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계명은 어떤 계명군(群)에 속합니까? ‘둘째 계명군에 속한다’구요? 확실합니까?
이제 또 묻겠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죄입니까, 또는 이 죄의 희생이 된 사람을 모욕하는 죄입니까? 두 번째 경우라구요? 여기에 대해서도 자신있습니까?
이제 또 묻겠습니다. 살인죄밖에 없습니까? 사람을 죽이면 이 죄 하나만을 짓는 것입니까? ‘이 죄만 짓는 것’이라구요? 아무도 이것을 의심치 않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큰 소리로 말하시오. 여러분 모두를 대신해서 한분만 말씀하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당신 곁에 온 어떤 어린 계집아이를 쓰다듬으시려고 몸을 굽히신다. 그 계집아이는 조용히 있으라고 엄마가 준 사과를 조금씩 갉아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넋을 잃고 예수를 쳐다보고 있다.
어떤 위엄있는 노인이 일어나서 말한다. “선생님,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저는 늙은 회당장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저더러 모두를 대신해서 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제 생각에도 그렇고 우리 모두의 생각에도 그렇고, 우리는 정의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가 배운 것에 따라서 대답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제 확신을 살인과 구타에 관한 율법의 장(章)으로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왜 여기 왔는지 아십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지혜와 진리를 알아보기 때문에 우리를 가르쳐 주십사고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잘못 생각했으면 제 어두움을 비추어 주십시오. 그래서 이 늙은 종으로 하여금 빛으로 꾸며져서 임금님께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양떼에 속한 사람들도 그들의 목자와 같이 생명의 샘에서 물을 마시려고 온 이 사람들에게도 같은 도움을 주십시오.” 그러면서 앉기 전에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몸을 숙여 절한다.
“할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선생님의 종, 엠마오의 클레오파입니다.”
“내 종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종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버지께 일체의 우선권과 사랑을 드려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 영광을 제일 먼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람은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제가 제물의 빵을 가지고 하는 것과 같이 착한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흠없는 탁자에 올려놓아 바칩니다. 그러나 클레오파 선생, 선생의 거룩한 소원대로 환하게 비추어져서 하느님께 가도록 내 말을 들으시오.
유죄성의 정도를 측정하려면, 죄 자체를 앞서 가고, 그것을 준비하고, 해명하고 설명하는 상황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때렸는가? 무엇을 때렸는가? 어디를 때렸는가? 무엇을 가지고 때렸는가? 왜 때렸는가? 어떻게 때렸는가? 언제 때렸는가?” 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은 용서를 청하려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전에 이것을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때렸는가?’
사람을. 나는 사람을 때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이 부자인지 또는 가난한지, 자유인인지 노예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고려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존재이신 분께 창조된 사람들, 따라서 모두가 평등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엄위 앞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도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눈과 내 눈으로 보기에는 다만 한가지 노예상태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의 상태, 즉 사탄의 지배를 받는 상태입니다. 옛날 율법은 자유인과 노예를 구별하고, 죽음이 즉시 왔느냐 하루나 이틀 동안 살아 남아 있었느냐, 또는 임신한 여자가 맞아 죽었느냐 혹은 뱃속에 있는 아이만 죽었느냐에 따라서 미세한 고려를 일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완전한 빛이 아직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하던 말입니다. 지금의 이 완전의 빛이 여러분 가운데 있으며 여러분에게 ‘누구든지 자기와 같은 사람을 때려 죽이면 죄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는 그는 사람에 대하여만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여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모든 피조물의 왕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최고의 피조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셔서, 영으로 당신을 닮게 하셨고, 당신의 완전한 생각의 완전한 모습에서 사람의 모습을 끌어내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물속을 보시오. 혹 거기에서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사람과 견줄 만한 동물이나 식물을 발견합니까? 동물은 달리고, 먹고, 마시고, 자고, 새끼를 낳고, 일하고, 노래하고, 날고, 기고, 기어올라가고 합니다. 그러나 말은 못합니다. 사람도 달리고 뛰어오를 줄 아는데, 뛰어오를 때에는 하도 민첩해서 새와 겨룰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헤엄도 칠 줄 아는데, 하도 빠르게 헤엄치기 때문에 물고기와도 같습니다. 사람은 길 줄도 알아서 뱀같아 보이고, 기어오를 줄을 알아서 원숭이와도 같습니다. 사람은 노래를 부를 줄 알아서 새와 같이 보입니다. 사람은 아이를 낳아서 번식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게다가 또 말도 할 줄 압니다.
그리고 ‘어떤 짐승이든지 제 나름대로의 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마시오. 예, 가지고 있습니다. 소는 메에 하고 울고, 양은 매애매애 하고 울고, 나귀는 앙앙하고 울고, 새는 지저귀고, 또 떠는 목소리로 노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는 어느 높이나 똑같이 한가지 울음 소리만 낼 것이고, 양도 세상 끝날 때까지 매애매애 하고 울 것이고, 나귀도 첫번째 나귀가 운 것처럼 앙앙 하고 울 것입니다. 참새는 항상 짧게 짹짹거릴 것이고, 종달새와 밤꾀꼬리도 한 놈은 해 있을 때, 또 한 놈은 별이 총총한 밤에 같은 찬가를 부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도 이놈들은 첫번 날과 첫날밤에 인사한 것처럼 인사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사람은 목젖과 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심이 지능의 중추인 뇌에 중심을 둔 복잡한 일련의 신경을 가졌기 때문에 새로운 감각을 파악할 줄 알고, 그것을 그의 심사숙고의 대상으로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여줄 줄 압니다.
아담은 그의 벗을 개라고 불렀고, 수염이 거의 없는 얼굴 위로 숱한 갈기를 달고 있지만 개와 더 비슷해 보이는 친구를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다정스럽게 인사를 하는 새끼양에게 양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나비처럼 날아다니지만 나비는 가지지 못한 기분좋은 노래를 하는 저 날개 달린 꽃을 새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담의 후손들이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작품을 ‘알게’됨에 따라서, 또는 사람에게 있는 하느님의 지능의 번득임을 가지고 아이들을 낳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과 더불어 있든가 하느님을 거슬려 있는 데 따라서, 그들의 자식들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해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따라서 자꾸 새로운 이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좋은 물건들을 생각해내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물건들을 생각해내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거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나쁜 소질로 몹시 괴롭힘을 당하는 당신 자녀들의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피조물입니다. 비록 지금은 죄지은 존재라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하느님께 가장 소중한 피조물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천사나 대천사, 케루빔이나 세라핌을 보내지 않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말씀에 사람의 형체를 갖추게 하셔서 보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하여금 속죄하는 고통을 받도록 감수성이 있는 존재가 되도록 인간의 육체라는 옷을 입히는 것을 마땅치 않은 일로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말씀이 당신과 같이 순수한 영이므로 그대로는 고통을 받아 사람의 죄를 속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람이 되어라.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라. 나는 사람을 하나 만들었었는데, 내가 만드는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완전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이 즐겁게 살고 즐겁게 죽었다가 복되게 다시 깨어나 내 하늘의 낙원에서 지극히 행복하게 영원히 머무르게 하려고 마련하였었다.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이 낙원에는 하나이며 삼위인 나, 우리가 옥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럽혀진 것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이 옥좌가 있는 곳에는 거룩함이 아닌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으로서의 나의 성질, 우리의 신비로운 본질은 흠없는 사람들밖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아담을 통하여 아담에 의하여 더럽혀졌다. 가서 사람을 깨끗하게 하여라. 이것이 내 뜻이다. 이제부터 너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맏아들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죄없는 죽을 육체와 원죄가 없는 영혼을 가지고 맨 처음으로 여기에 들어오겠기 때문이다. 너보다 먼저 세상에 있었던 사람들과 네 뒤에 올 사람들은 구세주로서의 네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태어난 사람밖에는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났고, 또 죽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특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이제 말해 보시오. 어떤 아버지가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그 중에 하나가 특권을 받은 아들이고 아주 소중히 여기는데, 그 아들을 누가 죽이면, 아버지는 다른 자식 중의 하나가 그렇게 된 것보다 더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모든 자식에 대하여 공평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당하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주와 더불어 공동으로 신령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피조물인데, 이것은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셨다는 명백한 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어떤 아들을 죽이면 아들만을 모욕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도 모욕하는 것입니다. 아들에게는 육체에, 아버지에게는 마음에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는 두 사람에게 다 입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사람만을 모욕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도 모욕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육체에, 하느님께는 그분의 권리에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하느님만이 주고 빼앗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에게 폭력을 쓰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의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일인 한 사람을 없애기 때문입니다. 살인자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 자신을 위하여는 가지기를 원하는 것, 즉 생명을 그에게서 빼앗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처음 두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죽였는가?’
길에서도 죽일 수 있고, 피해자의 집에서 자기 집으로 피해자를 유인해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기관 또 저 기관을 때려서 더 심한 고통을 일으킬 수 있고, 태중에 아기를 밴 여자를 해치면 한꺼번에 두 건의 살인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의도가 없이 길에서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손에서 빠져 나간 짐승이 행인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예모(豫謨 예비된 음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아마포로 지은 옷 속에 위선적으로 단도를 감추어 가지고 원수의 집으로 가거나 – 그런데 원수란 더 좋은 사람이라는 죄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 또는 여러 가지 존경의 표를 보이면서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목을 찔러 죽여서 빗물받이 웅덩이에 집어던지면, 그 때에는 예모가 있는 것이고, 악의와 잔인성과 폭력으로 완전한 범죄가 됩니다.
만일 내가 어머니와 함께 그의 뱃속에 있는 아이을 죽이면, 하느님께서는 그 두 사람에 대한 책임을 내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새 사람을 낳는 배는 신성하고, 그 안에서 성숙하는 중에 있고 하느님에게서 영혼을 받은 작은 생명도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해쳤는가?’
참다운 무기를 지니고 간 사람이 ‘나는 해치고자 하지는 않았다’고 단언해도 그것은 헛일입니다.
성이 났을 때에는 손도 무기가 되고, 길에서 줍는 돌이나 나무에서 뜯어낸 가지도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단검이나 도끼를 냉정하게 검사하고, 만일 그것들이 무딘 것같이 보이면 갈아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그러나 쉽게 꺼내 휘두를 수 있도록 지니고 그의 경쟁자의 집으로 가는 사람은 ‘나는 해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독있는 풀이나 열매를 가지고 가루나 음료를 만들기 위하여 그것을 뜯거나 따서 독약을 만들어 향신료나 발효음료인 것처럼 피해자에게 주는 사람은 ‘나는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수많은 생명을 숨어서 말없이 죽이면서 벌을 받지 않고 있는 여자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의 태중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죄에서 생겼기 때문에, 또는 여러분의 뱃속에 무익한 짐에 지나지 않거나 또는 여러분의 재산을 위하여 달갑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를 떼어내는 것도 죽이는 것입니다. 이 짐을 피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살인을 음란과 폭력과 불복종에 합치지 마시오. 그리고 사람이 못본 것은 하느님께서도 못보시는 줄로 믿지 마시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기억하십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기억하시오.
‘내가 왜 죽였는가?’
아! 이유는 대단히 많습니다! 강한 흥분으로 여러분에게 생기는 예기치 않은 균형 상실, 부부의 잠자리가 더럽혀진 것을 보는 데에서 오는 예기치 않은 불균형, 집안에서 들킨 도둑, 여러분의 어린 딸을 겁탈하는 불결한 놈, 위험한 증인이나 여러분의 출세를 가로막는 어떤 사람이나 그 사람의 지위나 재산이 탐나는 어떤 사람을 제거하겠다는 냉정하고 심사숙고한 계산, 이와 같이 이유는 대단히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비통하고 흥분해서 살인자가 되는 사람은 용서하실 수 있지만, 야심으로나 사람들의 존경을 추구하기 때문에 살인자가 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시오. 그러면 어떤 사람의 눈길도 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시오. 그리고 남의 것을 차지하려고 살인자가 될 정도로 남이 가진 것을 탐내지 마시오.
‘내가 어떻게 해쳤는가?’
흥분으로 인하여 한번 때리기 전과 때린 후에 계속 악착같이 덤벼서 그랬는가? 사람이 자제를 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탄은 투석수(投石手)와 같이 사람을 범죄 속으로 던집니다. 그러나 어떤 돌이 목표에 맞고 나서 다시 투석기로 돌아와 다시 던져져서 다시 때리기 시작하게 하면, 여러분은 그 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저 돌에는 마술과 지옥의 힘이 붙어 있다.’ 고 말할 것입니다. 한 번 때린 다음 두 번, 세 번, 열 번을 때리면서도 사나움이 가라앉지 않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첫번 때린 것이 이해될 수 있는 동기에서 온 것이면, 한 번 때린 것은 성이 가라앉고 이성을 되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살인자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더 악착같이 사납게 덤빕니다. 그 사람은 형제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지 않고, 가질 수도 없는 사탄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사탄, 즉 증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 해쳤는가?’
대번에 죽였는가? 피해자가 땅에 쓰러진 다음에 죽였는가? 원한은 점점 더 심해가는데, 용서하는 체하면서 죽였는가? 어떤 사람의 아이들을 죽여서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주는 타격을 주려고 여러 해 동안을 기다렸다가 죽였는가?
여러분이 보다시피 사람을 죽이면 제1군과 제2군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권리를 가로채고 이웃을 짓밟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죄가 됩니다. 여러분은 살인죄만 짓지 않고, 분노와 폭력과 교만과 불복종과 신성모독의 죄도 짓고, 또 어떤 자리나 돈주머니를 빼앗기 위하여 죽이면 탐욕의 죄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는 암시만 하고 다음 날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즉 무기나 독약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상으로도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묵상하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노예를 때리면서 꾀를 써서 그의 손안에서 죽는 것을 피하는 주인은 이중으로 죄가 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종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께 속해 있는 한 영혼입니다. 노예에게 자기 소에게도 하지 않을 대우를 하는 사람은 영원히 저주받습니다.”
예수의 눈에서는 섬광이 튀어나오고, 목소리는 우뢰와 같다. 모두가 놀라서 예수를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는 예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자는 저주받으라! 새 율법은 이런 가혹을 폐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덕을 가장하고, 하느님의 율법을 바꿔서 그들의 이익이 되도록 이용하려고만 이리저리 궁리하는 위선자들이 없었을 때에는 그것이 아직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기 때문에 하게 내버려두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하는 독사 같은 인간들, 하느님께서 증오와 혐오를 가지고 보시는 비참한 권력자들이 온 이스라엘에 침입해 있는 지금은, 내가 분명히 말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노예들은 밭고랑에서 또는 맷돌을 돌리다가 쓰러집니다. 그들은 채찍으로 맞아 뼈가 부러지거나 힘줄이 드러나 채 쓰러집니다. 노예들을 때리기 위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악마적인 가학(加虐) 취미를 변명하려고 노예들에게 거짓죄를 뒤집어씌워 비난합니다. 노예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때릴 권리를 가지기 위하여 하느님의 기적까지도 쓰이게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노예의 거룩함도 그들의 사나운 영혼을 회개시키지 못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악이 가득 차 있는 것에는 선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벨을 죽이는 이런 카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에는 흰 칠을 하고 율법의 말씀으로 뒤덮었지만 속에는 사탄의 왕이 되고 가장 교활한 악마 같은 언행이 급속도로 많아지는 더러운 무덤 같은 당신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무엇을 믿어요? 당신들은 아벨은 아담의 아들밖에 없었다고, 주께서는 사람의 노예가 아닌 사람들만을 호의적으로 보시고, 노예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제물, 즉 눈물로 양념이 된 그의 정적인 제물은 당신에게서 멀리 물리치신다고 믿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하지만 각 의인은 비록 사슬에 묶였어도, 비록 밭고랑에서나 당신들의 채찍질로 피를 흘리며 죽더라도 아벨이고, 모든 불의한 사람들, 하느님께 선물을 드려도 잘난 체하려고 드리는 모든 불의한 사람들은 카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죄로 더러워지고 피로 얼룩진 선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기적을 모독하는 자들, 사람을 모독하는 자들, 살인자들, 신성 모독자들! 나가시오! 내 앞에서 멀리 사라지시오! 이제 지긋지긋하단 말이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생각의 표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가시오!”
초라한 연단에 서 계시는 예수께서는 당신의 위엄으로 사람들을 겁나게 하신다. 한 팔을 뻗어 나가는 문을 가리키시는데, 눈은 파란 불과 같이 그 곳에 있는 죄인들을 무섭게 노려보는 것 같다. 예수의 발 아래 있던 어린 계집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엄마에게로 뛰어 간다.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 쳐다보고, 이 독설이 누구에게로 가는지를 보려고 애쓴다. 군중도 의아한 눈으로 돌아다본다.
마침내 수수께끼가 풀렸다. 저 끝쪽 문밖에 키가 큰 하층민한테 뒤에 반쯤 가려진 채 도라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반쯤 사고를 당한 모양이기 때문에 움직일 때에 그를 도와주는 하인을 한 사람 데리고 있다. 그런데 그곳 마당 가운데에 있는 그를 누가 알아보았겠는가? 그는 쉰 목소리로 감히 말을 한다.
“내게 말하는 거요? 그 말은 내게 하는 말이요?”
“그렇소, 당신더러 하는 말이요. 내 집에서 나가시오.”
“멀지 않아? 즉시요. 당신에게 내가 말했듯이 시나이산의 하느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오.”
“내게 불행이 오게 하고 땅의 해로운 짐승들이 오게 한 악의있는 사람인 당신도. 두고 봅시다. 그 때는 내가 기뻐할 거요.”
“아! 아! 저주 …” 도라는 머리가 멍해져서 중얼거리더니 쓰러진다.
“죽었습니다!” 하고 하인이 외친다. “주인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복수자이신 메시아는 찬미받으십시오!”
“아니, 내가 아니오. 영원하신 주 하느님이시오. 아무도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시오. 하인만이 주인을 돌보도록 하시오. 그의 하인인 여러분 모두 착한 마음을 가지시오. 원한으로 인하여 그의 죽음을 기뻐해서 단죄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지 마시오. 하느님과 의인 요나가 항상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나도 그들과 같이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 바랍니다. 안녕히들 가시오.”
“그런데 그 사람이 선생님의 뜻으로 죽었습니까?”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다. … 이것은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다만 하느님께 대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라. 하느님께서는 친히 복수를 하신다.”
“하지만, 그러면 선생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을 죽게 해 주십사고 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없습니까?”
“입닥쳐라! 너는 내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구나! 나는 자비이지 복수가 아니다.”
늙은 회당장이 가까이 와서 말한다.
“선생님께서는 제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해 주셔서 제 안에 빛이 생겼습니다. 선생님, 찬미받으십시오. 제 회당으로 오십시오. 가엾은 늙은이에게 선생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가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주께서 노인장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군중이 매우 천천히 물러가는 동안 모든 것이 끝난다.
93. “고운 내”에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도라의 죽음 – 평화의 오아시스 (medjugorj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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