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성모님을 통해서 성령님을 받아들일 때 올바른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 대축일 (2015-05-24)

Skyblue fiat 2015. 8. 8. 02:51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계획하셨던 아주 큰 사건이 완료되는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우리는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한계에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의 성전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이 너무나 크신 분이고 우리 인간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단계적으로 조금씩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죠.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당신을 가르쳐주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 하느님께서 계시는 집을 예루살렘에 만들게 되죠.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당신을 모시는 집이 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 각자가 하느님을 모시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우신 예식이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에서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는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를 하느님께서 만들어가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는 성령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늘 오신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떠나는 게 더 낫다고 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실제로 세상에 계시면 인간이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사람안에 내재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영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안에 계실 수 있는 거죠.

 

구약의 백성들과 신약의 백성들의 차이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으로서의 모습, 이게 신약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분이 성모님이시죠. 성모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하느님의 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느님의 아들 딸이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태중에 잉태하시고, 우리를 위해 낳아주셨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의 몸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 되는것인가 하면 성모님으로부터 받은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게 아닙니다. 물론 인간이 아이의 몸을 자기의 능력으로 만드는게 아니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만들지만, 성모님 안에서 예수님의 몸이 성장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모님 안에서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진거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안에 당신께서 계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나는 인간안에 함께 있을 수 있다. 내 아들 예수를 봐라. 내가 그 안에 함께 있었다. 그것처럼 내가 너희들안에도 함께 있을 수 있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모님께서 성령의 배필로서 성모님께서 성령과 하나되심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통해서 성령님을 받아들일 때 올바른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모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령을 우리가 받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었고 내안에 예수님께서 계셨고, 성령께서 나와 일치되었듯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특별한 은총를 받게 된 것는 무엇때문인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인가?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든 이유는 내가 사랑을 줄 수 있을만한 존재를 만들고 싶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실 수 있을만한 존재는 바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하면 완전한 자유죠. 어느 정도로 완전한 자유인가하면 신을 죽일 수 있는 자유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자유는 신을 죽일 수 있는 자유입니다. 실제로 신을 죽이려고 많은 노력을 했죠. 하느님께서 인간이 하느님을 죽이려한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죽이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끊임없이 악용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이용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었죠. 그것때문에 하느님께서 마음이 아프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준 자유는 나를 죽이라고 준 자유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라고 준 자유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인가, 하느님을 죽일것인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기쁨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사람이 참으로 기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12사도를 생각해 보시면 분명히 그들은 모험을 했습니다. 이 분을 따른다면 분명히 내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거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다시피  "너희들도 나를 떠나겠느냐" 예수님께서물으셨을때 "주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데 저희가 어디를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즉 모험을 한거죠. 예수님한테 자신들의 많은 것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죠. 그래서 모든 걸 잃었다고 좌절했었는데 그 절망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부활을 보여주신 거죠. 12사도들은 (물론, 유다가 빠지고 마티아가 들어옵니다.) 전세계로 나가서 자신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던 모든 것을 생명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명하게 되는 거죠. 더이상 죽음이 자신들에게 한계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도 각자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앞에 장애물이 있죠. 지금도 각자 한계와 장애물과 시련과 고통과 어려움을 지고 함께 살아갑니다. 이 자리에도 그것을 각자 하나씩 열개씩 어떤 분은 여러개씩 수없이 가지시고 이 자리에 계신 거죠. 여러분은 모험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시련과 어려움과 이 장애물과 한계를 통해서 이것을 극복하고 넘어서서 참된 기쁨과 영원한 행복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우리한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너희가 이 길을 나와 함께 가겠느냐"는 거죠. 이게 모험입니다. 왜냐, 이것은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는 것이거든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실때 자신의 목숨을 거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줬을때 그 자유는 당신이 죽을 수도 있는 자유입니다.

 

하느님도 모험을 하고 계시죠. "과연 이런 자유를 준 인간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건가!" 하느님께서는 모험을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모험을 하고 계신다면 우리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고 계신다면 그런 하느님께 갈려고 하는 나는 목숨안걸고 모험 안하고 가능하겠는가. 그게. 나는 안전한 장소에서 내 모든 것을 보존하려고 다 챙겨놓고 '아, 여유가 쪼끔 있을때 조금 해볼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전부를 걸고 계시는데 나는 일부만 걸겠다고요? 나도 전부를 걸지 않으면 내기가 안되는 겁니다. 모험이 안되는 거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정말 하느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내주시는 겁니다. 말그대로 올인하셨죠. 그럼 우리도 하느님께 올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셔서 당신 성령,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을 받죠. 주님께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 저한테 성령을 주십시오." 그런데 어떤 부분이 내가 좀더 청해야 하는 부분인가, 왜냐하면 전부 다 달라고 하면  이것을 다 받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죠. 다 주십니다. 다 청하시는 분한테는~. 다 청하시는 분들은 다 받지만 문제는 이걸 전부를 다 청해놓으면 그걸받는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나한테 필요한 구체적인 것이 어떤 것인가. 이걸 우리가 어떻게 알지? 그래서 주님께 그것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거죠. 그래서 교회가 늘 해오던 방식, 뽑기를 합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유다 죽고나서 사도마티아를 뽑을 때에도 뽑기를 했죠. 그리고 구약의 우딤 둠빔 정확하게 잘 모르지만, 그것도 뽑기였지 않겠는가 주사위 굴리는 것. 하느님께 맡기는 거죠.

 

봉헌을 하고 나서 한장씩 뽑으시면 그게 내가 오늘 주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일 수도 있고, 또는 지금 내 한계와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은총이 필요하니 청해라' 하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아서 읽어보시고 이것을 '내가 청해야 하는 거구다, 아님 오늘 주셨구나' 하고 감사드리고 가시면 됩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여러분께서 오늘 성령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눈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냥 받았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실제로 오늘 이 은총을 받았습니다'하기 위해서 뽑기를 하는 것이죠.

 

오늘 이 뽑기처럼 성령께서 내 한계를 극복하고 내 모든 것을 올인하고 모험을 감행하는 은총을 내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