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29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12

 

 

 

 

 

               다음 노래의 설명

 

     1. 참으로 이 영혼은 온갖 것을 잃은 자가 되어 오직 사랑 안에서만 얻어진 자가 되었다. 그 정신은 이미 다른 것에 관련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활동생활이나 다른 외적 수업에 관한 일에 힘이 빠지고 신랑이 필요하다고 한 단 한가지 일에 완전히 종사하는 자가 되었다.

     이 필요한 한 가지란 하느님께 관심과 사랑의 끊임없는 실천이다.(루가 10, 42) 이것을 주님은 평가하고 존중해 주심은 대단하셔서 마르타가 마리아를 주님께 드릴 봉사 때문에 다른 활동적 행위에 끌어들여 주님의 발치에서 떠나게 하려 했을 적에 마르타를 나무라셨을 정도이다. 마르타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서 달콤하게 쉬고 있으므로 자신은 많은 것을 하고 마리아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여겼는데 실은 온전히 반대였다. 왜냐하면 사랑 이상 훌륭하고 필요한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가의 신랑은 신부를 변호하여 예루살렘의 처녀들이란 상징으로 보여주는 온 세계 피조물에게 신부의 사랑의 영적 쉼을 방해 않도록 스스로 일어나기까지는 깨우지 말도록 다른 일 때문에 잠재우지 말라고 간청한다.(3, 5)

 

     2. 여기서 다음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그것은 영혼이 사랑의 일치의 이 경지에 다다르기 전에는 활동생활과 관상생활 양 방면에서 사랑을 수련할 필요가 있는데 일단 거기에 이르면 가령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가 매우 중요한 일일지라도 하느님께 쏟는 사랑겨운 집중에서 한 순간이라도 빗나가게 할 수 있는 외적 행위나 수업에 관련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순수한 사랑은 비록 아무리 적더라도 다른 모든 행위를 합친 것보다 하느님 눈에는 인간의 눈에도 귀중하고 겉으로는 아무 것도 안하듯이 보여도 성 교회를 위해 한층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선교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그 뒤에도 매우 유익하게 일할 수 있었음에도 그 신랑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성 교회의 이득을 위한 커다란 소망에 불타서 이 사랑에 진실히 몰두하기 위해 30년간 황야에서 숨었다. 마리아는 이 방법으로 다른 모든 방법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이 사랑은 아주 희소해도 성 교회를 위해 매우 유익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어느 영혼이 이 고독한 사랑의 정도를 다소라도 지닌 경우 비록 매우 중요한 일일지라도 또 아무리 짧은 시간일지라도 이 영혼을 바깥 활동에 종사하게 하면 이 영혼에게도 또 성 교회에도 커다란 손해를 끼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선 피조물들에게 이 영혼을 그 사랑의 잠에서 깨우지 말도록 청하시는 정도이니 이 청을 감히 거스린다면 꾸중 받지 않을리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사랑의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무제한의 활동에 종사하여 그 선교나 외적 행위로 전 세계를 감싸려고 상상하는 이들이여, 반성하기 바란다. 만일 그들이 활동에 바친 시간의 반을 기도 속에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데 쓴다면 비록 지금 우리가 말하는 높은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더라도 - 그들이 주는 좋은 모범은 별도로 하더라도 - 성 교회를 위해 훨씬 유익한 자가 하느님이 마음에 한층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영락없이 그들은 단 하나의 행위로 천가지 행위보다도 더욱 많은 일을 하고 게다가 노고는 보다 적을 것이다. 그들의 기도가 그들에게 은총을 얻게 하고 필요한 영적 힘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므로 기도가 없으면 모두가 쇠망치로 두드리는 것과 같아서 거의 아무 것도 생기지 않고 혹은 전연 아무 것도 생기지 못하고 때로는 선보다도 악을 생기게 한다. 소금이 맛을 잃지 않도록 하느님께선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겉보기에 뭔가 좋은 결과가 생겼다고 가정하자. 사실 실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은 하느님의 능력으로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4. 아! 이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쓸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에 관하여 내가 말한 것은 다음 노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혼은 거기서 자기의 거룩한 한가함을 비난하고 모두를 활동으로 돌리려 하고 외적으로 사람의 눈에 띄는 것만 존중하고 은혜의 샘물, 온갖 과일을 맺게 한 숨은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대답한다.

 

 

 

 

                                제 29 노래

 

                     멧갓에서 오는 나를

                     보지도 찾지도 못하거든

                     난 스러졌다고 말들을 하소

                     사랑을 못 이겨 쫓아가면서

                     잃고도 벌었다 일러들 주소

 

 

             해 설

 

     5. 이 노래 가운데서 영혼은 세속 사람들의 암암리에 하는 비난에 대답한다. 사실 세속 사람들은 흔히들 하느님께 진실히 몸 바친 사람들은 너무나 괴상하고 그들이 세상을 피한 행위는 지나치다면서 더욱 중요한 것을 위해 무익한 자가 되어 세상이 존중하고 높이 평가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고 한다.

     영혼은 이러한 비난에 멋지게 대답한다. 영혼은 이런 것을 비롯하여 세속이 자신에게 던지는 모든 반대에 용감히 맞선다. 보다 활달한 신적 사랑의 경지에 다다랐으므로 다른 것은 다 업신여긴다. 그뿐 아니다. 이 영혼은 다시 이번 노래에서 명백히 선언한 것 같이 이러한 생활을 하게 된 것과 애인 때문에 세상과 자신을 위해 잃은 자가 된 것을 소리 높여 자랑한다. 영혼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만일 세상에서 전에 하던 교제나 오락 가운데서 이미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거들랑 그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자 떠나간 자라 해야하고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는 애인에게 대한 사랑에 타 이 애인을 찾기 위해 스스로 자진한 이 손실을 행복으로 헤아리고 있음을 세속은 인정하도록 그리고 이 손실은 이득이며 우매도 오류도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손실에서 자기가 다시 찾았다는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 자진하여 자신을 잃었다는 것을 잘라 말한다.

 

 

 

              멧같에서 오는 나를

              보지도 찾지도 못하거든

 

     6. 멧같(일어 역 : 광장)은 흔히는 마을의 공유 장소를 말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에 흥겨워하고 휴식도 하는데 여기서 목동들은 그 가축에 풀을 먹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영혼은 여기서 광장이란 이름으로 세속을 지칭하고 세속 사람들은 그 곳에서 기분도 풀고 교제하면서 욕구라는 그들의 가축에게 양식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영혼은 세속 사람들에게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기 전처럼 거기에서 보이지 않고 찾지 못하겠거든 자기는 이토록 시시한 일 때문에는 잃은 자로 간주하고 또한 그렇게 말해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난 스러졌다고 말들을 하소

              (일어 역 : 난 잃었다고 . . . )

 

     7.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위해 하는 행동을 세속 앞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비록 세상 모두가 그것을 비난하더라도 수치스러워서 그것을 숨기려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아들을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는 하느님의 아들도 또한 성 루가(9, 26)를 통해서 말씀하심 같이 그를 아버지 앞에서 선언하기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받은 용기에 가득 찬 영혼은 자기가 이러한 것을 애인을 위해 책임을 다하고 세속 모든 것에서 자신을 잃은 자로 헤아려짐을 명예로 여긴다. 그러므로 “난 잃었다고 말들을 하소” 라고 한다.

 

     8. 뭔가를 할 적에 이토록 대담스러운 결의를 갖고 있는 영적 사람은 드물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영적 일에 몰두하면서 그 길에 큰 진보를 했다고까지 생각하는데 세상이라든지 천성에서 오는 만족을 철저히 버리지 못했기에 남이 뭐라 할까 자기가 어떻게 보일까 등에 마음을 쓰지 않고 순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완전한 행위를 다하기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난 잃었다. 말들을 하소”라고는 아예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정에 관하여 사람들이 평판을 두려워 그 행위를 통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선언하기를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진실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는 아니다.

 

 

 

              사랑을 못 이겨 쫓아가면서

 

     9.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올라 덕을 실천 하면서란 뜻이다.

 

 

 

              잃고도 벌었다 일러들 주소

 

     10. 영혼은 복음서의 신랑의 말씀 즉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 . . 다른 편을 업신여길 것입니다.”(마태 6, 24)를 알기에 하느님을 업신여기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 즉 온갖 것과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런 것을 모두 포기했다고 한다. 참으로 사랑에 타는 이는 사랑의 대상 안에서 자신을 더 잘 발견하기 위해서 다른 일체를 포기한다. 그 때문에 영혼은 여기서 자기를 잃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원해서 자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 방식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것인데 애인만을 위해 어떠한 것에서도 자기를 전연 문제삼지 않고 아무런 이익도 찾지 않고 아무런 보수도 바라지 않고 자기를 애인에게 내어 드리고 자신을 위해선 하나도 얻으려고도 않고 자신에게는 자기를 잃은 자로 헤아린다.

     둘째는 모든 것에 대해 즉 애인에 관한 일밖에는 어떤 일이든지 문제삼지 않는다. 이야말로 진실히 자기를 잃는 것이고 애인 얻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11. 하느님의 사랑에 열중한 영혼이란 이런 것이다. 이러한 영혼은 아무런 이득도 보상도 원치 않고 오직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의지로 모든 것과 자기 자신을 잃기를 원하고 그것을 자기의 이득으로 여긴다. 성 바울로는 바로 이 뜻을 밝혀준다.(필립 1, 21)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에 관해서 죽는 것인데 이것은 나의 이득이라는 뜻이다.

     그 때문에 영혼은 “자신을 벌었다.”고 한 것이다. 사실 자기를 잃는 것을 모르는 자는 자기를 벌지 못한다. 그는 복음서에서 주님이 다음 말씀대로 자기를 잃을 것이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 25) 이 구절을 보다 영적으로 이 문제에 더욱 알맞은 뜻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영혼이 영적 길에서 하느님과의 통교에 자연적 방법이나 방식을 떠나고 고찰이나 상상 느낌이나 그 밖의 감각이나 피조물에서 오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기를 그만두고 그런 것을 모두 초월하여 자기의 방법이나 양식을 온통 치워버리고 오로지 신앙과 사랑으로 하느님과 사귀고 하느님을 즐기게 되면 이 영혼은 참으로 하느님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영혼이 하느님이 아닌 모두와 자기 자신에 대해 정말 자기를 잃어버린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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