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그리스도 최초의 정신적 발전
2-1. 사도시대의 교부들 - 왜곡없는 복음전파의 교량 역할
지난해 여름 로마에 취재차 들렀다가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서 묵은 적이 있다. 마침 다음날이 주일이라 100여명 밖에 들어 갈 수 없는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언어의 장벽을 뚫고 전해져오는 같은 신앙고백에 '하나의 신앙 안에 한 형제'임을 체험하며 몸서리 쳤다.
이처럼 우리 교회의 신앙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 그곳이 비록 아프리카 어떤 오지라 할지라도. 시간적으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지도 어느듯 2000년. 그 긴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이 '하나의 신앙'으로 이어 내려오게 하는지. 그 힘은 무엇인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1)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은 언제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또는 '우리가 전해들은 바에 따라' 였다. 주후 100년 경의 교회는 사도들의 수가 순교로 적어지자 그 제자들이나 아니면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교회를 지도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사도들의 공백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 박해의 위협까지 함께 받고 있어서 지도부의 권위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사도들 이후 교회를 맡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항상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혹은 전해들은 바에 따라 자신들이 감독하던 지역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처해 나갔다. 이러한 가르침의 계승을 전승이라하고 이것을 신앙의 규칙(regula fidei)이라고 불렀다.
2) 사도교부란
오늘날 이처럼 사도들로부터 전해받은 신앙의 올바른 가르침 즉 사도적 전승을 이어받아 후대에 물려준 초세기 저술가들을 사도시대의 교부 혹은 사도교부라고 한다. 사도교부란 교부들 중에서도 신약성서의 후기 경전들과 동시대인 1세기 말부터 2세기 중엽까지의 저술가들을 지칭한다.
교부란 '교회의 아버지'란 뜻으로 교회의 지도자급 인물 즉 주교들을 말하는데 쉽게는 공의회 문헌들을 결정하고 반포한 주교들을 가르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을 일컫는데 해당 교부가 저술시 사용한 언어에 따라 그리스교부와 라틴교부로 나뉜다.
사도들로부터 세워진 교회들이 뿌리를 내리는 이 시기의 교부들은 사도들과 그 후 세대 사이에 올바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달해주는 교량 구실을 하며 성전(聖傳)의 기초를 놓았다.
만약 이 당시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자기 생각대로 신자들에게 가르쳤다면 아마 오늘날 전 세계 교회는 그 민족과 언어의 다양성 만큼이나 다양한 신앙의 형태를 띄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3) 사목적이고 교훈적이었던 가르침
로마의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스미르나의 뽈리카르푸스,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가 사도교부들에 속하고 저자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지만 '바르나바의 서간', '헤르마스의 목자', '디오그에토에게 보낸 서간', '디다케' 등의 문헌도 사도교부 시대의 것으로 간주한다.
사도교부들은 사도들의 감소와 박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던 시기에 활동했다. 따라서 복음의 순수성과 가르침의 정통성을 보존하면서 이단을 바로잡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윤리에 맞는 생활을 강조하며 교회의 지도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장상에 순명 할 것을 권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에 의해 사도교부들의 저서들은 사목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고 아직 체계적인 신학을 펼치지는 못했다.
사도교부 시대 최초의 문헌인 제4대 교황 클레멘스가 95년 경에 쓴 '제1고린토 서간'은 사도 바울로가 이미 꾸짖은 바 있는 고린토 교회의 내분이 재발해 일부 평신도들이 성직자를 추방하고 또다른 신자들은 성직자들을 옹호해 공동체가 파당싸움으로 붕괴될 지경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쓴 충고 편지이다.
사도시대부터 각 지역 책임자는 주교에 의해 관리돼 온 것이 관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린토교회의 분란에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주교가 간섭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교회에서 갖는 로마주교의 우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의 수위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같은 증언은 이냐시오가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끌려가면서 로마교회에 보낸 감사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냐시오는 또한 미르나 교회에 쓴 편지에서 "예수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교회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서 최초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톨릭교회로 표현했고 주교를 중심으로 한 교계제도의 발달과정을 엿보게 해준다.
이처럼 사도교부들의 저서는 우리가 원시 그리스도교의 생활과 사상, 체계를 아는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원시 공동체의 규칙, 전례생활, 신약성서의 발전과정, 교회사 등과 관련한 소중한 자료들이다.
4) 목숨으로 지킨 신앙의 원칙
이처럼 사도교부들은 정통가르침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생활 또한 거룩했으며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뽈리카르푸스는 155년경 화형으로 순교하는데 그이 순교록에 따르면 "총독이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 보내 주겠다고 하자 뽈리카르푸스는 '그분을 섬긴 지가 86년이나 됐는데 하느님이 제게 잘못한 점이 한가지도 없는데 어찌 저주 할 수 있겠소'"하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86세 백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던 성인처럼 사도시대 교부들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고 사도들로부터 이어받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해 헌신했다.
그리고 그 공로로 오늘날 전 세계 가톨릭신자들은 모여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계시진리를 왜곡 없이 알 수 있게 됐고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한국교회도 교리지식이 부족하던 초기 성직자가 없음을 한탄하여 임의로 성직을 만들어 운용하다 잘못된 것임을 알고는 즉시 중지하고 이승훈이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눈물로 범벅이 된 통회의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 오르는 것은 지킬 것은 지켜가야 한다는 생각이 깊어서였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에서는 너무 자주, 다양한 이유로 신앙의 원칙이 무시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후손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신앙을 물려 줄 수 있을까, 과연 그 신앙의 원칙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을까 곱씹어 본다.
[가톨릭신문, 2001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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