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인들/103위 순교성인 -30일묵상

[29일]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 성녀 이 가타리나/ 성녀 이 아가타/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 성녀 김노사 로사예수 마리아'

Skyblue fiat 2025. 9. 29. 00:46

103위 순교성인과 함께하는

30일 묵상

 

[ 29일 ]

 

'예수 마리아'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 성녀 이 가타리나/ 성녀 이 아가타/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 성녀 김노사 로사


성녀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1774-1839년 66세)
과부.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는 어려서 입교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동정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가족의 반대로 교우 청년과 결혼하여 살다가, 중년에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망건을 만들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1836년 10월 한아기, 김아기 등과 함께 교회 서적을 숨겼다는 죄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고, 사형선고를 받은 후 형 집행이 연기되어 3년간 옥살이했다. 그러다 사서邪書를 읽고 마술 그림을 가지고 사도邪道를 봉행하면서 전한다는 죄목이 덧붙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얻게 되었다. (어떤 책에는 김업이를 김아기로 표기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한국 가톨릭대사전의 기록을 따랐음을 밝힌다.)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억울하게 수감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이(李) 가타리나(1783-1839년 57세)
과부. 9월 어느 날 포청에서 옥사

성녀 이 가타리나는 조 막달레나 성녀의 어머니로 시골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입교했다. 열네 살 때 교리에 밝지 못한 부모의 뜻을 따라 조씨 성을 가진 비신자 청년과 결혼하여 삼남매를 두었고, 남편을 권면하여 죽을 때 대세를 받도록 이끌었다.

1838년 말 고향에서 지방 포청에 의한 박해가 일어나자 가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빈손으로 올라와 교우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1839년 6월 큰딸 조 막달레나와 주인집 세 모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딸과 함께 한 차례 주뢰형을 받고 별다른 형벌과 고문 없이 옥에 갇혔다. 옥이 비좁고 불결하여 병을 얻어 옥살이 석 달째 되던 9월 어느 날 신병이 깊어져 숨을 거두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주님 품에 안긴 것이다.

성녀 이 가타리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이 가타리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병원에 입원한 모든 환자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이(阿) 아가타(1784-1839년 56세)
과부.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이 아가타(조이)는 이호영 성인의 누나로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열일곱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자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입교했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주하여 가난한 생활 중에서도 화평한 기색과 웃음을 잃지 않아 모범이 되었다.

1836년 2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에서 동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의 연기로 3년 이상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하면서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동생이 먼저 순교했다.

1839년 5월 24일 그도 신자들과 함께 달구지에 태워져 포청을 떠나 형장으로 가게 되었으나 끝까지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았으며, 사형 때도 달구지에서 내려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아 순교의 빛줄기를 타고 천국으로 가볍게 올라갔다.

성녀 이 아가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이 아가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모든 수감자가 자신을 성찰하며 회개하도록 빌어주소서.

 


성녀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1784-1839년 56세)
과부.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는 권진이 성녀의 어머니로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혼기에 이르러 비신자인 권진사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를 두었다. 남편은 중년에 천주교에 뜻을 두었는데,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남편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해 집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몸 붙여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딸과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어 무서운 고문과 형벌을 이겨내고, 교우 6명과 함께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영광을 안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품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 가정이 순교정신으로 가득한 가정이 되도록 은총을 빌어주소서.

 


성녀 김노사(金老沙) 로사(1784-1839년 56세)
과부.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김노사 로사는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결혼했다가 과부가 된 다음 입교하여 계명과 본분을 철저히 지켰다. 1838년 12월 권득인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여러 가지 형구(刑具)를 내보이면서 배교를 강요했을 때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대주(大主)시라 결코 배반할 수 없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일이기에 말 못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여러 번의 혹형과 고문을 견뎌냈다.

김노사는 체포될 때도 순교의 열의를 끝까지 지키려고 큰 소리로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 그는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로 순교하여 예수님과 성모님이 계신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로 들어갔다.

성녀 김노사 로사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김노사 로사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가 언제 어디서나 '예수 마리아'를 찾는 신심을 가지도록 빌어주소서.

 


'예수 마리아'

 


신자들은 급작스럽게 놀라거나 위험에 빠졌을 때 '예수 마리아'를 순간적으로 부르는데, 이는 우리 신앙 선조들이 후손에게 물려준 훌륭한 기도다.

김노사 성녀는 체포될 때 큰 소리로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 아마 예수님과 성모님이 기쁘게 응답하시어 순교 즉시 그의 영혼을 영원한 복락으로 받아들이셨을 것이다.

한두 달 옥살이도 처참했을 텐데 무려 3년 동안 옥살이를 한 김업이 성녀와 이 아가타 성녀의 고통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철두철미한 순교정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록에는 고문과 형벌보다 참기 어려운 것이 옥살이라고 했는데 3년 동안 했다면 그분들은 순교의 성인이요 인내의 성녀가 아닐 수 없다.

초인적 인내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나간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일상에서 참지 못할 일이 없다. 일상생활에서 참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이웃을 괴롭힌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고 우리도 인내의 성인 성녀가 되도록 순교성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자.

 

- 103위 순교성인과 함께하는 30일 묵상/ 박도식 엮음 / 바오로딸
  (그림자료: 의정부교구 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