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영혼아, 두 가지 피로를 참을성 있게 견디어라. 지금은 고통의 때이다. 너는 마지막 시기에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알지?! 네가 그것을 보았지, 길을 걸을 때 나는 요한과 베드로와 시몬에게 몸을 기대고, 유다에게까지도 몸을 기댔다. … 그렇다. 그리고 옷자락만 스쳐도 기적이 나오는 나였지만, 이 마음은 바꿀 수가 없었다. 작은 요한(마리아 발또르따의 애칭)아, 고집스러우리만큼 무감각한 저 사람들에게 이미 내 마지막 시기에 들려준 말을 다시 하기 위하여 네게 몸을 의지하게 해다오. 그 사람들에게는 내 처형에 대한 예고가 스며들지 않고 겉에서 흘러내리고 말았다. 또 네 선생이 ‘고운 내’의 보잘 것 없는 들판에서 전도하던 때의 이야기도 하게 해다오. 네게 두 번 축복해 주마. 네 피로와 네 동정 때문에. 나는 네 노력을 세고, 네 눈물을 모은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위한 노력에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느라고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사람들이 받는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 내 마지막 주간의 고통에 대하여 네가 흘리는 눈물에 대하여는 예수의 입맞춤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 써라. 그리고 축복을 받아라.”
예수께서는 방들 중의 하나, 즉 끝에 있는 방에 연단 모양으로 탁자들을 쌓아 놓은 무더기 위에 서 계시다. 예수께서는 방에 있는 사람들과 헛간과 비가 와서 물이 흥건히 괸 마당에까지 있는 사람들에게도 들리라고 매우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물이 그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가공하지 않은 우중충한 모직 겉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수도자들 같다. 방 안에는 제일 약한 사람들이 있고, 헛간에는 여자들이 있고, 마당에는 튼튼한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비를 맞으며 있다.
베드로는 맨발에 짧은 옷만 입고, 머리에 얹은 천으로 비를 막는다. 물 속으로 철벅거리고 다녀야 하고 뜻하지 않은 소나기를 맞아야 해도 그는 명랑성을 잃지 않는다. 그와 함께 요한과 안드레아와 야고보도 있다. 그들은 병자들을 조심스럽게 다른 방으로 옮기고, 소경들을 인도하고, 불구자들을 부축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기 자리잡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시고, 다만 네 제자가 물동이에서 꺼낸 해면처럼 비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을 애처롭게 생각하신다.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두요! 저희는 송진을 바른 나무와 같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두번째 세례를 받고, 세례자는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하고 베드로가 유감스럽게 생각하시는 예수께 대답한다.
마침내 모든 사람이 자리를 잡았고, 베드로는 마른 옷을 입으러 가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세 사람과 같이 마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나 다시 선생님께로 돌아왔을 때 그는 베일을 쓴 여자가 헛간 구석 쪽으로 향하여 오는 것을 본다. 베드로는 더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를 맞으면서, 또 굵은 빗방울에 맞아서 무릎까지 튀어 오르는 물웅덩이를 비스듬히 건너질러 가야하리라는 것을 상관하지도 않고 그 여자에게로 갈 생각밖에는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여자에게로 가서 겉옷은 움직이지 않은 채 팔꿈치를 잡고 더 윗쪽 비를 피할 수 있는 벽 근처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는 보초 모양으로 그 옆에 뻣뻣하게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예수께서 그것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환한 미소를 감추시느라고 머리를 숙이고 미소지으셨다. 이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 가르침을 들으려고 규칙적으로 온 여러분은 내가 십계명을 차례대로 말하지 않고, 어떤 것들은 건너뛴다고 말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듣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있는 고통과 상처를 보는데, 거기에 여러분의 정신을 집중시키려는 것입니다. 나는 의사입니다. 의사는 우선 병이 제일 중한 사람들,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사람들에게 가고, 그 다음에는 병이 덜 중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란한 죄를 짓지 마시오.’ 하고.
어떤 사람의 얼굴에서 ‘음란한’ 사람을 알아보려고 휘휘 둘러보지 마시오. 서로 서로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시오.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누가 여러분의 행실을 추측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이웃 사람의 어리둥절한 눈에서 붉어져서 아래로 숙여진 그의 이마에서 무엇을 추측하려고 하지 마시오.
그리고 또 … 오! 특히 남자 여러분, 말해 보시오. 여러분 중에서 관능적인 만족이라는 저 재와 오물로 만든 빵을 도무지 맛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을 한 시간 동안 창녀의 품으로 끌고 가는 음란밖에 음란이 없습니까? 아내와 더불어 결혼을 오용(誤用)하는 것은 음란이 아닙니까? 결혼의 오용이라고 말한 것은 그 결과는 피하면서 서로 관능의 만족만을 찾는 악습을 합법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란 생식을 뜻하는 것이고, 행위는 수정을 뜻하는 것이고 또 수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부도덕한 행위입니다. 부부의 잠자리를 가지고 창가(娼家)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부부의 잠자리가 정욕에 의해서 더럽혀지고 또 임신에 의해서 신성하게 되지 않으면 창가가 되는 것입니다. 땅은 씨를 물리치지 않습니다. 땅은 씨를 받아서 풀을 만들어냅니다. 씨는 땅에 뿌려진 다음에 흙을 떠나지 않고, 즉시 뿌리를 내려 흙에 달라붙어 자라고 이삭을 만들어냅니다. 초목은 땅과 씨의 결합에서 생겨납니다. 남자는 씨이고, 여자는 땅이고, 이삭은 아이입니다. 이삭을 만들기를 거부하고 그의 기운을 옳지 못하게 잃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부부의 잠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매음이지만, 다른 매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둘이 한 몸이 되어 자식을 통하여 번식하여라’고 한 계명에 불복종함으로써 더 중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고의로 임신을 하지 않아서,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만 법률상의 정숙한 아내인 여자 여러분, 여러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음부같이 될 수 있고, 또 여러분의 남편하고만 있으면서도 음란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임신은 원하지 않고 쾌락만 원하며, 그것도 너무 자주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쾌락이란 것이 독이 있는 어떤 입에 오건간에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독약이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쾌락은 불처럼 타오르는데, 배불리 먹는다고 생각하면서 아궁이 밖으로 나와서 점점 더 게걸스럽게 집어 삼킵니다. 쾌락은 혀에 재맛과 같은 쓰라린 맛을 남깁니다. 쾌락은 불쾌감과 메스꺼움과 자기 자신과 쾌락을 같이 나눈 상대에 대한 멸시감을 줍니다. 그것은 양심이 깨어나면, – 흥분이 가라앉으면 양심은 깨어나는 법입니다. - 짐승 이하로 품위를 떨어뜨린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밖에 생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음란한 죄를 짓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간음죄는 대부분 남자에게서 옵니다. 또 나는 하나의 악몽과 같고 레위기가 다음과 같은 말로 단죄(斷罪)한 저 상상도 할 수 없는 결합에 대하여도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남자야, 남자가 여자이기나 한 것처럼 그와 결합하지 말아라’ 또 ‘동물과 결합하여 그것과 더불어 너를 더럽히지 말아라, 이것은 여자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이 결합들이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의로 임신이 안되게 하면 거룩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결혼에 대한 부부들의 의무를 지적하였으니, 이제는 남녀간에 쌍방의 악의와 돈이나 선물로 보수를 주고 받고 행해지는 본 의미의 간음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그 안에 제단에 들어 있는 훌륭한 성전입니다. 제단 위에는 하느님이 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타락이 있는 곳에는 안계십니다. 그러므로 음란한 사람의 육체는 거룩함을 잃고 하느님이 안계신 제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흙탕과 자기가 토한 것에 뒹구는 취한 사람과 같이 사람은 짐승과 같은 음란으로 자기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벌레와 가장 더러운 짐승보다도 더 못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밀이나 가축을 파는 것처럼 자기의 육체를 팔 정도로 타락한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서 어떤 이익을 얻었는지 말해 보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손에 쥐고, 그것을 살펴보고, 그것에 질문을 하고, 그 말을 듣고, 그 상처와 그것을 부들부들 떨게 하는 고통을 보고 나서, 말을 하고 내게 대답을 하시오. 깨끗하게 태어난 마음의 저 고통을 당해 마땅할 만큼 그 과일이 달콤하던가요? 깨끗하게 태어났는데 여러분이 더러운 육체 안에서 살도록 강요하고, 음탕에 생명과 열을 주기 위하여 뛰도록 강요하고 악습으로 소모한 마음의 그 고통을 말입니다.
이거 보시오. 스스로 집에서 도망쳐 나왔거나 썩은 실과가 그 부패로 다른 아이들을 타락시키지 못하도록 쫓겨난 탕녀들, 당신들은 ‘엄마’하고 부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당신들의 어머니 생각을 하고 몰래 흐느껴 울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습니까? 어쩌면 ‘나는 내게 창피를 주는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고통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말입니다.
아니, 백발로 인하여 존경받을 만하게 된 어떤 노인을 만날 때, 당신들의 아버지의 백발에 진흙을 한웅큼 쥐어서 던지듯이 수치를 던지고, 수치와 더불어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던졌다는 생각을 하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아니, 어떤 아내의 행복이나 어떤 처녀의 순진함을 보고, 또 당신들은 ‘나는 이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것을 영영 다시 얻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고 스스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당신들은 후회가 창자를 쥐어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지 않습니까?
아니, 당신들은 몹시 음탕하거나 몹시 업신여기는 어떤 남자의 눈길을 만날 때 당신들의 얼굴을 흉하게 만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아니, 아기의 입맞춤을 갈망하면서도, 태어나기로 되어 있던 생명들을 당신들이 죽여서, 귀찮은 짐과 쓸 데 없는 불편처럼 버리고, 그것을 배었던 나무에서 떼어내어 두엄더미에 내던져서, 이제는 그 어린 생명들이 ‘살인자!’ 하고 부르짖기 때문에 감히 ‘뽀뽀해라’ 하는 말을 못할 때에 당신들의 비참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습니까?
아니, 특히 당신들을 창조하시고 다음과 같은 것을 물으시려고 당신들을 기다리시는 최고 심판자를 생각할 때에 떨리지 않습니까? ‘너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네게 생명을 준 것이 그 때문이었느냐? 기생충과 타락의 소굴인 네가 어떻게 감히 내 앞에 나타나느냐? 너는 네게 있어서 신이었던 모든 것, 즉 향락을 가졌었다. 영원한 저주의 곳으로 가라.’ 하고 말입니다.
누가 웁니까? 아무도 울지 않습니까? 아무도 울지 않는다구요? 그렇지만 내 영혼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다른 어떤 영혼을 만나러 갑니다. 내 영혼이 왜 그리로 갑니까? 창녀를 맹렬히 비난하려고 갑니까?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불쌍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더러운 땀을 흘리는 더럽혀진 그의 육체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오! 아버지! 아버지! 저는 이 영혼을 위하여 사람이 되었고, 그의 구속자가 되고, 또 그의 자매들인 많은 영혼들의 구속자가 되려고 하늘을 떠났습니다! 왜 길잃은 이 양을 거두어서 양의 우리로 도로 데려오고, 깨끗하게 해서 양떼와 합치게 하고 목초를 주고, 오직 제 사랑만이 그럴 수 있는 것 같은 완전한 사랑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증오에 지나지 않는데, 그 영혼이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랑, 하도 관대하고 완전하고 다정스러워서 지난 날을 한탄하지 않거나 또는 다음과 같은 말만 하면서 한탄하게 되는 그런 사랑을 말입니다. ‘영원히 아름다우신 하느님, 저는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너무나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누가 제게 되돌려주겠습니까? 제가 항상 깨끗했더라면 맛보았을 그것을 얼마남지 않은 제 여생에 어떻게 맛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러나 세상의 온갖 음란에 짓밟힌 영혼아, 울지 말고 내 말을 들어라.
너는 혐오감을 주는 넝마 조각이다. 그러나 한 송이 꽃이 될 수 있다. 너는 두엄더미이다. 그러나 꽃이 만발한 화단이 될 수 있다. 너는 더러운 짐승이다. 그러나 천사가 될 수 있다. 언젠가 너는 천사였다. 너는 꽃이 만발한 풀밭에서 장미꽃 가운데에서 장미꽃과 같이 신선한 장미꽃으로서 네 동정의 향기를 풍기며 춤추었다. 너는 차분하게 어린 아이 노래를 부르다가 어머니 아버지에게로 뛰어가며 ‘나는 엄마 아빠가 좋아’ 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지 곁에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수호 천사는 네 영혼의 하늘빛을 띤 하얀 빛을 보고 미소지었다 …. 그런데 그 다음에는? 왜? 왜 네 죄없는 작은 영혼의 날개를 뜯어냈느냐? 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짓밟고 믿을 수 없는 다른 마음들에게로 달려갔느냐? 왜 네 깨끗한 목소리를 낮추어 거짓 사랑의 거짓된 말들을 하게 했느냐? 왜 너 자신을 모독함으로써 장미꽃대를 꺾어버렸느냐?
하느님의 딸아, 뉘우쳐라. 뉘우침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깨끗해지는 것이고 높은 곳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사람은 너를 용서할 수 없느냐? 네 아버지까지도 너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인자가 인간의 착함에 비할 수가 없고,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의 비참보다 무한히 더 크기 때문이다. 정숙한 생활로 네 영혼을 존경받을 수 있게 만들어서 너 자신을 존중하여라. 다시는 네 영혼에 대하여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 곁에서 새 이름을 만들어 가져라. 이것이 가치있는 일이다. 너는 악습이다. 그러니 정숙한 사람이 되고, 희생이 되고, 네 뉘우침의 순교자가 되어라. 너는 네 육체를 즐겁게 하느라고 네 마음을 몹시 괴롭힐 줄을 알았다. 이제는 네 마음에 영원한 평화를 주기 위하여 네 육체를 몹시 괴롭힐 줄을 알아라.
자, 다들 가시오. 각기 여러분의 짐과 여러분의 생각을 가지고 가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뉘우치는 사람은 아무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영혼을 알 수 있는 빛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보시오.”
많은 사람이 마을 쪽으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방으로 들어간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에게로 가셔서 고쳐 주신다.
한 떼의 사람이 한 구석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갈라져서 쉴 새 없이 요란한 손짓을 하고 흥분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옹호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모두에게 좀 더 분별있게 판단하라고 충고한다. 마침내 다른 두 패에 비하여 수효가 적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가장 악착스러운 사람들은 중간길을 택한다. 그들은 이제는 쓸 데 없게 된 기적받은 세 사람의 들것을 시몬과 같이 옮기고 있는 베드로에게로 가서, 이제는 순례자들의 여관이 된 방 한가운데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습격한다. 그들은 “여보시오. 갈릴래아 양반” 하고 말한다.
베드로는 몸을 돌리고 이상한 짐승들을 보듯이 그들을 바라본다. 그는 말은 하지 않지만 얼굴은 보통이 아니다. 시몬은 흥분해서 떠드는 그 다섯 사람을 한번 흘낏 바라보고는 모두 그 자리에 버려둔 채 나간다.
다섯 사람 중 하나가 말을 다시 꺼낸다. “나는 율법학자 사무엘이오. 이 사람은 다른 율법학자 사독이고, 저 사람은 유명하고 권세있는 유다 사람 엘르아잘이고, 또 한 사람은 장로 갈라셰보나이고, 끝으로 저 사람은 나훔이오. 알겠소? 나훔이오!” 그 어조는 아주 과장조이다.
베드로는 이름을 말할 때마다 가볍게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반쯤밖에 숙이지 않고 아주 무관심하게 이렇게 말한다.
“난 도무지 모르겠소. … 도무지 본 일이 없어서. 그리고 또 …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소.”
“시골뜨기 어부! 이 분은 안나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걸 아시오.”
“나는 안나라는 사람을 모르오. 아니 안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많이 알고 있소. 바로 가파르나움에도 진짜 버섯 재배하는 안나가 있소. 하지만 이 사람이 어떤 안나의 신임을 받는 사람인지 모르겠소.”
“이 사람? 당신 나보고 ‘이 사람’이라고 하는거요?”
“아니 그럼 뭐라고 말하라는 거요? 나귀나 새라고 하라는 거요. 난 학교다닐 때 선생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이 사람’이라고 한다고 가르쳐 주셨소. 그런데 내가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람이지요.”
그 사람은 이 말이 그를 산 채로 껍질을 벗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흥분한다. 다른 사람, 즉 처음에 말한 사람이 설명한다. “아니 안나는 가이파의 장인이란 말이오 ….”
“아! … 알았소!!! 그래서요?”
“그러니까 우리는 분개하고 있단 말이오!”
“뭣 때문에요? 날씨 때문에요? 나도 그렇소. 내가 세번째나 옷을 갈아 입었소. 그래서 이제는 마른 옷이 하나도 없소.”
“여보시오, 바보인 체하지 마시오.”
“바보요? 이건 진실이오. 만일 당신들이 날씨 때문에 불만이 아니라면, 무엇이 불만이요? 로마인들에 대해서요?”
“당신 선생에 대해서요! 거짓 예언자에 대해서.”
“이보시오. 사무엘 양반! 내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난 호수와 같단 말이오. 잔잔하다가도 눈 깜빡할 사이에 폭풍우가 인단 말이오. 말조심하시오.”
그러는 동안 제베대오와 알패오의 아들들이 들어왔고, 그들과 같이 가리옷 사람과 시몬도 들어왔다. 그들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는 베드로에게 가까이 간다.
“당신의 그 서민의 손으로 시온의 양반들을 건드리지 마시오!”
“아이고! 참 훌륭한 양반들이로군요! 그러는 당신들은 선생님을 건드리지 마시오. 그렇잖으면 즉시 우물로 날아가서 정말 안과 밖을 깨끗하게 씻게 될 테니까요.”
“나는 성전의 학자들에게 이 집은 개인 소유라는 것을 지적하겠소.” 하고 시몬이 침착하게 말한다. 그리고 가리옷 사람은 한술 더 뜬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항상 남의 집을 존중하셨고, 모든 집 중에서 첫째인 주님의 집을 더할 수 없이 존중하셨다는 걸 보증하오. 그러니까 선생님의 집도 똑같이 존중해야 하오.”
“엉큼한 벌레 같은 사람, 닥치시오.”
“엉큼하다니, 무엇이 엉큼하다는거요? 당신들이 내게 혐오감을 일으켰소. 그래서 혐오감이 없는 곳으로 온거요. 당신들과 같이 있은 것으로 인해서 내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요컨대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뭐요?” 하고 알패오의 야고보가 무뚝뚝하게 묻는다.
“당신은 또 누구요?”
“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요. 알패오의 아버지는 야곱, 야곱의 아버지는 마탄, 마탄의 아버지는 엘르아잘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의 첫조상인 다윗왕에 이르기까지 내 모든 조상의 이름을 대겠소. 그리고 나는 메시아의 사촌이오. 만일 당신 같은 귀하신 몸이 가믈리엘과 가이파보다도 하느님을 더 잘아는 성실한 이스라엘 사람과 말하는 것이 불쾌하다면, 왕족인 조상과 유다 가문에 대해서 나하고 말 좀 합시다. 자, 말하시오.”
“당신의 친척이고 선생인 사람은 창녀들이 따라다니게 하오. 베일을 쓴 여자도 그중 한 사람이오. 나는 그 여자가 금을 팔 때에 보았소. 그리고 누군지 알아보았소. 그 여자는 쉬암마이의 정부인데 지금은 그 남자를 떠났소. 이것이 당신 친척에게 불명예가 된단 말이오.”
“누구의 정부요? 율법박사 쉬암마이의 정부요? 그럼 그 여자는 다 늙은 할망구겠구려. 그러니까 위험이 없소 …” 하고 가리옷 사람이 희롱조로 말한다.
“미치광이, 입닥쳐! 헤로데의 총신(寵臣) 엘키의 쉬암마이 말이요.”
“저런! 저런! 그러니까 이제는 그 여자가 총신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군요. 그 여자가 그의 정부였단 말이지요. 당신이 아니고. 그럼 왜 당신이 걱정을 하는거요?” 하고 가리옷 사람이 아주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다.
“여보시오. 당신은 밀정 노릇을 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하고 알패오의 유다가 묻는다.
“죄를 짓기 위해 넘어지는 사람의 명예가 손상되지, 죄인을 다시 일으키려고 애쓰는 사람의 명예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내 선생님이고 형님인 분이 말을 해서 그 목소리가 시온의 탕아들 독설로 더럽혀진 귀에까지 이르게 한다고 해서 그분에게 무슨 불명예가 온단 말이요?”
“그의 목소리? 아! 하! 당신의 선생이고 사촌인 사람은 나이가 서른 살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선자일 뿐이오. 그런데 당신은, 당신들 모두는 밤에는 귀머거리처럼 자고 있소 ….”
“이 뻔뻔스런 뱀 같은 놈, 썩 나가라. 그렇잖으면 목을 조를테다.” 하고 베드로가 소리를 지르니 야고보와 요한이 같이 소리를 지른다.
그러는 동안 시몬은 그저 이렇게만 말한다. “염치도 없구먼! 당신의 위선이 너무 커서 튀어나오고 넘쳐흐르오. 그리고 당신은 괄태충(括胎蟲)과 같이 깨끗한 꽃에 점액을 내뿜고 있소. 썩 나가시오. 그리고 사람이 되시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은 당신이 점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사무엘, 나는 당신을 알아보겠소. 당신의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소. 하느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실 것이오. 그러나 내 앞에서 썩 나가시오.”
그러나 가리옷 사람이 알패오의 야고보와 같이 괄괄한 베드로를 말리고 있는 동안 유다 타대오가 개입한다. 그의 거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사촌과 더 비슷하고, 그의 눈길에는 똑같은 파란 불꽃이 서려 있어 그의 태도는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그는 천둥 같은 소리로 외친다.
“무죄한 사람의 명예를 손상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명예를 손상하오. 눈과 혀를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행동을 하라고 만드셨소. 그런데 중상하는 사람은 눈과 혀에 나쁜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그것들의 신성을 더럽히고 품위를 떨어뜨리오. 나는 당신의 백발에 대한 나쁜 행위로 나 자신을 더럽히지는 않겠소. 그러나 악인들은 청렴한 사람을 미워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본심을 드러낸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의 악의를 쏟아놓는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어두움 속에서 사는 사람은 꽃핀 나뭇가지를 뱀과 바꾸오. 그러나 빛 속에 사는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누가 그것을 공경하면 정의에 대한 사랑으로 그것들을 옹호하오. 우리는 빛 속에서 살고 있소. 우리는 빛의 아들들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사람들이고, 우리의 지도자는 여자도 죄도 모르는 성인이시오. 우리는 선생님을 따르고 그분의 적과 대항해서 그분을 옹호하오. 그러나 우리는 이 적들에 대하여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증오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오. 노인장, 원숙한 경지에 이른 젊은이의 충고를 들으시오. 이 젊은이는 영원한 지혜가 경솔한 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시고, 선행에 있어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소. 가서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신성이 모독된 모리아산의 집에 계시지 않고, 이 초라한 집에서 당신 영광 중에 게신다고 보고하시오. 잘 가시오.”
그 다섯 사람은 감히 대꾸를 하지 못하고 떠나간다. 제자들은 서로 의논한다. 아직 병이 나은 병자들과 같이 계시는 예수께 이 말씀을 드려야 하는가? 말씀을 드리는 것이 더 낫다.
그들은 예수께로 가서 부르고 그 말씀을 드린다. 예수께서는 조용히 미소 지으시며 대답하신다.
“너희들이 옹호해 주어서 고맙다. 그러나 어쩌겠느냐? 누구나 제가 가진 것을 주는 법이니.”
“그렇지만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보라는 눈이라, 많은 사람이 봅니다. 그 여자는 항상 개처럼 문 옆에 있습니다. 그 여자는 선생님께 해를 끼칩니다.” 하고 여러 제자가 말한다.
“그 여자를 그냥 내버려두어라. 내 머리를 칠 돌은 그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구원을 받으면 … 내 기쁨은 이 모든 비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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