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복음 준비
59. “고통은 우리에게 성실한 벗이었다. 고통은 여러 가지 모습과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일련의 환시도 그러하다. 까다로운 학자들과 일체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내가 세상에 탄생하기 전후와 탄생과 동시에 일어났던 광경들을 네게 보여 주면서 왔다. 그 광경 자체는 넉넉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광경 자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항상 하느님께 더 큰 찬미를 드리기 위하여 -사실 이 때문에 그것이 용서받기는 하였다마는- 현실을 그대로 두었으면 대단히 아름다웠을 것을 비현실적인 것을 만드는 인간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덧붙여진 요소로 인하여 왜곡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이 방식으로 인하여 내 인간성과 마리아의 인간성이 깎아내려지지 않고, 마찬가지로 내 천주성과 아버지의 위엄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사랑이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내 어머니의 공로와 내 완전한 겸손과 또한 영원하신 주의 전능하신 자비도 그로 인하여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광경들을 네게 보여 준 것은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 광경에서 유래하는 초자연적인 의미를 적용할 수 있게 하고, 그 의미를 너희들에게 생활 규칙으로 주기 위해서이다.
십계명은 율법이다. 그리고 내 복음은 이 율법을 더 명백하게 하고 지키기에 더 사랑스러운 것이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 율법과 이 가르침은 사람들을 성인을 만드는 데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너희 안에서 정신을 지나치게 지배하는 너희 인간성으로 하도 얽매여서, 율법과 내 가르침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낙망하여 멈추거나 한다. 너희들은 너희들 자신과 복음의 본보기를 들면서 너희들을 향상하게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예수, 마리아, 요셉은(성인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와 같지 않으셨어요. 그분들도 강했었지요. 그분들은 고통 중에도 금방 위로를 받으셨고, 또 그분들이 당한 그 얼마 안 되는 고통 중에도 격렬한 감정(수난)을 느끼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은 벌써 세상과는 관계가 없는 분들이었지요.”
얼마 안되는 고통이라고! 격한 감정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우리에게는 고통이 충실한 벗이었다. 고통은 갖가지 모습을 띠었었고 온갖 이름을 다 가졌었다.
수난...너희들을 빗나가게 하는 악습들을 ‘수난’(Passions, 열정)이라고 불러서 부적당한 말을 쓰지 말아라. 그것들을 숫제 ‘악습’ 이라고 부르고 게다가 으뜸가는 악습이라고 불러라.
이러한 악습들을 우리가 몰랐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눈과 귀가 있어서 보고 들을 수 있었고, 또 사탄은 행동 중에 있는 이 악습들을 그 추잡스러움과 아울러 보여 주고 그의 암시로 우리를 유혹하면서 이 악습들을 우리 앞과 우리 주위에 내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의지가 하느님의 뜻에 맞겠다는 의향으로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그 추잡스러움과 그 암시가 사탄이 꾀하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그리고 사탄이 악착스럽게 굴면 그럴수록 우리는 그가 우리 육체와 정신의 눈에 내보이는 더러운 암흑에 대한 혐오로 하느님의 빛 속으로 더욱 더 피해 들어갔었다.
그러나 철학적인 의미로서의 수난(Passions)은 우리 안에서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고향을, 나자렛이라는 작은 도시를 팔레스티나의 다른 도시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우리는 우리 집과 친척과 친구들에 대하여 애정을 느꼈다. 왜 우리가 그런 감정들을 느껴서는 안 되었겠느냐? 그러나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감정들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좋은 동반자를 만들었다.
내 어머니는 한 4년 뒤 나자렛으로 돌아왔을 때, 자기 집으로 돌아와, 그가 ‘예’ 하는 말로 자기의 태를 열어 하느님의 배아(胚芽)를 받았던 방 벽에 입을 맞추었을 때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요셉은 그의 친척들과 더 많아지고 커진 조카들에게 기쁘게 인사하였다. 요셉은 동향인들이 그를 기억하고, 즉시 그의 능력 때문에 부탁을 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좋아하였다. 나도 우정에 민감하였고, 유다의 배반 때문에는 정신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어머니도 요셉도 집과 친척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하느님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해야 할 때에는 히브리인들의 미움이나 유다의 원한을 살 수 있는 말들을 참지 않았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를 나에게 집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구속자로서의 나에게가 아니라 부유한 나에게 집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빵을 많아지게 한 나는 내가 원하기만 했으면 돈을 많이 생기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인간적인 만족을 마련해 주려고 오지는 않았었다. 내가 부른 사람들에게 더구나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는 희생과 초탈과 순결한 생활과 자기 신분에 맞는 겸손을 권장하였었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것이 어떤 사람을 붙잡아두는 방법이라 해서 그의 탐욕과 관능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돈을 그에게 주었다면, 내가 무슨 스승이며, 무슨 의인이었겠느냐?
내 나라에서는 스스로 ‘작아지면’ ‘위대한 사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내 나라에서는 지배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마귀들의 침대에 까는 짚이다. 세상의 위대함은 하느님의 율법과는 대립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부정한 방법으로 가장 좋은 자리를 독점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웃을 발판으로 써서 이웃을 발로 밟고 그 위에 올라선다. 지배하기 위해서는 죽일 줄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죽일 줄을 알고, 자리들을 강탈하거나 나라들을 정복하며, 남에게서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재산을 빼앗아서 자기 자신들이 부자가 되는 자들을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아니다. ‘위대함’은 죄악과 양립하지 못한다. 위대함은 착함과 정직과 사랑과 정의에 들어 있다. 너희들의 ‘위대한 사람들’이 어떤 독이 든 과일을 너희들에게 주는지 보아라. 그들은 그 열매들을 그들의 내적 정원의 악마적 퇴폐 속에서 따는 것이다.
네가 마지막으로 본 환상이-나는 그 환상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지, 그들에 관한 진실을 듣기를 원치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추천해도 소용없을 다른 것에 대하여 말하느라고 지체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환상은 마태오 복음에 두 번 말한 어떤 특별한 점을, 두 번 되풀이한 어떤 구절을 해명한다.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라’(2: 11),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2: 27).
그런데 너는 마리아가 자기 방에 아기만 데리고 혼자 있는 것을 보았다.
마리아는 자기들이 진창이고 부패한 만큼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 날개와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아기를 낳은 후의 마리아의 동정과 요셉의 순결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는다. 그들은 지극히 부패한 자기들의 영혼과 육체로 인해서 더럽혀진 자기들의 정신이 너무 타락하여. 여자에게서 육체를 보지 않고 영혼을 봄으로써 그를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숭고한 것을 원하면서 초자연적인 분위기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자기를 들어올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자 그러면, 나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부인하는 저자(著者)들에게, 나비가 될 수 없는 벌레들에게, 그들의 정열의 점액으로 더러워지고 백합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는 파충류 같은 비열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리아는 동정녀였고 동정녀로 남아 있었으며, 그의 영이 오직 하느님 성령과 결합한 것과 같이 그의 영혼만이 요셉과 결혼하였다고. 마리아는 성령의 작용으로 외아들을 잉태하여 가졌었으니, 그것은 하느님과 마리아의 외아들인 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내 어머니라는 복된 여인에 대한 애정 곁들인 존경 때문에 나중에 피어난 전설이 아니고, 하나의 진리이며, 이 진리는 초기에서부터 알려졌었다.
마태오는 다음 세기에 난 사람이 아니라, 마리아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다. 마태오는 순진하고 보잘 것 없는 이야기를 믿기 잘하는 시시한 무식장이나 미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너희가 지금 세리라고 부르고 우리 시대에는 염세리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보고 듣고 이해할 줄을 알았고 진리와 오류를 구별할 줄 알았다. 마태오는 사실들을 풍문으로, 중간에 든 사람을 통하여 들은 것이 아니다. 그는 마리아의 입에서 정보들을 얻었다. 그는 스승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마리아에게 정보를 가르쳐 달라고 청할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마리아의 신성불가침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마리아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내 친척들도 마리아가 다른 아이들을 낳았었더라면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 유다, 시몬, 요셉은 마태오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만일 여러 가지 설명이 있었다면, 그것들을 쉽게 대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오는 ‘일어나 네 아내를 데리고’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고,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라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와 남편 요셉’이라고 말하였다.
저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내’라는 용어가 욕되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말투였다고 내게 말하지 말기 바란다. 순결을 부인하는 자들아, 그렇지 않다. 성경 첫머리에서부터 ‘...이리하여 남자는...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실질적인 결혼 전에는 ‘짝’ 이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는 여러 차례, 또 여러 장에서 ‘아내’라고 부른다. 아담의 아들들의 배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불린 사라도 마찬가지이다. ‘네 아내 사라’라고 되어 있다. 또 롯에게도 ‘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라고 하였다 룻기에 ‘마홀론의 아내 모압여자’라는 말이 있다. 열왕기 상에는 ‘엘가나는 두 아내를 거느렸다’라는 말이 있고, 더구나 ‘그리고 엘가나가 그의 아내 안나와 동침하였다’는 말이 있고, 또 ‘엘리아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역시 열왕기에 ‘히타이트 사람 우리아의 아내 벳사베가 다윗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말이 있다. 또 교회에서 너희들에게 결혼생활에서 거룩하게 지내라고 권고하기 위하여 너희들의 결혼식 때에 노래하는 아름다운 책인 토비트에는 어떤 말이 있느냐? 이런 말이 있다. ‘그런데 토비트가 자기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또 ‘토비트는 그의 아들과 아내와 같이 도망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복음서에, 즉 그리스도 시대에, 현대어로 쓰던 시대, 그때로서는 현대어로 쓰던 시대, 따라서 베껴쓰는 데 착오가 있을 수가 없던 시기에 바로 마태오 복음 22장에 이런 말이 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죽어서 그의 아내를 아우에게 남겨 주었다’*고 말이다. 또 마르코 복음 10장에 ‘아내를 버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고, 루가는 네번 계속해서 엘리사벳을 즈가리야의 아내라고 부르고, 8장에는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라는 말이 있다.
너희들이 보다시피, 이 명사는 주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금지된 단어가 아니었고, 하느님과 그분의 놀라운 업적이 화제에 올랐을 때에는 말해서 안 되고 더구나 써서는 안 되는 불결한 단어가 아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하고 말할 때 마리아가 요셉의 아내는 아니면서 예수의 친어머니였다는 것을 너희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언제까지나 요셉의 ‘동정녀인 아내’로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환상이 마지막 교훈이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후광이다. 침범되지 않은 동정녀, 순결하고 의로운 남자.
이들은 두 송이의 백합이었으니, 나는 그 가운데에서 오직 순결의 향기 이야기만 들으면서 컸다.
작은 요한(마리아 발또르따)아, 네게는 자기 집과 고향을 억지로 떠나게 된 마리아의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에 대하여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필요없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네가 알고 있으며, 네가 그 때문에 죽도록 괴로워한다.
네 고통을 다오, 나는 그것만을 원한다. 그것이 네가 내게 줄 수 있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은 것이다. 마리아야, 오늘은 금요일이다. 네 십자가를 질 수 있게 골고타에서 내 고통과 마리아의 고통을 생각하여라.
평화와 우리의 사랑이 너와 함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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