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악행을 언짢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 어떤 일도 못 마땅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자신에게 내릴 진노의 재산을 쌓는 것입니다.(로마2.5참조)
어떤 일 때문에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것은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빗나간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죄를 짓지 악마나 이웃이 우리의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1권고의 제목과 같이
이웃이 짓는 죄에서 비롯된 나쁜 결과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 쉽게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오직 한 원수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를 죄로 이끄는 빗나간 자유의지입니다.
이것은 쓸데없는 자의식과 아집에서 헤어나지 못한 체 결국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을 단절시키는 죄에 빠져들게 하여 우리를 해칩니다.
하느님의 종 -노예- 은 죄 외에 어떤 일도 못 마땅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모님께서도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루가 1.38)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존재 의미는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 나라 확장에 봉사하는데 있습니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을 그 분의 숨결이 서린 자취이며 그 분의 사절로 보았습니다.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악용할 때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면서도 자주 죄의 위험선에 다가갑니다.
어디까지가 죄이므로 거기까지만 가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계산하면서 위험선 주위를 맴돌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척하거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직접적인 죄가 아니면 그것을 즐기려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님의 종일까요? 못마땅하면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원죄가 얼마나 자주 우리 영혼에게 무질서와 큰 혼란을 초래하고,
자만심으로 가득한 나는 또 얼마나 우리를 거슬러 행동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항상 새로이 죄와 허물과 마주칩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도 심지어는 하느님께 봉헌된 사제와 수도자에게서도 죄와 허물을 봅니다.
마귀는 한 사람의 죄로 많은 사람을 해치기를 원하므로 모든 형제들은
누구의 죄나 악함 때문에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입니다.
의사는 앓는 사람에게 필요하므로 형제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죄를 범한 형제를 영적으로 도와줄 것입니다.(1회칙 5.7~8)
분노와 흥분은 본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애덕의 장애물이 되므로
누구의 죄 때문에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2회칙7.3)
우리는 거부당하고 멸시받는 죄지은 형제를 자만의 옥좌에서 내려다 봅니다.
죄지은 형제는 자기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데다가 더욱이 다른 형제들의 멸시도 받아야 합니다.
이제 죄지은 형제는 점점 더 고집스러워지고 자기의 죄에 푹 빠져서
자만에 찬 다른 형제들에게 대항할 것입니다.
오히려 죄라는 자기의 성안에 완전히 갇히게 되고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죄라는 재산을 더 모으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도 우월감에 차서 죄지은 형제를 재판정에 세운 죄수인양 심판하기에
우리까지 죄의 재산을 모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 모두는 사랑에서 나온 흥분이나 분개가 아닙니다.
성인은 “죄가 어떠하든 어떤 형제가 죄를 짓고 나서 그대의 얼굴을 보고 자비를 구했는데도
그 자비를 얻지 못하고 물러서는 형제가 이 세상에 절대로 없도록 할 때
나는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알고 있겠습니다.
그 형제가 자비를 구하지 않았어도 그대는 그가 자비를 원하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후에도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항상 불쌍히 여기십시오.”(봉사자 편지9~10)
“나보다 그(죄지은 형제)를 더 사랑하여 그 형제를 주님께 이끌도록 하고
이런 죄지은 형제를 항상 불쌍히 여기십시오.”(봉사자 편지 11)
성인은 죄와는 원수지간이 되고 죄인들에게는 의사가 되라고 하였습니다.(2첼라노187)
어떤 일이나 사람 때문에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말로서 죄인이나 죄와의 올바르고 합당한 만남도 무소유(無所有)의 삶,
오롯한 가난으로 이루어 질 수 있음이 명백해 집니다.
다른 사람의 행위에서 상처받고 화를 내는 것은 좋은 대우와 특별한 배려와 인정,
존경과 주목 등에 대한 당연한 기대에서 비롯됩니다.
이 모두를 마치 자기 소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존경을 표하고 나의 내외적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인격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치를 몰라준다고 화를 내고 인격손상이며 치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격적 모욕과 멸시를 잊어버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향해 공격적인 태세를 취하게 됩니다.
이런 반응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잊어버리는데서 기인합니다.
상처받은 감정은 진리를 바라 볼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친히 죄인들이 마련해서 걸머지운 십자가를 받아 들이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인간의 죄를 공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시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의를 달게 받으시고
오해와 멸시를 받고 당신이 벗이라 부르고 사랑하신 이들로부터 배반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자아포기, 존경과 인정받을 권리의 포기 같은 영적 가난을 통하여 죄를 이기셨습니다.
순명이라는 가난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고 당신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아들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참된 종입니다.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이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종은 죄만을 못마땅해 하고 죄인을 사랑합니다.
이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폭 넓은 가난, 아무 소유없이 사는 삶의 토양에서 솟아올라 활짝 피어납니다.
물질에서의 가난은 가난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덕행에 뛰어나게 하고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하고 생활하는 사람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지극히 높은 가난의 탁월성입니다.(2회칙 6.4)]
성인이 말하는 가난은 주님의 영에 좌우되는 삶이며 영성생활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가난을 이것이나 저것을 단념해야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았습니다.
부정적 생각은 충족되지 않는 생활에서 나옵니다.
프란치스칸 시각에서 볼 때 가난은 충족된 삶이며, 우리는 언제나 이 위대하고 안전하며 조화된 삶인
참다운 가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 대전에서 전구하여 주시기를
가난한 이의 대부인 우리 사부님 성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기도 중에 애원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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