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그리스도론 논쟁
5-5. 삼장서 논쟁과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황제 단성론 옹호…교황과 관계 단절
-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성당 :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 개최됐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
성당에서 사원, 박물관에서 다시 사원으로
537년 성 소피아성당으로 축성,
1453년부터 500년간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다 1935년 박물관으로 사용,
2020년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현존하는 성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지은 것으로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532년 폭도들에 의해 불타버린 성당을 신축하기 시작, 5년 10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유스티아누스가 537년 축성식을 거행하기 위해 입장하다 감격해 "솔로몬대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완공 후 1000여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고 지금도 5번째로 큰 성당이자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보편공의회로는 5차) 개최지인 성 소피아 대성당의 건축은 황제의 신앙이념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뛰어난 군주로서 5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잃은 로마의 옛 영토를 회복시키는 한편 모든 법의 필수불가결한 원천이 되는 로마법대전을 만들어 국가 행정을 정비했다. 뿐만 아니라 '통일된 그리스도교의 기초 위에 로마제국의 재기'를 목적으로 수많은 교회 건축과 더불어 교회내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단성론의 영향으로 교회와 국가를 흡수융합하는 비잔틴 제국 신학이 그 바탕이 됐다. 실제로 유스티아누스는 지상에 군림하는 신의 대리자인 신정주의적 군주로 행동하면서 정통적 신앙의 보호자로 자처하며 교의와 교회규율의 세목에 이르기까지 관여했을 뿐 아니라 칙령을 통해 신학논쟁에도 관계했다. 그러나 종교적 일치를 희망하여 황제의 권력으로 교의문제를 해결하려한 황제의 간섭은 제국을 새로운 분규로 몰아넣었다.
1) 삼장서 논쟁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정책에는 황후 테오도라의 입김도 많이 작용했는데 테오도라는 원래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극장 히포드롬의 무희였다. 무희시절 테오도라는 한 고위관리의 정부였는데 그가 북아프리카로 발령을 받자 그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당하고 오갈데 없는 처지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단성론자인 한 성직자를 만나 신실한 신앙인이 됐다.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테오도라는 유스티아누스 황제를 만나 일약 황후가 되는 행운을 누린다. 이후 테오도라는 황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단성론자들을 비호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틈을 단성론자들이 파고들었다. 그리스도론에 대한 논쟁으로 인한 제국의 분열을 염려한 황제에게 궁정에서 영향력을 지녔던 가빠도키아 지방 가이사리아의 주교 아스키다의 테오도로 주교가 안티오키아학파 지도자들과 그들의 신학을 네스토리우스 이단으로 단죄한다면 단성론자들이 제국교회에 일치할 것이라고 감언하자 황제는 이 제안에 동의했다. 이리하여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44년에 이미 죽은 몹수에스티아의 주교 테오도로와 치로의 주교 테오도레토, 에데사의 주교 이바스 등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이라고 단죄하는 한편 그리스도론에 관한 그들의 저서 내용도 단죄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러한 황제 조치에 대한 찬반을 이른바 삼장서 논쟁이라 한다. 삼장서란 이들 3명의 저자들과 그들이 저술한 저서의 내용과 관련된 문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삼장서의 단죄는 죽은 주교들에 대한 단죄로서 교회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칼체돈 공의회에서 사면된 이들에 대한 것으로 공의회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단성설을 묵인한 결과라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2)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
제국 전체에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칙령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아무도 이 결정을 합당한 것이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총대주교들과 주교들은 끊임없이 강요를 받았고 해임을 면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궁정 주재 교황대리인 스테파노는 단죄 서명자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도 했다.
한편 교황 비질리오는 황제의 강요로 콘스탄티노플로 연행돼 와 1년 가까이 억류당하다 마침내 548년 4월 11일 칼체돈 공의회의 권위를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삼장서에 대해 파문을 선언했다. 교황의 이러한 행위는 서방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아프리카 교회에서는 교황을 파문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교회 형편을 감안해 교황과 황제는 분규를 조정하기 위해 전체 교회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그때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유스티아누스가 551년에 새로이 삼장서를 단죄하기 위한 칙령을 발표했다. 이번에는 비질리오 교황도 동의를 거부하자 성당에서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의 관계가 단절됐으며 교황은 황제가 소집한 공의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유스티아누스는 교황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553년 5월과 6월에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 개최해 삼장서에 대해 파문을 선언했고 이에 반발하는 평신도와 성직자들을 파문이나 파면으로 위협했다.
비질리오교황은 처음에는 교황령(Constitum)을 통해 삼장서의 유죄판결을 단호히 금지했으나 황제가 추방과 강제노동의 협박을 가하자 병중에 시달리던 교황은 553년 12월 공의회의 결의를 추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교황의 동의는 교의적 결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학적으로 미숙한 황제의 태도와 본연의 임무를 지켜내지 못하고 변덕스러웠던 교황으로 인해 교회일치가 크게 손상되고 교황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동방과 서방의 대립이 심화됐다. 종교적 분열로 인한 제국의 동요를 막으려는 정치적인 동기 외에 종교적인 문제도 황제가 해결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데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혼란만 가중시킨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사랑의 행위도 인간적인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이뤄질 때 그리스도교의 애덕이 되는 것처럼 인간의 권력에만 의지한 종교적 일치나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논쟁은 잘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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