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뜻의 오늘

2016년 10월 20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 안의 모순과 싸워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Skyblue fiat 2016. 10. 20. 23:17

 

2016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20 목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① 에페 3,14-21 ㉥ 루카 12,49-53.
윤공희 대주교 주교 수품일

 

 

 

입당송 시편 84(83),10-11 참조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며 한 집안 식구끼리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3,14-21


형제 여러분, 14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2.4-5.11-12.18-19(◎ 5ㄴ 참조)
◎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

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복음 환호송 필리 3,8-9 참조
◎ 알렐루야.
○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 알렐루야.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 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30(129),7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영성체 후 묵상 <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믿음은 도전입니다. 이제까지 확신하고 살아온 세속적 가치들에 맞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에 대한 선택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겸허함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식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의 양보다 내가 모르고 살아온 하느님의 지혜의 엄청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는 회심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아집과 편견에 대한 도전이고, 동시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위험한 기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복음서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른다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말씀으로 ‘기억’해 내는 것이고, 이는 타성에 물든 내 옛 삶을 변화시키는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 개인의 회심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가 복음적이지 못한 가치들로 물들어 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동의 기억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한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함께 공감하는 동시에, 서로 힘을 합쳐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위험한 기억’을 해 낼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 세상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위험에 빠뜨리시고,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안의 모순과 싸워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대조된 사회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진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140. 인색과 어리석은 부자  ***|그리스도의 시 둘째 해   3

 

 

너는 어떤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례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은

내가 얼마나 애가 탈지 모른다! 왜 그런가 하고 생각들 하지 않느냐?

그것은 이 세례로 너희를 불 운반인과 선동자를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데,

너희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 대항해서 모든 계층 안에서 활동하여

그 사회를 오직 하나의 물건, 즉 그리스도의 양떼를 만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갖다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느냐?

세상 사람들이 보는 방식에 따른 평화를 말이다.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불화와 분열을 갖다 주러 왔다.

이제부터는 그리고 온 땅이 오직 한 양떼가 되기까지는

한 집에 있는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세 사람과 대립할 것이고,

아버지가 아들과 대립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대립하며,

어머니가 딸들과 딸들이 어머니와 대립할 것이며,

 며느리들과 시어머니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 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입술에는 새로운 말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심각한 반란으로 인간적 애정과 초인간적 애정의 왕국이

흔들림으로 인해 일종의 바벨탑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나자렛 사람이 구원한 모든 사람이 말하는 어떤 새로운

말속에 모든 것이 일치하고, 감정의 물이 정화되어 찌꺼기는 밑으로 가라앉고

위에는 하늘나라 호수의 맑은 물이 빛날 때가 올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할 일은 사람들이 휴식이란 말에 붙여 주는 뜻으로의 휴식이 아니다.

지칠 줄 모르는 용맹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 분명히 말하지만,

끝에 가서는 너희 시중을 들기 위해서 옷을 띠로 졸라매고,

그런 다음 너희와 함께 영원한 잔칫상에 앉을 예수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또 언제나 예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피로와 고통을 다 잊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호수 쪽으로 가자. 막달라에 가서 쉬자.

라자로의 마리아의 집 정원에는 모두가 들어갈 만한 자리가 있는데,

마리아는 그의 집을 나그네와 그의 친구들에게 마음대로 쓰게 맡기었다.

막달라의 마리아는 그의 죄와 더불어 죽었고, 그의 뉘우침에서 나자렛의 예수의 제자,

라자로의 마리아가 태어났다는 것을 너희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다.

이 소식이 마치 수풀 속을 지나가는 바람의 살랑거림과 같이 달려갔기 때문에

너희도 이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 주겠다.

그것은 라자로의 마리아의 개인 재산은 모두가

하느님의 종들과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