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작품 안에서 드러난 십자가 신비에 대한 고찰

Skyblue fiat 2015. 5. 11. 18:15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작품 안에서 드러난 십자가 신비에 대한 고찰

 (A)study on the mystery of the cross revealed in the life and works of Edith Stein

 

최호정 학위논문(석사)

광주가톨릭대학교 |2013년 |실천신학전공 |한국 |한국어

 
 
초록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는 종교의 세속화를 통하여 초월적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구원 및 그리스도교 신앙 생활에 대한 가치를 하락시켜 버렸다. 그리고 기복 신앙에 빠져 개인의 안락과 육체적 구원만을 신앙 척도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옛날처럼 걸림돌이나 어리석음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교 부활의 관점에서 볼 때에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승리의 사건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건이다. 십자가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기 이전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인간과 서로 나눈 사랑과 일치의 행위이다. 십자가 사건 안에서 그 사랑이 구현되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계시되고 또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현 상황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며 동시에 인간의 무력함과 비천함을 보여주는 십자가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1999년 10월에 십자가 신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한 에디트 슈타인을 성인품에 올렸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디트 슈타인은 그리스도와 복된 십자가가 이 지상에서 모든 것이라는 것을 믿었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그녀의 삶에 유일한 중심이었기 때문에 영혼의 깊은 굴욕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녀의 전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복음적 초대에 완전하게 참여하는 것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자신의 삶의 십자가들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과 영성을 통해서 살펴본 ‘십자가 신비’는 단순한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 전 존재를 포기하는 고통을 말하며, 골고타의 완전한 영적인 메마름이고 영혼의 ‘어둔 밤’이었다. 따라서 에디트 슈타인은 십자가의 신비의 심오함을 단지 지성적으로만 끌어안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적인 고통에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에디트 슈타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십자가 사건들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속죄적인 행위로써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에디트 슈타인이 삶을 통해서 보여준 것과 같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힘과 진리를 발견하고, 구원의 상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십자가의 삶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에디트 슈타인은 관상적 고요함에서 십자가 신비의 심오함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녀가 체험한 십자가의 삶은 하느님에 대한 앎을 깊어지게 하였으며, 온 마음과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녀의 특별한 부르심은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껴안고 그분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확실한 모델이다.

 

논문보기(국회전자도서관) http://dlps.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DMT1201337093&sysid=nhn

 

 

성녀 에디트 슈타인 Stein, Edith, St (1891 ~ 1942)

성녀 에디트 슈타인,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다(1891~1942). 가르멜회 수녀 Teresa Benedicta a Cruce. Breslau(폴란드의 Wroclaw)의 유다 가정 출신, 독일 GöttingenFreiburg에서 E. Husserl에게 사사, 현상론학파(Phenomenological School)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아주 어려서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유다교를 버렸고, 1922년 가톨릭으로 전환 개종했다. 이때부터 현상론을 토미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1934년 Köln에서 가르멜 수녀회의 수도복을 입었고 1938년 네덜란드로 이동되었으나, 나치 점령하에서 체포되어 폴란드로 이송되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녀가 발표한 철학 논문 “심리학과 정신과학의 철학적 기초에의 기여, 학술지 Jahrbuch für Philosophie und phänomenologische Forsuchung, v, 1922, pp. 1~283)과 “Eine untersuchung über den Staat”(국가에 대한 연구, ibid., vii, 1925, pp. 1~123)이다. 이 밖에도 많은 글을 썼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발표되지 못했다.


1962년 그녀의 시성() 절차가 공식으로 시작되었고, 198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했으며, 1998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성했다. 교황은 동시에 Fides et Ratio(믿음과 이성)라는 회칙을 발표해 성녀의 책을 읽도록 권장했다. 그리고 성녀를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치릴로메토디오, 시에나의 가타리나, 스웨덴의 비르지타)으로 발표했다. 이와 같은 영광은 20세기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백민관 신부 엮음/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유대인을 위한 속죄제물

                                                                                                      ※ <  >표 안의 글은 에디트 슈타인이 직접 쓴 것.

독일에서의 유대인 박해.

 

 

<나는 우리 구세주께 말씀드렸다. 이제 유대인들에게 놓여지고 있는 운명은 당신의 십자가임을 알고 있노라고. 유대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이해하는 몇몇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자진해서 이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르멜로 가는 길, 에디트 슈타인

 

독일 전역에 걸친 나치의 유대인 배척운동은 그녀로 하여금 1932년 2월부터 뮌스터의 독일 교육 연구소에서 철학적 교육학과 인간학 강사로 근무하였던 직장을 그만두게 하였다. 슈타인은 뮌스터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무겁게 누르기 시작하셨으며, 이 민족의 운명이 나 자신의 운명임이 명백해졌다.>

 

슈타인은 억압당하는 자기 백성들과의 연대를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하느님과 관계를 다시 맺은 후에야 유대인임을 느끼게 되었다. 구약의 역사 이래 유대 민족은 고난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굳세게 살아왔다. 슈타인은 자신의 민족이 수난을 통해 신앙과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되었음을 자각하였다.

그녀는 뮌스터의 성루드리게리 성당에서 기도하면서 이러한 처참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슈타인은 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려 하였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그녀는 가르멜 안에서 이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확신으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이 신비적인 깊은 관상 중에 그녀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것과 같은 십자가가 유대백성에게 지워져 있는 것을 보게 하였고, 동시에 그녀도 모두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과 자신의 구원을 위해 순결한 하느님의 어린양을 본받아 그녀에게 지워진 부분만큼 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도록 초대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꿰뚫어 볼 수 있었다. ... 오직 가르멜만의 본질적인 특징과 관상적인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활동으로써 이 선택된 영혼으로 하여금 도살당한 어린양을 닮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을 것이며, 이런 닮음은 유대백성을 위해 하느님의 아들의 처참한 죽음과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실현되어야 했었다.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그녀를 붙잡아 당신의 전부로 삼고자 하시는 그분께서 자신을 활짝 열어놓기 위해 가르멜은 영혼을 허무에 이르기까지 내려 앉히기 때문이다. - 테레사 레타나 수녀(1936 쾰른의 가르멜 수녀원 원장)>


슈타인은 1934년 4월 15일 착한목자 주일에 수련 착복을 하면서 "데레사 베네딕타 아 크루체"(Teresia Benedicta a Cruce)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것은 "십자가로 축복받은 데레사"라는 뜻으로, 유대 민족이 처한 상황을 위해서 자신이 선택한 자신의 성소, 즉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운명을 받아들일 각오와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 덕분에 이루어질 수 있는 하느님의 구원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수도명이야말로 그녀의 전 생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가르멜의 침묵과 봉쇄 속에서도 유대인 박해 사건들을 경악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편지들 안에서 보면 슈타인은 그 당시 고통 받고 있는 유대 민족과 깊은 결속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십가가상에서 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인류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것처럼 기 자신의 목숨을 유대 민족과 전 인류를 위한 제물로 바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므로 2천 년 전에 유대인의 전멸 위기를 구한 에스델의 기도는 그대로 슈타인의 기도가 되었고, 그녀는 에스델의 삶과 태도에 자신을 일치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슈타인은 에스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왕과 함께 유대 백성들을 구출한 유대의 왕후, 에스델을 상기하게 됩니다.

나는 지극히 가난하고 힘없는 작은 에스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선택해주신 하느님은 한없이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슈타인은 "속죄의 날(Yom Kippur)"에 태어났다는 것을 가톨릭 신자가 되고 가르멜 수녀가 되어서 더 명확하게 자신의 전 생애의 향방을 가르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완전한 번제물의 희생에 의한 "자기 봉헌"의 길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역사상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향해 나아갔다. 이미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던 슈타인은 하느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자기 자신의 죽음을 참된 평화를 위해 예수 성심께 대속의 제물로써 봉헌하겠다는 유언장을 1939년 6월 9일에 에히트 가르멜 수녀원 원장에게 남겼다.

 

<지금 나는 이미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부디 주님께서 내 삶과 죽음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예수성심, 성모성심과 교회의 지향을 위해서 받아주시옵기 빌며 우리들의 거룩한 수도회 특히 쾰른과 에히트의 가르멜 수녀원이 수호되고 성화되고 완전한 것이 되도록 빕니다.

   또한 주님께서 받아들여지고 영광속에 그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드리며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보속으로 나 자신을 바칩니다. 독일의 구원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게 맺어주신 모든 이들, 살아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해서 이 기도를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