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시

I. 복음 준비 72. 숨은 생활에 대한 결론으로

Skyblue fiat 2016. 1. 21. 13:03

 

I. 복음 준비

 

72. 숨은 생활에 대한 결론으로

 


  성모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이 공책들을 넘겨주기 전에 내 축복을 여기에 덧붙여 준다. 이제는 너희가 참을성을 좀 가지면 내 예수의 사적인 생활 전체를 완전히 알 수 있다. 영보에서부터 예수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자렛을 떠나는 때까지 너희는 대담들 뿐 아니라, 예수가 가정 생활할 때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해설도 얻게 된다.”

 

  내 아들의 처음 시기인,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는 전부가 복음서들이 서술하는 그의 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짤막한 일화들에 한정된다. 복음서에서는 내 아들이 스승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고,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낮추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런데도 여기서, 평범한 생활의 허탈 속에서 기적을 행한다. 그는 기적을 내 안에서 행한다. 내 태중에서 형성되고 있는 아들과의 접촉으로 내 영혼이 완덕으로 이끌려 가는 것을 느끼는 나 안에서 말이다. 내 아들은 즈가리야의 집에서 세례자를 거룩하게 하고, 엘리사벳의 해산을 쉽게 해 주고, 즈가리야에게 말과 믿음을 돌려줌으로써 기적을 행한다. 요셉에게서 기적을 행한다. 즉 비록 의인이기는 하였지만 그의 능력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높은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도록 그의 정신을 열어 줌으로써 행한다. 그래서 나 다음으로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그 하느님의 은혜를 가장 기뻐한 사람은 요셉이었다. 요셉이 내 집에 오는 때부터 에집트로 피난하는 때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면에서 그가 어떤 길을 걸어갔는지에 주의하여라.


   처음에는 요셉이 다만 그 시대의 의인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계속적인 단계를 통하여 그리스도 시대의 의인이 되었다. 요셉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었고, 그 믿음에 조용히 빠져든다.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할 때에 ‘어떻게 할까?’하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여기서는 인간적인 걱정과 인간적인 근심을 가진 인간이 있는 그대로 온통 드러난다. 그러다가 희망을 가지게 된다. 동굴에서 예수가 태어나기 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은 좀 더 나을거야’하고, 오고 있는 중인 예수는 벌써 이 희망과 더불어 그에게 용기를 준다. 그런데 희망은 하느님의 선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가 예수와의 접촉으로 거룩하게 되자 그는 희망에서 과감성으로 옮아간다. 요셉은 내게 대하여 품고 있던 존경 때문에 항상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물질적인 일과 좀 더 높은 차원의. 일도 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는 가장으로서 결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하느님인 아들과 여러 달 동안을 같이 삶으로써 성덕이 가득찬 후, 피난의 어려운 시간에는 걱정하는 나를 그는 격려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기를 가지고 있을 터이니까 여전히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될거요’ 하고.


   내 예수는 목자들에게 은총의 기적을 행한다. 천사는 나와 잠깐 만난 것으로 인하여 은총에 대한 경향을 미리 갖게 된 목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은총이 그를 영원히 구원하도록 은총이 있는 쪽으로 인도한다. 내 아들은 지나는 곳마다 피난을 하면서나 보잘 것 없는 나자렛 고향에 돌아와서나 늘 기적을 행한다. 그가 있는 곳에서 성덕이 마치 기름얼룩이 린네르천에 번지듯이 번졌고, 공기가 꽃향기로 향기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접근해서 그를 만지는 사람은, 마귀가 아닌 이상, 성인이 되겠다는 걱정스러운 소원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었다.


   이 걱정이 있는 곳에서는 이 걱정이 영원한 생명의 뿌리가 된다. 그것은 착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착하게 되고, 착함은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들의 거룩한 인성의 여러 시기를 알려주는 자세한 설명들을 통하여, 그의 일생의 시초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거룩한 인성을 상기하게 되었다.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완전한 묘사가 될 하나의 전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네 영적 지도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면). 우리는 그것을 전부 한꺼번에 너희들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것과 같이 진행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네 이익을 위하여, 네게 하여 준 설명 하나하나가 네가 입어야 하였던 상처에 대한 약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네가 별안간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그 약을 미리 주었다.


   우박이 쏟아질 때에 그것을 피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폭풍우는 정신적인 물 속에 잠겨 있는 인류를 수면으로 떠오르게 하지만, 너희들의 마음에 떨어진 초자연적인 가르침의 씨앗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한다. 그 씨앗은 바로 이 폭풍우의 때를 기다렸다가 표면으로 다시 떠올라서 ‘우리도 여기 있다’하고 말할 것이다.

 

내 사랑하는 딸아, 게다가(환상이 계속되는 순서에 대하여) 친절과 동시에 섭리적인 신중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현시대의 짓누름 밑에서 네가 어떻게 어떤 환상을 볼 수 있고 어떤 설명을 들을 수 있었겠느냐? 너는 그로 인하여 ‘대변자’라는 네 사명을 다할 수 없게 될 정도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우리는 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런 것을 우선 네게 알려주었는데, 친절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우리는 네 고통과 잘 조화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그 고통을 한층 더하게 하였을 환상을 보여 주고 대화를 들려주는 것을 피하였다. 마리아야, 우리는 잔인하지 않다. 우리는 항상 너희를 격려하도록 행동하지, 너희를 공포에 빠뜨리고 너희들의 고통을 더하게 하도록 행동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우리를 탁 믿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천상 선물을 가지고 너희들의 영을 안심시키러 오게 하려면, 너희가 요셉과 같이 ‘예수님이 내게 남아 계시면,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인간적인 선물과 위로를 네게 약속하지 않는다. 내가 네게 약속하는 것은 요셉이 받았던 것과 같은 위로, 즉 초자연적인 위로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다.

 

  동방 박사들의 선물은 불쌍한 피난자의 목을 꽉 죄는 고리대금업자들하고, 집을 마련하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와 필요불가결한 식량을 장만하는 데 번개불 같이 빨리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거리를 얻을 때까지는 그 방편 밖에 없었다.


   히브리인 공동체는 항상 동족들을 도와줄 채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에집트에서 만난 공동체는 박해당한 망명자들로만, 그러니까 그들과 합류하게 된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졌었다. 예수를 위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의 예수를 위하여 남겨두기를 원하여 에집트에서 자리잡는 비용에서 건져냈던 돈의 일부분은 귀국에 대비해 두어야 했었고, 우리가 돌아와서 나자렛의 집과 작업장을 수선하는 데 충분할까 말까 하였다. 시대는 변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탐욕은 항상 마찬가지여서, 남의 곤경을 이용하여 그를 부당하게 울근다.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데리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물질적인 재산이 마련되지는 않았다. 너희중의 많은 사람은 예수와 겨우 조금 결합하여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이 물질적인 재산을 열망한다. 그들은 예수가 ‘영적인 재물을 찾아라’ 하고 말한 것을 잊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덤으로 너희에게 올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새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도 양식을 마련해 주신다. 그것은 너희들의 영혼에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육체의 뒷받침이 필요한 만큼 너희가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우선 그분의 은총을 청하여라. 우선 너희 영에 필요한 것을 청하여라. 나머지는 덤으로 주실 것이다. 요셉은 예수와의 결합에서, 인간적으로 말해서는, 난처함과 피로와 박해와 굶주림을 받았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에게만 애착심을 가졌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영적인 평화와 초자연적인 기쁨으로 변하였다. 나는 내 남편이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를 가지고 있으니까 여전히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될거요’ 하고 말하게끔 되었을 그 상태에 너희들을 데려가고 싶다.

 

  “마음이 상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정신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나도 안다. 생명이 다 타버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마리아야 ! ‥‥ 네가 예수에게 속해 있느냐? 예수에게 속해 있기를 원하느냐? 예수가 죽은 것과 같이 죽도록?

나에게 지극히 소중한 내 딸아. 울어라, 그러나 언제까지나 용감하고 꾸준하여라.

순교는 고통의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가 형벌을 참아 받는 꾸준함에 있는 것이다. 순교는 무기로 올 수 있다. 그러나 지향하는 목적이 같으면 정신적인 고통으로도 올 수가 있다.

너는 네게 참을성을 주는 내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참아 견딘다. 네가 형제들을 위하여 하는 일을 그들의 구원을 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한다. 그것이 네 순교이다. 거기에 충실하여라. 모든 것을 너 혼자서 하기를 원치 않기로 동의하여라. 속박이 너무 강해서 눈물을 참으면서 행동할 힘과 네 본성을 억제할 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반항하지 않고 그저 참아 받기만 하면 된다. 예수에게 ‘도와 주세요!’ 하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가 네 안에서 해줄 것이다.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항상 그의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에게서 나오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러면 고통이 지독히 커서 네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더라도, 너는 여전히 예수 안에 있을 것이다.


   네게 축복한다. 나와 함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하고 말하여라. 이것이 하늘나라에서 네가 이 말을 할 때까지 항상 네 외침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은총이 항상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