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 순교성인과 함께하는
30일 묵상
[ 13일 ]
순박한 마음으로
성녀 김아기 아가타/ 성녀 우술임 수산나/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 성녀 김장금 안나/ 성녀 김성임 마르타

성녀 김아기(金阿只) 아가타 (1790-1839년 50세)
과부.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김아기 아가타는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결혼하여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친정 언니의 가르침을 받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기억력이 나빠 12단(+二端) 기도문도 외우지 못했지만 믿음이 지극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자세로 열심히 살았다.
1836년 9월 김업이와 한아기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감춘 죄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포장이 천주교를 믿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물었을 때 “저는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교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어려운 형벌을 받고 형조로 이송되어 감옥에 들어가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타가 왔군.” 하며 반가이 맞았다.
3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옥중 생활을 하면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하여 예수님과 성모님의 아늑한 품에 영원히 안겼다.
(몇몇 책에는 김아기 아가타의 이름이 김업이 아가타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한국가톨릭대사전을 따라 김아기 아가타로 표기했다.)
성녀 김아기 아가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김아기 아가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교우들이 기도 생활에 충실하도록 빌어주소서.

성녀 우술임(禹述任) 수산나(1803-1846년 44세)
과부. 9월 20일 포청 옥에서 교수
성녀 우술임 수산나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 인천에 사는 교우 청년과 결혼해 남편의 가르침으로 입교했다.
1828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해산달이 가까워 두달 동안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는데, 그때 겪은 형벌과 고문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남편을 여의고 1841년 서울에 올라와 교우들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과부 이간난의 집으로 와 서로 돕고 살면서 열심히 계명을 지켰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김 신부의 처소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이 이간난의 집을 거쳐 새집으로 피신했는데 그때 이간난도 함께 피신했다. 혼자 남은 우술임은 이간난의 집을 지키다가 7월 11일 체포되어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
성녀 우술임 수산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우술임 수산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교우들이 육체적 고통을 잘 극복하도록 빌어주소서.

성녀 한아기(韓阿只) 바르바라(1792-1839년 48세)
과부.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웠는데 자라면서 세속 일에 마음을 쏟아 어머니의 권면을 무시하고 비신자와 결혼했다. 그러던 중 김업이 막달레나를 만나 열렬한 회두권고(回頭勸告: 다시 돌아올 것을 배교한 사람에게 권함)를 받아 다시 교리를 배우면서 믿음에 눈뜨게 되었다.
서른 살 되던 해,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잃고 친정으로 돌아와 더욱 깊은 신앙생활을 했다. 1836년 10월 김업이·김아기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어 흑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포교에게 천주십계를 설명하는 여유를 보였다.
3년 동안 옥살이를 한 다음,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영원하신 하느님의 어여쁜 아기가 되어 변함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교회 내 모든 쉬는 교우의 회개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김장금(金長金) 안나(1789-1839년 51세)
과부.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김장금 안나는 태중교우로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중년에 과부가 되어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이웃에 사는 이광렬李光烈 가족과 매우 화목하게 지내 그 평판이 교우들 사이에 널리 퍼지도록 모범적 생활을 했다.
1839년 4월 7일 이광렬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교우 7명과 함께 참수로 순교하여, 두 팔을 벌리고 웃으시는 주님의 영원한 품에 안겼다.
성녀 김장금 안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김장금 안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교우들이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며 서로 돕도록 빌어주소서.

성녀 김성임(金成任) 마르타(1787-1839년 53세)
과부.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성녀 김성임 마르타는 경기도 부평에서 태어났다. 결혼에 실패한 후 서울로 올라와 시각장애인 점쟁이와 재혼해 살던 중 천주교를 알게 되어 계명을 성실히 지키며 살았다. 재혼한 남편이 죽자 살아갈 길이 없어 교우 집을 전전하며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가운데 인내와 극기를 배우며 신앙심을 키워 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이매임의 집에서 살던 그는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흑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순교할 것을 결심하고는 4월 11일 이매임·허계임·이정희·이영희·김루시아 등과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가서 자수했다. 포졸들이 믿지 않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묵주를 보여주면서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시켰고 곧 결박되어 옥에 갇혔다.
포청에서 다섯 번의 주뢰형을 받아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나 견뎌냈다. 형조에서 다시 한 번 형문을 이겨낸 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집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성녀 김성임 마르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김성임 마르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시여, 모든 이가 장애인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도록 빌어주소서.
순박한 마음으로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김아기 아가타 성녀, 평생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 우술임 성녀, 처음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늦게 믿음의 눈을 뜬 한아기 성녀,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며 모범을 보여준 김장금 성녀, 인내와 극기로 살아온 김성임 성녀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분들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주어진 환경이나 자신의 위치, 교리 지식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이러한 조건은 부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인의 마음가짐과 노력에 달려 있다. 이를 입증한 분들이 오늘 우리가 만난 성녀들이다.
예수 마리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람이 순교했다는 사실 앞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힘과 그 신비로운 섭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교리 지식이 많다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일깨우는 본보기가 김아기 성녀가 아닌가 싶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박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순교자 가운데 박식한 분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대부분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었으나 그분들의 신앙은 누구보다 깊고 훌륭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반성할 계기를 마련하고 무엇보다 굳은 신앙을 바탕으로 교리를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자신의 교리 지식을 반성하고 알고 있는 바를 나누며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지, 얼마나 교리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냉정하게 반성해 보아야겠다.
- 103위 순교성인과 함께하는 30일 묵상/ 박도식 엮음 / 바오로딸
(그림자료: 의정부교구 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