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공생활 첫 해
3. 예수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의 말씀.
“네가 1월 30일에 쓴 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나’라는 말과 ‘만일’이라는 말을 내놓을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네 대신 대답하겠다. 너는 이러한 말들을 썼다. ‘...내가 이렇게 볼 때에는 내 육체적인 힘, 특히 심장의 힘이 몹시 흩어진다.’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는 ‘불가능하다는 박사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겪는 일이 인간적이라는 증거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항상 힘을 마련해 주지, 절대로 약함을 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하고. 그렇다면 왜 탈혼상태에 빠진 위대한 사람들이 탈혼 중에는 내적인 상처와 큰 출혈의 결과인 고통과 물질의 무게를 없앰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그들을 육체적으로까지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큰 행복을 누리다가, 탈혼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영혼이 그들에게서 떠나갔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기절하여 땅에 쓰러져버리는지 그들은 내게 설명해 주기 바란다. 또 내 여종 데레사(*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고뇌와 같이, 내 성녀 젬마의 고뇌와 같이 또 내 사랑과 그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내 수난을 몸소 겪을 자격을 얻었던 다른 영혼들의 고뇌와 같이 내 고뇌를 되풀이 하는 더할 수 없이 큰 고뇌를 몇 시간 겪고 난 그 사람들이 왜 가장 건강한 사람들도 가지지 못한 육체적인 기운과 균형을 도로 얻는지 또는 얻었는지도 설명해 주기 바란다.
나는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주인이다. 나는 그러한 내 종들을 내 마음대로, 내 손 안에서 장난감이 되는 예쁜 실처럼 사용한다. 네게 있어서는 기적은 기적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다. 네 지금의 육체적인 상태, 기적적으로 연장되는 그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극히 기초적인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 될 허탈 상태에 있으면서 그 격정을 느끼고 그 지복에 이르는데도 그것으로 인하여 죽지 않게 된다는 그것이다. 기적은 내가 불러주는 것이나 다른 영들이 그들의 하늘나라 말을 가져다주는 것을 네가 적은 시간에 네게서 솟구친 것과 같은 생명력이 지금 이 시간에 네게서 솟구쳐 오르는 데 있다. 기적은 네게 남아 있던 글을 쓸 수 있는 생명력이 기쁨으로 인하여 다 소멸한 후에 이렇게 갑자기 기운을 다시 얻는데 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내가 네게 옮겨 넣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강기슭으로 흘러들어가 적셔 주는 물과 같이 내게서 말라버린 네 정맥으로 들어가는 피와 같은 것이다. 강기슭은 물에 잠겨 있는 동안은 젖어 있다가 다시 말라서 다른 물이 올 때까지는 마른 채로 있다. 그것은 마치 새로 수혈을 받을 때까지 네게 있는 내 피를 뽑아내는 수술과 같은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내가 계획하는 것을 위하여 내가 원하기 때문에 고뇌 중에 일하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가련한 인간이다. 너는 다른 공로가 없다. 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원인이 되고 싶어하는 갈망밖에는. 인간적으로 말하면 벌써 오래 전에 네 존재가 죽음 속에서 해체되어야 하였을 터인데 네가 그대로 살아 있고, 또 내가 호의를 가지고 네 생명을 보호하여 주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것이다. 내가 관조의 세계에서 너를 안고 다니지 않게 되고, 네게 말을 하지 않게 되면, 네가 말하듯이 “넝마조각”으로 되돌아 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네 경우에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나 무슨 일이든지 내가 원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증거가 된다. 만일 내가 같은 의지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네 병을 고쳐줄 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내 사랑과 내 호의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내 종들의 임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면 그들의 생명을 항상 보존해 주었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행복한 생활은 절대로 마련해 주지 않았다고. 그것은 내 임무들은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이고, 한편 내 종들도 내 소원과 같은 소원, 즉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겠다는 소원밖에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운이 흩어져 없어진다”는 말을 하지 말고, “인자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의향과 내 기쁨을 위하여 내 약함을 사라지게 하셨었는데, 지금 나는 인자하신 그분이 내가 그렇게 되기를 허락하신 상태로, 즉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의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는 상태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자 이제는 사랑 가득한 순종으로 계속 하자.
같은 날, 44년 2월 3일 저녁에.
사람도 살지 않고 초목도 없는 벌판이 보인다. 곡식을 가꾼 밭은 없고, 흙이 좀 깊이가 있고 덜 메마른 곳에는 식물의 집단들처럼 드문드문 난 몇 포기의 풀들이 여기저기 덤불을 이루고 있다. 이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 내 오른편에 있으며, 북쪽이 내 등뒤에 있으니까 내가 볼 때에는 남쪽으로 뻗어나갔다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 대신 왼쪽에는 둑이 꽤 낮은 강이 보이는데, 역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천천히 흘러 가고 있다. 물이 매우 천천히 흐르는 것으로 보아 그 하상(河床)이 많이 가파르지 않고, 이 강은 벌판이 일종의 함몰을 이룬 위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흐름은 겨우 물이 괴어서 늪을 이루는 것을 막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물이 깊지도 않다. 이곳은 물밑이 보이는 곳이다. 깊이가 1미터, 기껏해야 1.5미터 이상도 될 것 같지 않다. 너비는 상 미니아또 -엠뽈리(S. Miniato-Empoli) 근처의 아르노(Arno)강 정도로 20미터쯤 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관찰력이 좋지 않으니까 내가 말한 것은 어림잡아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강기슭 가까이에 있는 물은 약간 초록색을 띤 하늘색이며 강기슭의 축축한 땅에는 초록색 풀무더기가 띠 모양으로 자라고 있어, 앞으로 한없이 계속되는 돌과 모래로 된 그 우중충한 벌판으로 피로한 눈을 달래준다.
내가 무엇에 주의해야 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내게 설명하여 주는 것을 듣는다고 말한 그 내적인 목소리는 내 앞에 보이는 것이 요르단강 계곡이라고 알려 주었다. 내가 이것을 계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강이 흐르는 곳을 흔히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곡이라면 야산을 필요조건으로 예상하게 되는데, 이 근처에는 야산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이 명칭을 붙이는 것은 정확하지 못한 것 같다. 요컨대 나는 요르단강 근처에 있고, 내 오른쪽에 보이는 황량한 벌판은 유다의 사막이다. 사람이 살지 않고 사람이 이룩한 일의 흔적이 없는 이 곳을 가리키는 데 사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옳겠지마는, 우리가 사막에 대하여 가지는 관념에는 덜 어울린다. 여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사막의 모래언덕이 없고, 다만 홍수가 진 후에 충적지가 그런 것과 같이 돌과 파편 따위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나무없는 벌거숭이 땅이 있을 뿐이다.
먼 곳에는 야산들이 있다. 그리고 요르단강 근처에 크나큰 평화가 깃들어 있고, 트라시메나(Trasimena) 호수가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어떤 것, 일반 풍경을 초월하는 어떤 분위기가 느껴진다.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것이나 하늘의 목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곳이다. 내가 느끼는 것을 잘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정신에 말하는 어떤 곳에 내가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이곳에는 – 내편에서 보기에 요르단강의 우안(右岸)를 끼고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많은 남자들이 있고 옷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람들은 서민층의 사람들 같고, 어떤 사람들은 부자를 같은데, 그런 사람이 꽤 많으며, 여러 사람이 술과 선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바리사이파 사람들 같다.
한가운데에는 한 남자가 바위 위에 서 있는데, 그 사람을 처음 보지만 세례자로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가 군중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그의 설교에는 부드러운 맛이 별로 없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면 이 분격한 설교자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까?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는 벼락이나 눈사태나 지진 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연설과 몸짓이 과격하고 준엄하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내림에 대하여 말하며, 청중에게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치우고 그들의 생각을 일으켜서 마음을 준비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격렬하고 엄격한 화법이다. 선구자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예수와 같은 섬세한 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 상처들을 노출시키고 파헤치고, 무자비하게 잘라내는 의사이다.
내가 요한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 그의 말은 복음사가들이 쓴 그 말이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은 급류와 같은 연설로 쏟아져 나온다 – 요르단강을 따라서 풀이 나고 그늘진 기슭을 끼고 가는 오솔길을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이 나아가시는 것이 보인다. 이 시골길, 아니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솔길은 하상이 높아져서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지점에 가기 위하여 여러 해, 여러 세기를 다닌 대상들과 여행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오솔길은 강 건너편으로 계속되어 건너편 기슭의 초록빛 속으로 사라진다.
예수는 혼자이시다.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아가시어 요한의 뒤에 다다른다. 예수께서는 광야의 속죄자의 우뢰 같은 목소리를 들으시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신다. 마치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아 메시아의 내림을 위한 정화를 준비하기 위하여 요한에게로 오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과 같다. 예수께서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입으신 옷으로는 서민층의 사람 같으시고, 아름다운 얼굴모습으로는 귀족으로 보이신다. 그러나 그분을 군중과 구별지어 주는 하느님의 표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요한은 어떤 독특한 영적인 발산을 느끼는 것 같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그 발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즉시 확인한다. 요한은 강단처럼 쓰던 바위에서 성큼 내려와, 한무리의 사람들에게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고는 어떤 나무줄기에 의지하고 계신 예수를 향하여 거리낌 없는 걸음걸이로 간다.
예수와 요한은 잠시 똑바로 바라보신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다정스러운 파란 눈으로 보시고, 요한은 대단히 검고 빛이 탁탁 튀는 듯한 엄격한 눈으로 바라본다. 두 분은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반대의 사람이시다. 두 분이 다 키가 크다 – 이것이 그분들의 유일한 같은 점이다 –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가 다르다. 예수는 금발이고 긴 머리를 잘 빗었으며, 살갗은 상아색같이 희며, 옷은 수수하지만 위엄이 있다. 요한은 검은 머리가 덥수룩하게 어깨에까지 평평하게 덮였고 층층으로 잘랐으며, 바짝 깎은 수염이 거의 얼굴 전체를 덮고 있으나, 그래도 단식으로 인하여 쑥 들어간 뺨을 숨기지는 못하며, 열을 뿜는 듯한 검은 눈에, 피부는 태양과 악천후로 인하여 구리빛으로 그을렸고 털이 빽빽하게 났으며, 반나(半裸)의 몸에 가죽끈으로 허리에 졸라 맨 염소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그 옷은 그의 상체를 가리고 겨우 야윈 옆구리 아래 까지만 내려오며, 오른쪽에는 갈비대가 드러나 보이는데, 갈비대에 덮인 것이라고는 오직 바람에 그을어 구리빛깔이 된 피부가 있을 뿐이다. 마주 서 있으니 미개인과 천사와 같다.
요한은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 예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나서 부르짖는다.
“여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오셨다. 어떻게 주께서 제게로 오실 수가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조용히 대답하신다.
“회개의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요.”
“절대로 안됩니다. 주님, 제가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주께로 가야 하는데, 주께서 제게로 오시다니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한이 당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에 한 손을 얹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신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시오. 그래서 모든 정의가 실현되고, 당신의 의식이 사람들을 더 높은 신비로 향하게 하고 ‘희생자’가 이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이 전해지게 하시오.”
요한은 눈물로 인하여 부드러워진 눈으로 예수를 지켜보고 앞장을 서서 강기슭을 향하여 간다. 예수께서는 겉옷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을 벗으시고 일종의 팬츠만을 입으신 채 벌써 요한이 들어가 있는 물로 내려가신다. 요한은 허리띠에 매달린 잔 같은 것으로 강물을 떠서 예수의 머리에 부어 세례를 준다. 그 잔 같은 것은 조개 껍데기나 박을 반으로 쪼개서 속을 파내고 말린 것 같다.
예수는 글자 그대로 어린 양이시다. 그 하얀 살갗으로도, 얼굴모습의 정숙함으로도, 그 눈길의 부드러움으로도 어린 양이시다.
예수께서 강변으로 다시 올라오셔서 옷을 입으신 다음 기도와 묵상에 잠겨 계신 동안 요한은 그분을 군중에게 가리키며 그는 하느님의 성령이 일러주시고 구세주를 틀림없이 지적하는 표로 그분을 알아보았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여 강가의 초록빛 바탕에 뚜렷이 나타나는 빛나는 그 얼굴밖에는 보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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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순례>제 15시간: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과 광야에서 http://cafe.daum.net/DivineVolition/APZD/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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