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부터 가난함에 대하여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여러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자신을 미워하고
빰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 때문에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위에서 상처 받고 화를 내는 것은 좋은 대우와 특별한 배려와 인정, 존경과 주목 등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됩니다. 이 모두를 마치 자기 소유 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자존심이 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과 행동, 태도 등으로 나에게 존경을 표하고, 나의 내적 외적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인격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기 가치를 몰라준다고 화를 내고 인격 손상이며 치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격적 모욕과 멸시를 잊어버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향해 공격적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상처 받은 감정은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응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 인 것을 잊어버리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의 것은 악습과 죄악뿐이며, 또한 내 의지를 나의 것으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것으로 즉, 내 뜻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시어 세상에서 가장 큰 불의를 달게 받으시고 오해와 멸시를 받고 당신이 벗이라 부르며 사랑하신 제자로부터 배반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자아포기, 존경과 인정받을 권리의 포기 같은 영적가난(geistliche Armut)을 통하여 죄를 이기셨습니다.
순명이라는 가난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고 당신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죄만 못마땅해 하고 죄인을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폭 넓은 가난(alles umfassende Armut im Geiste)은 아무 소유 없이 사는 삶(das Leben ohne Eigentums)의 토양에서 솟아올라 활짝 피어납니다.
물질에서의 가난”(Arm an Erdengut sein)은 가난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여러 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 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빰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오히려 부당한 그 일을 조용하고도 평온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가난에서 우러나오는 힘입니다. 가난은 우리의 자애심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의, 소유욕과 권리 주장에서 파생되는 모든 영역에서의 포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지향만이라도 인정받고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사랑받지 못하거나 다른 이들의 관심 밖에 있다고 느끼면 즉시 내적 고요와 영혼의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그는 이렇게 철저한 내적 가난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빈손과 빈 마음을 자기변명과 자기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는 일로 채우려 합니다.
그는 이웃과의 나눔을 거부하고 공동체에서 유리되어 혼자만의 고독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합니다. 자신의 어떤 구상과 계획을 꼭 움켜쥐고 포기하려 들지 않으며 입견을 바꾸는 법이 없습니다.
그의 굳고 얼어붙은 마음은 처하는 상황마다 다를 수 있는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여 부자연스럽고 융통성이 없으며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국한 되어 있고 자기중심적 이어서 하느님께로 나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는 어떤 일에도 즉시 발끈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흥분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어떤 일이 계획과 다르게 풀려 가더라도 끝없이 불평하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미련을 가지기 보다는 앞을 바라보며 다가올 것을 기다리고, 달라진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킬 줄 압니다.
참 가난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만 이루어지도록 자기의 뜻은 조용히 접어둡니다. 자기의 권리 주장이 하느님의 거룩한 활동에 방해되지 않게 합니다. 어떤 불행이 닥치거나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지면 이를 허락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찬미하며 이를 통해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되기를 바라고 믿습니다.
진정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
* 사부님 말씀의 구체적 예와 외적인 속임수
여러 가지 기도와 신심 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는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겉으로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의무 기도나 신심행사에 빠지는 일이 없고 아침저녁 기도나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기도 등 많은 기도를 빠뜨리거나 바빠서 못한다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들은 의무보다 더 많이 기도를 했으면 했지 덜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들은 가끔 이토록 성실하고 열심하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단식과 고행과 극기에도 아주 열심입니다. 관례상 의무적이거나 공동체가 하는 것에다 덧붙여서 더 많이 합니다. 공동체에서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열심에는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에서 주는 사소한 희생과 일상사는 열심한 자기들에게 너무 하찮아서 소홀히 하기가 일쑤입니다.
어떤 물건을 나누어 가질 때 부족하다면 제일 먼저 포기하고, 매우 검소하며, 거처는 아주 초라하고 가난하여 무엇 하나 그 방에서 남아도는 것을 그 방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이 침묵을 깨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고, 자원 봉사자를 요청하면 제일 먼저 나서는 등 더 열거할 필요도 없이 완벽한 사람들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완벽한 사람들이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일 수 있음도 잘 알았습니다.
성인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영성가 였습니다. 이 권고에서 사부님은 외적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과연 내적으로도 진실한지 알아볼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열심한 기도와 극기가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명망을 얻는데 목적을 두고 있을 때 그러합니다. 다른 분야에서 자기를 내세울 만큼 뛰어난 재능이 없다는 데서 느끼는 열등감 때문에 자기의 모든 정력을 신심 행사나 고행에 쏟고 이 분야에만 힘을 모으고 집착하는 수도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열심을 가지도록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에 의한 “올바른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열심이 하느님의 뜻에 의한 올바른 열심인지 혹은 자기 뜻에 의한 거짓 열심인지 알아 볼 수 있게 사부님께서는 분명한 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 우리가 이런 사람은 아닌가요? 자기가 좋아하고 아끼는 어떤 것을 빼앗기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
사부님은 이론만 내세우고 그 가능성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습니다” 라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사부님께서 단정 지은 많은 사람들 중에 속하지나 않은지 진지하고도 겸허하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 가난에 대한 복자 에지디오의 견해
누구에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말라!
다른 이가 네게 부당하게 대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아 받고,
네 죄가 사해 지기를 간구 하여라.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변명이나 대꾸함 없이
단 한번 부당한 취급을 받는 것이
100 명의 불쌍한 사람을 배불리 먹여 주는
자선 보다 더 낫고,
대낮에 도깨비에게 홀릴 정도로
오랫 동안 단식하는 것 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자신을 멸시하고 육신에게 단식과, 철야기도나,
편태의 무거운 짐을 지워 주면서도
이웃에게서 단 한 번이라도 부당하게
취급받기를 싫어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욕과 수치는 우리 안에 숨어있는 교만을 들추어내고
우리를 단련시키는 용광로와도 같다.
* 참조 : 기쁨에 찬 가난, 에지디오의 금언집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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