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이 영혼을 다스릴때

34. 영혼이 행하는 모든 것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의 뜻

Skyblue fiat 2017. 2. 15. 20:10

    34

1915년 6월 17일

 

영혼이 행하는 모든 것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의 뜻

 

 

 

1. 평소대로 있다가 예수님께, “저의 생명이신 예수님,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습니다. 제게 남은 것이라고는 덧없이 빨리 사라지는 당신의 현존, 당신의 그림자뿐이니 말입니다.” 하고 투덜거렸더니, 예수님께서 내 말을 가로막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모든 것은 나의 뜻 안에서 끝나야 한다. 영혼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모든 것을 행한 것이 된다. 많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 뜻 안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3. 사실 나는 내 뜻 안에서 끝나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헤아린다. 내 뜻 안에만 바로 나의 생명이 마치 묶여 있는 것처럼 있기 때문에 가장 작고 하찮은 것까지도 나 자신의 것으로 간주함은 당연한 일이다.

 

4. 피조물이 내 뜻과 하나 되어 수행하는 각 행위는 사소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가 먼저 내게서 그 하나하나를 꺼낸 다음에 행동으로 옮기므로 내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5. 따라서 그의 작은 행위 하나도 나의 거룩함과 능력과 지혜와 사랑 전체, 곧 나를 나이게 하는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다.

 

6. 이처럼 나의 뜻과 하나 되어 수행되는 행위 속에서 나는 내 생명과 행적과 말과 생각 등등이 반복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너의 일이 내 뜻 안에서 끝나는 것 외에 네가 달리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느냐?

 

7. 일체 만물은 오직 하나의 최종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태양의 목적은 온 땅에 그 빛을 퍼뜨리는 것이다.

 

8. 농부는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아 주며 논밭을 경작하고 추위와 더위로 고생하지만 이는 그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아니다마다. 그의 목적은 노동의 결실을 수확하여 양식으로 삼는 데에 있다.

 

9. 다른 많은 것들도 이와 같다. 얼마나 많건 전부 단 하나의 목적으로 바뀐다. 이 목적이 인간의 생명을 이루는 것이다.

 

10.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나의 뜻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 안에 모든 것이 끝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나의 뜻이 영혼의 생명을 이루게 되고 나는 그것을 내 양식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11. 나중에 그분께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이 통탄할 시대에 너와 나는 매우 고통스러운 때를 겪게 될 것이다. 사태가 한층 더 악화될테니 말이다.

 

12. 그러나 너는 알아야 한다. 내가 너에게서 나무 십자가를 거두어 가는 대신 내 뜻의 십자가를 준다는 것을. 이 십자가는 길이도 너비도 없는, 무한한 십자가요,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십자가이다.

 

13. 이는 나무가 아니라 빛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이다. 어떤 불보다도 더 세게 타오르는 이 빛 안에서, 각각의 피조물과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고뇌 안에서 너와 나는 함께 고통을 받으면서 모두의 생명이 되도록 힘쓰기로 하자.”

 

 

 

 

 

▲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고흐가 생각했던 예수님은 희망을 그리는 위대한 화가

 

고흐는 그리스도를 일종의 '위대한 화가'로 상상했다. 절망적 어둠에 빠진 세상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희망과 구원의 색채를 칠하는 화가. 그런 화가의 이미지는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오늘도 변함없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이미지와 포개졌다. 고흐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에서 구원을 상상했고, 그것을 자기만의 예술적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싶어 했다. 그리스도를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절망 속의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듯, 고흐 또한 현대의 예수, 오늘의 구원, 바로 지금 여기에 필요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고흐는 들라크루아가 그린 그리스도를 보면서 늘 감탄했다. 고흐에게 예수는 위대한 '씨 뿌리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이 뿌린 희망의 씨앗을 전 인류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추수'로 되돌려 받은 유일무이한 행운아가 아니었을까.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유난히 습작이나 스케치가 많다. 도대체 씨 뿌리는 사람에 어떤 색채의 광휘를 입힐 수 있는지가 그에게 중요한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제 현실에 가깝게 그리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속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색을 계속 찾았다. 고흐가 좋아했던 또 한 명의 화가 코로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화가의 이상과 염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색이라면, 실제 색이 어떤 것인지는 상관이 없네." 그러나 바로 이런 야심 찬 기획이야말로 그가 좌절한 원인이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습작하고, 새로운 구원의 이미지를 상상했지만, 모든 것이 뿌리내리기에 실패한 또 다른 씨앗처럼 보였다. '씨 뿌리는 사람'을 자신만의 색채로 재해석하고, 마침내 단순한 전원 풍경이 아니라 뼈아픈 현실 속에서 구원의 상징을 찾는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의 중심에는 '어떤 색채로 씨 뿌리는 사람을 채색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고통스럽게 '씨 뿌리는 사람'의 습작을 계속했지만, 스스로 마음에 드는 작품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이 고흐의 창조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밀밭은 실제 색깔과 달리 햇살에 반짝이는 푸르른 바다에 가깝게 그려졌고 태양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듯 줄기차게 대지 전체를 어떤 사각지대도 없이 완전하게 비춰주고 있다. 이 작품을 밀레의 모작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게 이 그림은 밀레를 뛰어넘은 고흐만의 색채, 들라크루아를 뛰어넘은 고흐만의 주제의식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그림을 통해 나는 느낀다. 절망 속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 예술의 힘을, 고통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구원의 희망을.

 

 

작성자: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17656

 

빈센트 반 고흐, "석양 속에 씨 뿌리는 사람", 1888

 

▲ 빈센트 반 고흐, "석양 속에 씨 뿌리는 사람", 1888

 

 

 

 

 

 

 

(천상의 책11권-95, http://blog.daum.net/skybluegirin/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