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시

92. “고운 내”에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Skyblue fiat 2021. 11. 14. 22:50

 

아직 비가 조금 오기는 하지만 날씨는 덜 고약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아올 수 있다.


  예수께서는 중요한 일에 대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는 두세 사람의 말을 따로 들으신다. 그런 다음 그 사람들은 더 안심하고 제 자리로 돌아간다. 예수께서는 또 다리 위쪽에서부터 골절이 되어 괴로워하는 어린 아이에게 축복하신다. 의사들은 ‘소용 없소. 골절이 저 위쪽 척추골에까지 미쳤소.’하고 말하면서 아무도 치료하기를 원치 않는 어린 아이이다. 어머니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이렇게 설명을 한다. “이 애는 제 여동생과 같이 마을의 길에서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당 사람이 마차를 마구 달리게 하여 와서 이 애를 쓰러뜨리고 넘어갔습니다. 저는 이 애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죽은 것보다도 더 못합니다. 보시지요. 저는 이 애를 널빤지에 뉘어 놓았습니다. … 달리 할 것이 도무지 없으니까요. 뼈가 뚫고 나오기 때문에 몹시 괴로워합니다. 그렇지만 뼈가 뚫고 나오지 않게 되더라도 줄곧 누워 있어야만 하겠기 때문에 괴로울 것입니다.”


  “많이 아프냐?” 하고 예수께서는 측은해 하시면 울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물으신다.
  “예.”
  “어디가?”
  “여기 … 또 여기” 그러면서 망설이는 손으로 두 개의 관골을 만진다.
  “그리고 여기 또 여기” 하고 말하면서 허리와 어깨를 만진다. “널빤지는 딱딱해요. 그리고 나 움직이고 싶어요 ….” 그러면서 절망적으로 운다.
  “내 품에 오고 싶으냐? 이리 오겠니? 저 위로 데리고 갈께. 너는 내가 말하는 동안 사람들을 다 볼거다.”
  “아이고! 그럼요 …” (그의 “그럼요” 하는 말에는 욕망이 잔뜩 들어 있다.) 가엾은 어린 것이 애원을 하며 팔을 내민다.
  “그럼 오너라.”
  “그렇지만 선생님, 그렇게 못합니다. 할 수 없어요! 이 애는 너무 아파요. … 이 애를 씻으려고 움직이지도 못하는걸요.
  “나는 아프게 하지 않을겁니다.”
  “의사가 …”
  “의사는 의사이고, 나는 납니다. 왜 왔습니까?”
  “선생님은 메시아이시니까요.”
  그 여자는 바람과 절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굴이 창백해지다가 빨개지며 대답한다.
  “그러면? 꼬마야 오너라.”
  예수께서 한 팔은 꼼짝하지 않는 다리 밑으로 넣으시고, 또 한 팔은 작은 어깨 밑으로 넣으신다.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물으신다.
  “아프냐? 안아파? 그럼 엄마한테 안녕 해라. 그리고 가자.”
  그리고 길을 터 주는 군중 틈으로 아이를 안고 가신다. 예수께서는 맨 안쪽까지 가셔서 연단같이 된 곳으로 올라가신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마당에서까지도 예수를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작은 걸상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앉으시고 어린 아이는 무릎에 올려놓으시면서 물으신다.
  “좋으냐? 이제는 조용히 있으면서 너도 들어라.”

  말씀을 시작하신다. 예수께서는 왼손으로는 어린 아이를 부축하고 계시기 때문에 손짓은 오른손으로만 하신다. 꼬마는 무엇이 보이는 것이 좋아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저기 끝쪽에 있는 엄마를 보고 방긋 웃는다. 엄마는 바람으로 가슴이 설렌다. 꼬마는 예수의 옷에 달린 끈을 가지고 장난하고, 또 선생님의 부드러운 황금색 수염과 긴 머리채 하나도 가지고 장난한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여라. 그리고 일곱째날은 주님과 네 영에 바쳐라.’ 안식일의 휴식에 대한 계명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보다 나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엿새 동안에 창조를 하시고 이렛날에는 쉬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감히 하느님 아버지를 본받지 않고, 그 분의 계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둔한 명령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육체적인 면으로나 정신적인 면으로나 영적인 면으로나 유익한 명령입니다.


  사람의 몸이 피로할 때에는 어떤 피조물의 몸이나 다 그렇듯이 휴식이 필요합니다. 밭을 가는 소나,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나귀나, 우리에게 젖을 주는 새끼 낳은 양도 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놈들을 잃지 않으려고 쉬게 내버려 둡니다. 밭의 땅도 씨를 심지 않은 여러 달 동안은 쉬고, 우리도 땅을 쉬게 그냥 놔둡니다. 그동안 땅은 양분을 얻고,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흙속에서 올라오는 소금을 잔뜩 저축합니다. 슬기로운 번식의 영원한 법칙에 복종하는 동물과 식물은 우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잘 쉽니다. 그러면 왜 사람은 이렛날 쉬신 조물주를 본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본능에 주어진 명령만 가지고도 그것을 따르고 거기 복종할 줄을 아는 식물이나 동물 같은 하등 피조물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 계명은 정신적인 면으로도 육체적인 면으로도 유익합니다. 엿새 동안 사람은 모든 사람과 모든 일로 골몰했습니다. 베틀의 기계장치에 실처럼 붙잡혀서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느라고 도무지 이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도 돌보고,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도 돌봐야지. 나는 아비이니, 오늘은 내게 자식들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남편이니, 오늘은 아내에게 몸바쳐야지. 나는 형제이니 형제들과 즐겨야지. 나는 아들이니 연만하신 양친을 돌봐드려야지.’ 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명령입니다. 일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더 거룩하고,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것을 보존해 주시는 착하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께 이레 중에 적어도 하루는 드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하느님을 왜 아버지나 아들들이나 형제들이나 아내나 우리 자신의 육체보다 못하게 취급합니까? 주의 날은 주의 것이어야 합니다. 아! 하루일이 끝나고 나서 저녁에 애정이 가득한 가정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오랜 여행을 하다가 가정에 돌아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런데 왜 엿새 동안 일한 다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왜 엿새 동안의 여행에서 돌아와서 ‘제가 쉬는 날을 아버지와 같이 지내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하는 아들과 같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잘 들으시오. 나는 ‘성실하게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율법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한다는 것을 아시지요. 그런데 일의 성실성은 이웃 사랑의 일부분이 됩니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은 장사할 때에 도둑질하지 않고, 일꾼의 임금을 횡령하지 않고, 그의 것을 부정하게 사취하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은 하인과 일꾼도 자기와 같은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은 하인과 일꾼을, 깨뜨리거나 발로 차도 되는 생기없는 돌이나 쇠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따라서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의 이득은 비록 거기에서 성전에 기부금을 낸다 하더라도 저주받은 것입니다.
  아! 얼마나 거짓된 헌금입니까? 그 헌금에서는 사취를 당한 아랫사람의 눈물과 피가 흘러내리는데, 또는 그 헌금이 ‘좀도둑질’, 즉 이웃에 대한 배반이라고 불리는데, – 도둑은 이웃에 대한 배반자이니까요 – 어떻게 감히 그것을 제단 아래 갖다 놓을 수 있습니까? 안식일을 자기성찰하는 데 쓰지 않고, 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데 쓰지 않고, 지난 엿새동안에 지은 죄를 보속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로군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내기만 하는 행위, 여러분의 사고 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 그런 행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행위를 원하시지, 행위의 흉내를 원치 않으십니다.


  율법을 위선적으로 지키는 것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짓으로 거룩하게 지키는 것, 즉 사람들의 눈에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휴식을 하지만, 한가한 시간을 악습과 음탕과 연회로 다 써버리고, 오는 일주일 동안에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서 돈을 사취하고 해를 입힐 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하면 휴식을 지키는 것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진실한 자기 성찰과 자기 자신의 비참에 대한 겸손한 고백과 오는 일주일 동안에는 더 낫게 행동하겠다는 진실한 결심 따위의 내적이고 영적이고 거룩하게 하는 노력을 곁들이지 않은 물질적인 휴식만을 지키는 것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죄를 짓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그러나 넘어지고 나서, 다시는 넘어질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려고 한 걸음도 옮겨놓지 않으려고 하는 어린아이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아이라고 말하겠지요. 우리 모두가 어렸을 때는 그런 과정을 거쳤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더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걸음걸이가 확실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겠지요. 우리가 넘어지면 어머니가 얼마나 수없이 입맞춰 주고 아버지가 얼마나 쓰다듬어 주고 했는지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지극히 다정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에 넘어져서 우는 어린 자녀에게로 몸을 굽히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아라. 내가 일으켜 주마. 다음 번에는 더 조심해라. 이제는 내게 와서 안겨라. 내 품에서는 네가 아픈 것이 없어지고, 너는 튼튼해지고 나아서 기쁘게 내 품에서 나갈 것이다.’ 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갈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말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시오. 아주 어린 아이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어떤 사실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스스로 묻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는 그 사실의 깊이를 헤아려보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는 그에게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의 말을 믿고,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여러분도 지극히 높으신 분께 대하여 아주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시오. 우리 세상으로 길을 잘못 들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저 작은 천사들을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스스로 아주 작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착하고 순결한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을 배우게 한 어린 아이의 믿음을 보시겠습니까? 잘 보시오. 여러분은 모두 내가 안고 있는 이 어린 아이에 대해 동정을 가졌었습니다. 의사들과 아이 엄마가 말하던 것과는 반대로 이 아이는 내가 안고 무릎에 앉혔을 때 울지 않았습니다. 자 보세요. 오래 전부터 휴식을 얻지 못하고 밤낮으로 울던 이 어린 아이가 울지 않고 내 가슴에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어린 아이에게 ‘내 품에 오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자기의 비참한 상태나 어쩌면 느끼게 될지도 모를 고통이나 몸을 움직이는 데서 올 결과에 대해 따지지 않고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어린 아이는 내 얼굴에서 사랑을 보고 ‘예’하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 널빤지에서 꼼짝 못하고 있던 아이가 여기 아주 높은 곳에 와서 보는 것을 기뻐했고, 딱딱한 널빤지 대신에 부드러운 살 위에 놓여지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 어린 아이는 방긋 웃었고 아직 그 작은 손으로 내 머리 한춤을 잡고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제 입맞춤으로 이 어린 아이를 깨우겠습니다. ….”

 

  예수께서 꼬마의 갈색 머리를 입을 맞추시면서 마침내 아이를 깨우시고 그에게 미소지으신다.
  “이름이 뭐니?”
  “요한.”
  “요한아, 내 말을 들어라. 너 걷고 싶으냐? 그리고 엄마한테 가서 ‘메시아가 엄마의 믿음 때문에 엄마에게 축복하신대.’ 하고 말하고 싶으냐?”
  “예! 예!” 그리고는 꼬마가 작은 손으로 손뼉을 치면서 예수께 묻는다. “나 걷게 해 줄래요? 풀밭에서? 아주 딱딱한 이 나쁜 널빤지는 없어지고? 아프게 하는 의사들도 안오고?”
  “안온다. 다신 안와.”
  “아! 난 아저씨가 참 좋아!”
  두 팔로 예수의 목을 얼싸 안고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더 편하게 입맞춤을 하려고 예수의 무릎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깡총깡총 뛰며 예수의 이마와 눈과 뺨에 순진한 입맞춤을 수없이 한다.

 

  너무 기쁜 나머지, 꼬마는 그 때까지 쇠약해 있던 자기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엄마와 군중이 지르는 외침에 충격을 받아 놀라서 돌아다본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한 팔로는 예수의 목을 얼싸 안고 – 웅성거리는 군중과 저 끝에서 제 이름과 예수의 이름을 함께 모아 ‘요한아! 예수님! 요한아! 예수님!’ 하고 부르는 엄마를 가리키면서 – 은밀히 예수께 묻는다. “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엄마도 소리를 질러? 뭐하는거야? 예수 아저씨 때문이야?”

  “나 때문이다. 사람들이 소리지르는 건 네가 걸을 수 있는 게 좋아서 그러는거다. 잘 가거라 요한아(예수께서는 그에게 입맞춤하시고 축복하신다.). 엄마한테 가거라. 그리고 착하게 굴어라.”
  꼬마는 조용히 예수의 무릎에서 내려간 다음 땅바닥에 내려선다. 그는 엄마에게로 달려 가서 그의 목을 얼싸 안고 말한다. “예수가 엄마에게 축복한대. 그런데 왜 울어?”


  사람들이 좀 조용해진 다음에 예수께서 우뢰 같은 소리로 말씀하신다.

 

  “죄에 떨어져서 상처를 입은 여러분은 어린 요한과 같이 하시오.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시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 그리고 군중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행복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보호를 받으시며 자리를 뜨시고, 환상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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