한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의 언명. “베로니카의 수건은 에데사에 있는 타대오에게로 전해졌으며, 일상적으로 그 수건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를 감쌌던 수의들을 보존한 곳으로 옮겨졌는데, 내 생각에 그곳은 토리노였다”(<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제3권, 548면). 세번째로 그녀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대체로 베로니카의 수건이 그녀가 죽은 후 거룩한 여인들에 의해 보존되었던 것과 제자인 타대오가 그것을 가지고 에데사로 가서 그곳과 다른 곳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사실 그리고 그것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다가 그뒤에 사도들에 의해 교회에 오게 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수건이 그리스도를 감쌌던 모든 천들이 있는 토리노에 있었던 것이 생각나며, 그때 그리스도의 수의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그 사실들이 혼돈된 상태로 기억되고 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 245면). “그 수건에 새겨져 있는 예수의 얼글은 맑은 유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 피로써 압착되어 있었다. 예수의 얼굴을 감쌌던 그 수건의 크기는 유화지의 크기보다 넓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 244면).
56) 나는 그때 주님께서 실의에 찬 막달레나에게 광야로 피신하라고 일러주시는 것과 마르타와 거룩한 여인들이 어떻게 단체를 육성해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다. (<동정 성모 마리아의 생애>, 382면).
57) 프로방스 지방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부르는 이름은 사라(편집자 주).
58) 이 이름은 마르세유의 라틴어 이름이다. 이 설명은 프로방스(Provence) 성지의 역사와 전설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 전설은 자난 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성(聖) 술피스회의 회원인 파일론(M. Faillon)의 작업들을 다시 소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은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1824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편집자 주).
59) 이 묘사는 “성목(聖木, Sainte Baume)”의 바위들(거룩한 동굴을 의미하는, 프로방스의 명칭)에 해당된다. 이 산맥은 마르세유에서 최단거리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현재에도 사람들은 성 마리아 막달레나가 30년간 살았던 이 동굴을 찾아가 경모(敬慕)를 표시하고 있다(편집자 주).
60) 그곳은 Aqae Sextiae(Aixen Provence, 엑상 프로방스 – 역자 주)로서 현재의 엑스(Aix)이며 온천들이 있는 오래 된 도시이다.
61) 순교자들과 성인들과 그들의 축일 명부가 있는 로마 전례서는 초대 교회 시대에 라자로와 막달레나와 마르셀라와 함께 프로방스로 온 그를 엑스(Aix)의 주교로서 인증(認證)하고 있다.
62) 그 외의 사항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제3권, 554면 참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다섯 해가 지나서 교회 공동체에 새로운 폭동이 들이닥쳤다. 요한은 성모를 모시고 에페소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겼는데, 그 지역에는 이미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정주하고 있었다.”
63) 1890년 11월에 스미르나의 수도에 있는 라자로 수도회 사제들은 에페소의 부근에서 조사 연구를 계속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이 제시한 지형 정보들을 이용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성모 마리아께서 거주하시던 집을 발견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 집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들은 에메릭의 진술과 일치하였다. 스미르나 대교구의 티모니 대주교의 보고서와 로마의 프랑스 신학원 총장 에쉬바흐(Eschbach) 신부와 같은 이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보고서들은 에메릭이 언급한 장소들과 파괴된 건물들이 사실과 확연하게 일치함을 증명하였다. 이 지역에 전래되고 있는 관습들이 또한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다. 곧 옛적부터 이 집들은 파나기아 카폴리(Panaghia Capouli : 동방교회에서 사용되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에 대한 존칭 – 역자 주)의 집 또는 성모 마리아의 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편집자 주).
64) 제2장 ‘이스라엘에 나타나신 예수’ 17) 해설 참조
65)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발 아래서 회개했던 백인대장 아베나다르는 큰 야고보의 제자였다.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은 그에 관해 이렇게 언명하였다. “나중에 체시폰으로 불리게 된 아베나다르는 바빌론과 이집트의 중간에 위치한 복된 나라, 아라비아로부터 와서 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성신 강림절 이후 그는 베짜타 못에서 처음으로 영세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체시폰은 큰 야고보의 다른 많은 제자들과 함께 스페인까지 동행한 후 다시 돌아왔다. 나중에 그는 사도들에 의해 다시 스페인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큰 야고보의 시신을 운반하여 예루살렘의 순교자 묘지에 안치시켰다. 그는 그곳의 주교였다.” 그라나다(Granada)에 의해 쓰여진 오래된 초고(草稿) 기록들과 그의 성유물들의 자료에 따른면 체시폰 자신도 야고보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스페인에서 죽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 396-40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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