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아그레다의 아침 하늘
박일규 시인
스페인 왕복에 칠십 만원의 싼 비행기 값의 여정은 그만큼이나 경유지가 서너 곳씩 겹쳐 꽤나 힘들게 참아야 하는 지루한 시간이요 거리였다. 인천을 떠나 방콕에 들르고 싱가폴에서 내려 몇 시간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파리를 경유하여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하는데 30시간이 걸렸다.
꽤 고달프긴 했지만 마드리드에서 하루 쉬어가기 위하여 목적지인 아그레다에 가는 것을 하루 늦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이 끝나는 대로 서둘러 버스를 타고 ‘소리야’ 라는 중간 도시를 거쳐 택시 요금 40유로의 거리인 아그레다에 그날로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내가 세 차례나 거듭하여 읽어서 친숙해진 존자 아그레다 예수 마리아 수녀를 통해 쓰여진 ‘하느님의 어머니’의 ‘하느님의 신비한 도성’에 대한 애착과 친근감이 일흔한 살의 나를 이토록이나 겁 없이 서둘도록 재촉하는 것이다. 건물다운 건물이나 도시다운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창세적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고 어머니의 가슴같이 포근한 모성 가득 실린 아그레다의 산야는 고운 석양볕을 드리우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17-22)
과연 이 세상의 몇 사람이 자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를 것인가? 나 자신에게도 물어보지만 그때마다 확답을 머뭇거려 온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그레다의 예수 마리아 수녀의 가족들 모두는 주님 말씀대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네가 살던 코로넬성곽은 재단장하여 성전을 꾸미고 두 아들과 아버지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되고 두 딸과 어머니는 살아오던 집과 집터를 바쳐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자들이 된 것이다.
한 사람도 어려운데 이렇게 여섯 가족 모두를 성직자와 수도자로 만든 배경과 근원을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날로 더욱 간절해져서 오직 이 한 곳을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나 온 것이다.
그 집의 큰 딸인 아그레다의 예수 마리아 수녀는 25세에 그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에 순명했으며 주님과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성모님의 일생을 두 차례나 기록하며 63세 별세 때까지 그 원장직에 머물러 있었다.
얼마나 하늘나라의 신뢰가 깊었기에 하느님의 어머니의 일생기의 기록을 그분께 맡겼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의 온 생애는 그분에 의해 소상히 세상에 밝혀지게 된 것이다. 아그레다의 예수 마리아 수녀를 통하여 하신 성모님의 말씀 한 토막을 이 글 속에 소개 해보고 싶다.
“죽음의 때나 그 후의 심판에 관하여 잊어버리는 것보다 크고도 나쁜 오류는 없다. 이 오류의 문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생각하여라. 처음의 여자 하와에게 뱀이 말한 것은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창세 3,4)고 한 것이었다.
이렇게 언제나 속아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불행한 운명을 잊어버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는 대단히 많다. 이와 같은 결말을 피하기 위하여 그대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시작하여라.
많은 것을 얻고 조금 밖에 갚지 않은 것, 은총이 많으면 많을수록 심판은 더 엄해진다는 것, 주님의 은총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부주의하지 않고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하여라.”
- ‘하느님의 신비한 도성’ 본문 중에서
프랑스 피레네 산맥과 국경을 이루는 스페인 북쪽 아라곤 지방 다라소나 교구에 속하는 평화로운 산야 속에 숨어있는 아그레다 마을, 그 정상에 항상 구름이 걸려있는 아름다운 몽카이요산이 바라다 보이는 마을 한 쪽에 철저한 봉쇄 수녀원 ‘원죄 없는 잉태의 맨발의 수도회’는 성전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그 성전 오른편 앞쪽에는 4백년 된 아그레다의 예수 마리아 수녀의 아직도 숨 쉬는 소녀 같은 신비한 유해가 사람들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안장되어 있다. 한 자매님의 안내로 제대위에 장엄하게 현시된 성체께 예배드리고 수녀님의 유해 앞에 엎드렸을 때 머리 속을 죄는 듯 꽈악 채우고 온 몸으로 퍼져가는 전류와 같은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숨 쉬는 듯한 예수 마리아 수녀의 4백년 된 시신
그치는가 하면 또 그런 현상은 되풀이 되곤 하는 것이었다. 밤늦게 호텔방에 돌아와서도 몇 차롄가 그 현상은 되풀이 되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신앙의지의 나사못을 조임 받는 느낌이랄까? 그것이 무엇인지 오랜 세월을 두고 차츰 깨달아 가야 할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아그레다를 떠나오기 전전날 이른 아침이었다. 독감의 기침과 목구멍의 근지러움과 콧물 닦아내기 전쟁 속에서도 신비한 새로운 것들과 또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의 신바람 속에서 훌쩍 가버린 한 주일이었다.
이날 아침은 아침 미사가 없는 날이었다. 나는 호텔 창문을 열고 동편하늘을 바라보았다. 동편하늘이 점점 밝아오다가 이 하늘이 그 바탕의 하늘빛과 그 위에 곱게 깔린 구름조각들과 그것들을 비추며 떠오르는 햇살과 어울려 몽카이요산 능선을 타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감당 못하게 연발하는 기침 동작 사이사이로 몸을 가누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찍고 나면 또 달라진 새 하늘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날 아침의 하늘의 변화가 ‘하느님의 신비한 도성’이신 성모님의 생애가 온 누리와 사람들안에 수많은 열매를 거두는 것을 미리 축하하는 인류의 미래를 향한 하늘의 축포이기를 기원하면서 아그레다와의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다.
‘하느님의 신비한 도성’ 최초 출판 후 40년이 지나 이 책에 대한 의견을 구했을 때 유럽의 유명한 모든 대학의 교수들은 최고의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유럽의 교도적 입장에 있는 전수도회의 학자, 교직자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회, 베네딕토회, 갈멜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바실회, 삼위일체회, 메세다루회, 히어로님스회, 성체현시회, 개혁아우구스티누스회, 데아지누스회와 또 모든 일반 성직자는 전원 일치하여 사라만카 대학에 의한 원저(原著)의 시인을 지지했다.
‘하느님의 신비한 도성’에 대하여 바티칸에서의 최초의 공적발언을 하신 분은 교황 이노센트 11세이셨다. 1686년 7월 3일.
‘하느님의 신비한 도성’은 모두 일곱 분의 교황님께서 인정한 유례없는 책으로 스페인 국왕 샤를로스 2세와 필립 4세가 이 책을 애독했으며 교황님께 추천했던 얘기도 유명하다. 2003년 성직자들과 신학자들, 또 저명한 교수들이 이 책에 관하여 17편의 논문집을 스페인 사라만카 대학에서 출판하였다. 그 외 20여권의 책자들은 두고두고 우리말로 번역되어 성모님의 생애를 전하며 우리들의 영성심화에 값진 양식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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